홍대앞 관극세모

대학 다닐 때 종종 받았던 나 개인에 대한 질문 중 곤란했던 것을 꼽아보자면
너는 남자친구 안 사귀니?(ㅋx100)와,
너는 너희 학교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니? 였다. 

홍대앞, 모두 알다시피 홍대앞은 홍익대학교앞을 지칭하지만 단지 홍익대학이라는 건물 앞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교 앞이 얼마나 번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그리고 그 번화함이 얼마나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름으로. 전자의 의미로 홍대앞을 물으면 얼마든지 알지만 후자의 의미로 홍대앞을 묻는다면 나와는 먼, 내가 알 수 없는 어떠함을 대표하는 이름이 된다.

나에게 홍대앞의 어떠함 : 풍부함과 과잉을 오가는 번화함은 내게서 등 돌린 무엇이었다. 내가 영영 알지 못할 어떤 열심들이 잘나간다는 모양새로 있었고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몹시 힘이 드는-피곤한-여건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저 곳은 뭐하는 곳일까 궁금하다가도 막상 비용을 들여 알긴 벅찼다는 것이다. 일단은 돈. 많이들 그렇듯이 한정된 수입아래서 줄일 수 있는 지출은 식비와 여가비니까 값이 싼 학교 안에서 해결하게 된다. 돈만 비용이 아니다. 돌아다니자면 시간, 감정은 물론이거니와 때론 용기까지 필요하다. 싸이월드에 누군가 올린 맛있어보이는 음식사진이나 멋있어보이는 어딘가를 보면 부러워는 잘했으면서도 막상 가보자는 안 되는 것이 후자의 비용도 한 이유인데 아무튼 그런 고비용을 부담하기에 나는 대부분 부족하였던 거고 그러니 홍대앞에 놀러갈건데 좋은데를 알려달라면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해 장난섞인 핀잔을 받았던거다. 느이 학교앞도 모르냐는 거지. 조금 주눅들기도 했었는데 이제와 보면 학교안에만 있었어도 답답한 걸 몰랐던 것이라 어쩌면 형편은 차치하고 나는 그냥 번화함을 즐길 기질이 아니었지 싶다.

그럼에도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소(와, 있어 보이네, 나 연구원이었음 ㅇㅇ)도 그만둔 뒤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홍대 앞에서 일을 찾았던 것은 왜일까. 하필 밥집일 것은 무엇이며 하필 서빙일 것은 무엇일까. 집 가까운 일산에도 가게는 많은데 영 내키지가 않았던 것은 무엇일까. 

홍대앞이 이 문화 저 문화 돈으로 짜깁기된 가장행렬 놀이동산이라 빈정댔으면서도 내게 등 돌린 풍경이라 여겼으면서도 내 자리를 갖고 싶을만큼 나는 이 별스러운 번화함이 좋았나. 번화함에서 헛헛함을 느끼고 그럼에도 그 번화함의 주변에 박혀있고자 하는 태도를 가졌다. 이를 뭐라해야 좋을까.

가게의 잠긴 문을 열고 오픈 준비를 할 때, 마감을 마치고 불 꺼진 가게 앞에 느긋하게 앉아있을 때, 일하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먹고 마시고 대화하며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몹시 좋다. 내가 일하는 일했던 곳들이 나는 좋고 남이 놀러오는 곳에 일하는 사람으로 있는 것도 좋다.

나는 RPG(롤플레잉게임)의 유저가 되어 게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게임의 NPC(논플레이어캐릭터)이길 바라며 NPC중에서도 상점 직원으로 사람들이 포션를 사거나 장비를 갖추는 모습을 보는 셈이다. 나는 포션도 장비도 갖추지 않지만 그 곳에 있을 수 있다. 포션도 장비도 필요없는 채로 게임의 번화함에 위치하고자 하는 태도. 어쩌면 결핍을 자조 내지 자족하려는 태도에 의해 왜곡된 행태가 아닐까.

결핍에 의한 태도도 태도이고 왜곡되서 자라는 것도 성장이라면 성장인가. 나는 이것이 좋은데 좋아서 좋은가 좋아해야해서 좋은가. 뭣하러 따질까면 그냥 누구나 익히 그렇듯 제대로 못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번화함을 징그럽게 여긴다면서 자처해 번화함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느끼는 만족감에 대해 불안했다. 가장행렬같은 번화함 중에 내가 일하는 곳의 진정함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되는 일은 내게 비약하자면 꽉막힌 중에 구멍을 뚫음과 같다.

가슴이 답답하다 바늘구멍이라도 뚫어 놔야 내 생명이 숨을 게 아니냐
(조지훈/관극세모觀劇歲暮)

이거다.
내가 다닌 학교 앞이 국가적으로 손꼽히는 번화가더라. 끝-의 마인드맵이면 좋았을까. 아니다. 번화함의 구석구석 번뇌거리로 찾는 글썽맞은 인간형일지라도 그러니 더욱 좋아할 구멍을 찾는 것은 필요한 잘하는 일이다.

다만 내가 해결해야할 것은 일을 마친 뒤 절인 부추 같은 채로 집에 와 남겨온 부추무침을 집의 식탁에 올려놓으며 느끼는 심정이다. 음식의 유용함을 유지하는 보람과 유용한 음식을 가족에게 전달하는 보람에도 내가 가족에게 주는 유용함이 이것임에 대한 절여지는 심정.
아, 절인 부추처럼 고단하고 절인 부추처럼 맛있고 그럼에도 절인 부추일 뿐인 삶을 계속 사랑하려고 구멍을 뚫는다. 생명이 와서 쉬었다가 그림을 뱉고 곧바로 번화함에 묻힌다.

언제쯤 제대로 감당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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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에 대한 흥미에서 출발하여 성스러움을 감당못하고 있다.

왼손들'


왼손들' 2








실제 손보다 약간 크게 그려진. 무척 유려한 것.
손그림에선 나한테만 예쁜 내새끼를 보는 기분이 든다.
내 아름다운 자식을 자꾸 불러 그 까르륵대는 모양을 보는 것이 언제나 기쁜 것처럼 왼손을 그린다.
두번째 손의 아슬아슬함과 세번째 손의 유려함
다섯번째 손 중앙의 배꼽같은 선이 특히 맘에 든다.







가끔 와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한동안 업데이트는 없을 것 같습니다.

월간이리 11월호는 그레고리 콜버트입니다.


심신이 약해져 콸콸 흐르는 물을 보면 귓속부터 괴롭습니다.
시간도 콸콸 흘러 11월이 되었네요.
그레고리 콜버트는 사진을 보면 다 아실만한 유명하고 인상깊은 사진작품을 여럿 남겼으며
지금도 활동중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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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콜버트 (Gregory Colbert)

세상사에 초월한 사람, 몹시 순수한 사람, 이해의 범주에 들지 않는 기인을 표현할 때 동물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그리곤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어린 시절 일화 중에 아무도 타지 못하던 사나운 말을 일순 진정시켜 보인 것, 깨달음의 순간에 새가 찾아와 어깨에 앉는다는 류의 이야기도 그런 것들이고요. 동물을 통해 신의 메시지를 받거나 자신의 권위를 입증합니다. 특히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동물들과 가까운 모습은 그 사람의 어떤 뛰어남을 입증해주고 누구보다 신성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그것은 낙원에 대한 동경과 맞닿아 있을 겁니다. 성경에 보면 이사야의 예언 중 그리스도의 때에는 표범과 새끼 염소가 함께 눕고,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어울리는 사이에 어린아이가 그들을 이끌고, 간난 아이가 뱀의 굴에 손을 넣으며 놀아도 물리지 않을 것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그렇게 야생동물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에는 그러한 것이 낙원이며, 그러한 모습으로 사는 사람은 누구보다 낙원과 가까운 사람이라는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그레고리 콜버트의 사진에서 우리는 그런 낙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코끼리에게 가만히 책을 읽어주고 있는 아이. 치타와 함께 바위에 앉아있는 아이. 하늘에 천을 펄럭이는 사람의 뒤로 독수리가 날고, 고래와 사람이 함께 헤엄을 치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무척 아름답고 볼 때마다 경이롭습니다. 사진의 순간은 찰나라도 화면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영원한 뭔가에 대해 보여주는 듯합니다.

동물과 사람의 어우러짐이라는 요소도 그렇지만 동적인 순간의 포착이든 멈춰있는 순간이든 화면 자체가 무척 아름답습니다. 심도가 깊지 않은 배경처리로 동물과 인간 상호에 집중되어 있는 사진은 몇 가지 요소로 전체를 그려내는 무대와 같고 그 속에 놓인 사람과 동물은 함께 춤을 추거나 대화하거나 생각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용하는 순간 중에서도 가장 극적일 때를 포착해 기록한 듯 리듬이 공유되며, 이질적이지 않고 조화롭게 보입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들이 직설적으로 담겨있죠. 그리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척 동양적이라는 것입니다. 작가는 유색인 모델을 세웠고 그들의 복장은 수도승을 연상시킵니다. 야생동물과 인간, 자연, 동양적인 것들이 어우러진 이미지. 정신적, 영적인 동양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서구식 삶이 놓친 정신적인 낙원을 동양에서 찾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러한 동경과 그리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그러한 야생동물과의 어우러진 모습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고양감을 주고, 그가 보는 것을 나도 보고 싶고, 내게도 동물이 저렇게 다가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 그런데 이 것은 따져보자면 어쩌면 좋게 생각해버리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자연은 우리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울타리를 치지 않으면 금새 잡초와 야생동물이 밭을 헤쳐 놓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과 얼마만큼 먼 것은 우리 삶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야생을 맨살로 대하는 것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초월하기란 삶에서 초월하기와 같습니다. 그러한 삶은 우리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먹고사는 삶을 악다구니로 칭하고 그러한 악다구니에서 벗어난 느낌. 안 먹어도 배부른 기분의 먹지 않아도 더 이상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열릴 것 같은 그러한 기분은 낭만적으로 상상하는 낙원으로만 존재합니다. 그레고리 콜버트의 사진의 그 순간들을 자연스러움으로, 자연스러운 조화로 느끼는 것은 그래서 일종의 착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의 사진들을 볼 때마다 저는 마음이 복잡합니다. 하지만 역시 이따금 찾아 보게 되는 것은. 삶에서는 사자를 목 졸라 죽이는 삼손과 같은 힘을 필요로 하지만, 굶주린 사자굴에 갇혀서도 사자가 헤치지 않는 다니엘과 같은 인물을 더 높은 경이로움으로 대하는 것과 같겠죠.
뭐, 현실에선 삼손과 다니엘 둘 다 보기 힘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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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메인을 맡으렴
내가 좋아하는 얼굴, 여섯_린넨 텍스쳐 종이에 아크릴릭_각 33*41cm_2013

월간이리 10월호는 데이비드 호크니 입니다.


현재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 그림이 와있는 데이비드 호크니가 이번 달의 뒷표지입니다.
별로 안 닮게 그려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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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

우리는 태양빛을 소화하지 못합니다. 비타민 D를 만들어내긴 하지만요. 햇빛을 받아서 단백질을 합성해 내거나 하진 않죠. 식물은 다릅니다. 태양빛을 받아 그들 방식의 소화를 해냅니다. 그리고 우린 그 식물을 먹거나 또 그 식물을 먹은 동물을 먹어 소화할 수 있습니다. 먹이 사슬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고요. 남이 소화한 것을 먹는 것에 대해 말해보자는 건데요. 때로 남의 그림을 보는 것으로 실제를 더 잘 보게 되는 때에 대한 겁니다. 남의 그림을 보는 것으로, 그가 소화해낸 것을 통해 실제를 더 잘 받아들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그린 걸까, 무얼 그린 걸까. 왜 그린 걸까? 하며 나라면 어떻게 표현했을지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려보기도 하구요. 그런 과정에서 표면적으로는 형태를 표현하는 법, 기법에 대한 이해가 높아집니다. 기법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작가에게 온전히 속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표현이란 것이 사실은 재료와 그 기법의 한계에 의한 것일 수도 있음과, 그 한계에 대한 적응 내지 극복의 과정을 깨닫기도 합니다.
본 것을 평면으로 옮김에 있어서의 많은 우여곡절은 그림 그리는 이들에게 지금도 계속 되는 것입니다만, 사진이 넘쳐나고, 인쇄가 손쉽고, 직접 투사가 가능하며, 컴퓨터상에서의 이미지 복제와 수정이 간편해진 지금은 우리는 다른 것을 걱정해야합니다.

‘이미지들은 우리가 과거에 생각했던 현실의 정직한 묘사일까,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미치지 못할 만큼 생생하고 사실적이라고 여겨왔던 사진이 실은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하고 세계를 선명하게 바라보는 우리의 능력을 감퇴시킨 것은 아닐까?’
데이비드 호크니 저 ‘명화의 비밀’ 196p

많은 시각예술가들이 그렇지만 데이비드 호크니를 이야기 할 때엔 특히나 더욱 바라보는 방식, 그려진 방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작업요소로 삼는 작가임을 말해야합니다. 호크니는 1999년부터 서양미술사에 있어 광학기술이 그림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여 2001년 자신의 저서 ‘명화의 비밀 Secret Knowledge : Rediscobering the lost techniques of the Old Masters’에서 밝혔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것으로 앵그르, 카라바조, 벨라스케스 등의 대가들이. 그리고 많은 다른 화가들이 15세기 초부터 광학을 이용하여 그들의 그림에서 인물과 사물의 형태와 양감, 색채의 표현의 정확성을 높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무엇을 그렸느냐, 그들이 본 것을 그렸다. 그러면 그 어떻게 보았는지, 보는 방법에 대해 묻게 되죠. 신고전주의의 대가 앵그르가 그린 인물 드로잉이 무척 작은데도 완벽하리만치 정교한 것을 본 호크니는 어떻게 이렇게 그렸을까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는 결국 많은 화가들이 거울과 렌즈, 강한 조명과 암막을 이용하여 대상을 평면에 투영했고 그것을 손으로 복사했다는 것을 밝힙니다.
사진기술이 없던 시절 실제 같은 그림을 그토록 놀랍게 그려낸 화가들에 대한 경이로 꽉 차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광학을 이용했다는 것에서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일종의 꼼수를 부렸으니까요. 그렇다더라도 광학기술을 도입하여 그린 화가들의 그림이라고 평준화를 이루지는 않습니다, 그림은 여전히 본 바를 손으로 그리는 것이라 잘 보고 잘 그리는 화가만이 뛰어난 화면을 만들어냈습니다.
광학기술에 의존해 가능했던 실제 같은 그림은 그 기법에 의한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카메라의 눈은 하나, 인간의 눈은 둘’입니다.
호크니의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그림은 그의 1960년대와 1970년 초반대의 것으로 주로 로스엔젤레스의 수영장의 풍경과 인물을 찍은 사진을 기반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크니와의 대화를 기록한 마틴 게이퍼드의 저술 ‘다시, 그림이다 Conversations with David Hockney by Martin Gayford’에 의하면 호크니 역시 자신의 당시 그림들을 좋아하지만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방식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것은 카메라 렌즈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사진이 궁극적으로는 실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카메라는 기하학적으로 대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기하학적으로 보지만 또한 심리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내가 저 벽에 걸린 요하네스 브람스의 사진을 본다면, 그 순간 브람스는 문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일 겁니다. (중략)’
마틴 게이퍼드 저 ‘다시, 그림이다’에서 호크니의 발언 중 53p

호크니는 보는 방식을 연구하며 새롭게 그리기 위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으며 그에 기반하여 작업도 계속해서 바뀌고 있습니다. 최근의 실험으론 야외에서 그린 대규모 풍경작업을 들 수 있으며, 현재 한국에 그 작품이 와있는 상태인데요.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Bigger Trees Near Warter’가 전시중입니다. 그림은 12.19m × 4.57m 사이즈의 대작으로, 대략 50호 크기의 캔버스 50점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과천 미술관의 넓은 공간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워낙 큰지라 양팔을 벌린 디귿자 형태로 설치되었습니다. 전시장에는 그림과 함께 A Bigger Picutre라는 60분짜리 영상을 볼 수 있어 영상을 통해 지금 전시중인 그 거대한 회화작품이 영국의 테이트 모던에 기증되었으며, 야외에서 제작된 가장 큰 그림으로 꼽을 수 있다는 것과, 호크니의 작업 방식, 작업에 대한 생각, 생활과 같은 것 볼 수 있습니다. 호크니가 그 작업을 위해 그린 다양한 드로잉을 함께 볼 수 있었더라면 무척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아 아쉬움이 큽니다만, 뛰어난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소화시키고 더 잘-새롭게 보게 되는 면에서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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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9~9/30 동안 이리카페에 그림을 걸어두었었습니다.


지난 9월 9일부터 9월30일의 약 3주간 이리카페에 제 얼굴 드로잉을 걸어두었습니다.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고 작가가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은 채 그림만 붙여두었기때문에 쌀쌀맞다-내지는 무책임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는데, 거기에 대해 말을 붙이자면, 제가 과해지지 않고, 회의감 또한 갖지 않고 그림을 보일 수 있는 방식이라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공간을 빌려준 분에게도 그림을 건 내게도 건강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는 보는 이의 입장을 더 고려하겠습니다.

이리카페는 마포구 상수동에 있는 여러모로 멋진 카페입니다.
각종 문화공연과 전시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며, 흥미로운 서적도 많이 있습니다. 월간이리라는 무가지를 발행하고 있고요.
커피를 기본으로 생과일쉐이크, 차 종류와 기본 칵테일, 병맥주와 생맥주가 구비되있고, 간단 식사, 안주 메뉴도 있습니다. 11시부터 1시까지 영업하며, 올해(2013년)까지는 실내흡연이 가능합니다. 금연구역도 있습니다.

저는 월간이리에 뒷표지를 연재하는 인연으로 비교적 쉽게 그림을 걸어두게 되었습니다. 전시나 대관 문의를 항시 받는 것으로 압니다.

방문하셨던 분들께는 모쪼록 눈과 정신이 즐거우셨길 바랍니다. ^_^
내가 좋아하는 얼굴_린넨 텍스쳐 종이에 아크릴릭_33*41cm_2013
스캔 상태가 좋지 못합니다.

9월입니다.

집에 들어가는 문을 열면 쾌쾌한 습한 냄새가 찡합니다. 실제의 우리집에 도착하기엔 두 개의 문이 더 있는데, 하나는 늘상 열려 있다가 가끔 주변의 불길한 소식에 잠기는 문, 또하나는  집의 사각형을 지켜주는 문으로 역시 늘상 열려있는 문입니다. 어쨌든 두 문을 더 지나서 집에 도달하면 사실 아까만치 쾌쾌하지 않습니다. 쾌적해진달까?
오늘은 얻어마신 맥주가 꽉 차 집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향합니다. 화장실로 가기 위해 사각형의 다른 쪽 문을 열고, 슬리퍼를 발끝에 걸고 부랴부랴 뛰었죠.
사실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저는 쾌쾌한 냄새를 맡음과 동시에 이 글을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이런 상황을 적을 자격이 내게 있는양 생각했습니다.
어떤 상황을 맞이했을때 내게 거기에 대한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서 말을 하고 있다면 나는 이미 하나의 기단 위에 서있습니다. 남들은 기단 아래의 평소에 서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곳은 보다 양지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제가 서있는 저의 기단, 그것은 적당한 궁상으로 정말의 궁상은 정말로 고난인데, 제게 있는 적당한 궁상은 그것으로 시비를 가리거나, 푸념거리거나. 여유시간을 소일할 건덕지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진정으로 극복할 실제의 무엇을 가지려하지 않고, 계속해서 주억거리며 퉁기고. 퉁긴것에 자빠지고, 자빠진 것을 끌어안고 왜인지 글썽글썽 울기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적당한 궁상의 끝에 그림을 그린 뒤에, 모든 것이 그림을 그리는 동력이 되어주었다 하면. 와, 진정성이 획득되고 있습니까?

언제까지 어린 심성이 솔직함을 무기로 든 채 자기의 삶에 삐져있을까요.



다른 것을 기대하고 방문하신 분들께 이것마저 봐달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반응이 무엇이든 제게 그 이후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엷은 반측면2 _보드지에 먹, 연필, 목탄 가루_지금 33cm_2013

월간이리 9월호는 테오 얀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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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관과 셀로판 테입, 밧줄, 패트병등의 재료를 이용해 해변가를 거니는 기묘한 물체일군을 만드는 작가 테오 얀센입니다.

이번 글에선 작가의 작업 중심으로 성실하게 작성하였습니다. 사실 이 작가의 작업을 통해 좀더 다른 측면에서 글을 쓰고 싶었는데 달리 풀리질 않아 정보가 위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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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 얀센 (Theo Jansen)

나름 연재라고 하는데 예술가 12명 꼽기가 쉽지 않아서 쩔쩔매는 채로 9월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가 분은 처음부터 꼭 하고자 꼽아두었던 작가로 깜빡 잊고 있다가 떠올라서 몹시 다행합니다.
처음 테오 얀센의 작품을 접한 건 관심작가 발표가 있던 대학교 수업에서로 아마 2008년도, 그러니까 이 작가, 테오 얀센의 전시가 한국에서 있기 전이었습니다. 전시는 2010년도에 있었거든요. 2008년 당시 발표자는 해변에서 뭔가 기이한 조형물이 움직이는 영상을 보여주었는데, 화질이 너무 나빴고, 발표자도 가진 정보가 많지 않았습니다. 페트병을 재활용한 친환경적인 작업물인데, 얘네가 막 해변가를 혼자서 움직여요-라고 했죠. 그런데도 강력하게 기억에 남은 것은 ‘페트병’, ‘얘네가 혼자서 움직여요’ 이 두 포인트 때문이었어요.

‘페트병’
테오 얀센은 물리학을 전공하고 예술가로 전향한 작가입니다. 그의 작업은 키네틱 아트로 분류되는데, 움직이는 조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광기라든가 예민함을 전한다기보다 장인의 뛰어난 기술 부분으로 깊이 닿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뭔가를 만들고자하는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에 맞는 도구를 고안할 수 있는 사람. 자신에게 적합한 재료를 발견하고 그것을 심화시킬 수 있는 사람에겐 그 고안해내는 능력의 뛰어남과 함께 그가 고안한 도구에서도 미의식이 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선택한 재료도 그 목적에 훌륭하게 부합하는 것으로 동시에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죠.
제가 페트병에서 포인트가 잡혔던 것은 플라스틱 관이 중심적으로 사용되는지는 몰랐던 상태였기에 그런 것입니다. 분명하게 짚고 가자면 작가가 작품을 만들때 주로 쓰인 재료는 플라스틱 관입니다. 훌라후프와 비슷한 재질의 요.
작가는 바닐라색 플라스틱 관과 페트병 등을 이용하여 해변가에서 바람을 맞으면 움직여 다니는 뭔가를 만듭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해변동물이죠. Strandbeast 또는 아니마리스.
해변동물은 무척 섬세하게 움직입니다. 그것은 전기나 석유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해변가의 바람을 먹고, 모터와 바퀴가 아닌 다리와 날개를 가지고 걸어 다닙니다. 사용된 재료 중 하나인 페트병은 플라스틱 공업물로 그 형태도 단순하고 우리의 주변에 널려있잖아요?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페트병은 플라스틱 주형 기술이 이룬 고도의 산물입니다. 그것은 뭔가를 담고 밀폐할 수 있으며 여간해선 깨지거나 터지지 않고, 게다가 가벼운데 심지어 투명하죠. 잠재력 높은 저력 있는 재료인 페트병이 선택되어 대표적인 용도는 해변에서 부는 바람을 모아 압축 보관하는 것입니다. 늘상 있어서 쉽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귀한 것이 귀한 곳에 쓰였다 뭐 이런 류의 기쁨을 느꼈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재료에 대해 좀 더 얘기를 해볼게요. 테오 얀센은 일종의 규칙을 두고 자신의 해변생물을 만드는데, 플라스틱 관만을 이용한다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생물체가 단백질로 이루어져있듯이 자신의 작품을 한 가지 재료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에서라고 합니다. 단백질은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고 여러 목적을 담당할 수 있는데 플라스틱 관도 그렇다는 것이죠. 그가 선택한 바닐라색 플라스틱 관은 이미 있는 도구와 그가 고안한 도구를 통해 다양한 변형이 가능해지고 그래서 머리가 되고 척추가 되고 촉수가 되고 발굽이 되어 전신을 이룹니다. 작가는 자신이 해변동물에게 구현시키고 싶은 동작에 한계를 맞자 다른 여러 재료도 포함되었으나 일련의 미감은 유지하는 채로 발전합니다. 셀로판테이프, 케이블 타이, 페트병, 고무링, 밧줄 등은 그 형태를 보는 것으로 목적을 파악할 수 있는 직관적인 재료들이죠. 후기에 나무로 만들어진 파레트를 사용하는데 그 해변동물은 마치 코뿔소같습니다.

‘얘네가 혼자서 움직여요’
작가가 만든 무언가가 손을 떠나 스스로의 생존방식을 유지·발전시키며 파괴되기 전까지 충분히 오랫동안 동작한다면 그 장치를 생명체 내지는 생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겠죠. 단지 생물 같은 장치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충분히 뭔가를 부여할 여지가 있는데요. 해변이라는 바람이나 바닷물, 단단하지 못한 지반의 변수 많은 공간에서 계속해서 동작하기 위해선 군더더기 없는 형상과 원리를 구현해야 하고, 그것에 성공하면 비록 외관은 플라스틱 관의 다발이라도, 그것이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큰 미적인 쾌감을 주는지 그래서 기쁜 맘에 그 것에 생명을 부여해버릴지도 모르는 것이죠. 그렇게 테오 얀센은 자신의 작품의 꼭대기부터 기름을 붓고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생명을 부여했습니다.

“해변동물은 왜 움직여야할까? 움직임은 동물의 성질이다. 예를 들어 양에게 다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리가 없다면 양은 들판에 누워 뒹구는 양털 공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머지않아 양 주변의 풀은 뿌리째 다 먹히고 말 것이다. (중략)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걷기가 생명체의 특성이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점이다.”
테오 얀센_위대한 공상가 63p

그래서 해변동물은 열심히 걸어다닙니다. 해변에서 바람을 맞으면 앞으로 가거나 뒤로 가고, 물에 닿으면 뒷걸음질치고, 폭풍우가 치면 자신의 몸을 해변에 고정하고, 바람이 없으면 몸에 저장해둔 공기를 이용해서 다시 움직이고, 때로는 모래를 몸에 발라 위장을 하는 그런 활동을 하면서요.
해변동물은 사용되는 재료나 메커니즘의 변화에 따라 연대기가 달라집니다. 그 명명도 무척 재밌는데 단적인 예로 칼리둠 시기와 테피데임 시기가 나눠진 이유는 플라스틱 관을 구부리는데 사용한 열기구의 온도에 따른 것으로, 칼리둠 시기는 열기구를 고온에 맞춘 채로 관을 구부렸다면 테피데임 시기에는 저온에 두고 구부린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온도를 바꾼 이유는 고온에서 구부린 다리의 관절이 금세 상해버려서 저온이 적당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고요.
테오 얀센은 1990년 자신의 해변동물을 만들기 시작한 일을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해변동물이 자신으로 하여금 만들기를 종용했다고요. 테오 얀센을 통해 해변동물은 세상에 등장하여 성공적으로 발전하고 다양해지고 순회 전시도 다니고, 그리고 BMW의 이미지 광고에 등장하여 수백만의 사람들의 정신에 남았다고요. http://youtu.be/M5GgZ-RfpD8 본 링크를 통해 광고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위대한 몽상가’라는 제목으로 그의 작업과 관련한 잡기에 대해 직접 쓴 책을 추천합니다. 저는 그의 해변동물에 사용된 도구-예를 들면 관 절단 장치와 같은 것들 직접 만든, 나 해변동물의 관절, 발, 등의 신체 부위의 기록사진을 보면 두근두근한 기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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엷은 반측면_연필, 목탄가루, 먹_지름33cm_2013

찾은 얼굴_종이에 연필, 목탄가루_29.7*42cm_2013

찾은 얼굴_종이에 연필, 목탄가루_29.7*42cm_2013

찾은 얼굴


wanted로 찾은 얼굴_종이에 연필,목탄가루_29.7*42cm_2013





오랜만의 찾은 얼굴입니다. 검색어는 wanted 입니다. wanted people/person/ /woman/man/... 등을 덧붙여서 추린 겁니다.

이번엔 0.5짜리 샤프심을 썻기때문에 획에 강약을 줘가며 획획내지른 느낌보다는 비교적 일정한 두께의 선으로. 그러니까 ㅅㅓ-언선한 느낌으로 그려졌습니다.



월간이리 8월호 가브리엘 뱅상입니다.


8월호가 좀 일찍 나왔죠. 뱅상은 몹시 고운 분인데 그래서 곱게 그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는데 이것도 좋죠. 참 다행입니다. 닮게 그리지 않는다고 이분들중 아무도 제게 클레임을 걸지 않죠.
만사에 체념이 넘실대는 7월이었습니다.
그래도 방정리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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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뱅상 (Gabrielle Vincent)

피카소의 일화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제 부족한 글의 도입으로 삼겠습니다.

한 부인이 카페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피카소를 보고 자신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피카소는 몇 분간 여인의 모습을 그려서는 그림값을 묻는 부인에게 5000프랑을 요구했다. 부인은 놀라 항의했다.
"아니, 그림을 그리는데 몇 분 걸리지도 않았잖아요?"
그러자 피카소가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40년이 걸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각기 다른 매체에서 한 너 댓 번 접했더랬는데 몇 번인가는 화가가 달랐고. 또는 그림의 대상이 달랐고, 카페가 아닌 미용실이 되기도 하고 뭐 그림의 액수가 바뀌기도 하고 했기 때문에 파블로 피카소 내지 실존 화가의 이야기라고 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이야기의 성분이 바뀌어도 전달하고자 하는 맥락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무리가 없겠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 한 친구가 제 그림에 대해 평하며 했던 말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당시 저는 솟은 파도와 타일이 깔린 바닥을 그렸었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차치하고, 그 바닥타일 한 장이 그림상에서 대략 5mm정도의 크기였죠. 타일이 쫙 깔린 풍경이라고 고지식하게 타일을 한 장씩 그렸더랬죠...^^.
그 친구는 제가 타일을 일일이 그린 것과 같은 노동집약적인 면을 그림에서 보여줘야 사람들이 그림을 쉽게 받아들인다고 했어요. 그렇다고 동의했었죠. 일학년 때엔 과제로 레이스천이 깔린 정물화 그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 레이스를 또 일일이 그리고 앉았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 세밀한 부분을 하나하나 그리고 있노라면 내가 레이스를 그리는 이 노력이면 레이스를 하나 뜨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또 한번은 어시스던트 일을 할 때인데, 지붕이 많이 보이는 위치의 기와집을 그릴 일이 있었어요. 그 지붕의 기왓장을 하나하나 그리고 있는 제게 작가님은 회화적이지 못하니 다른 표현법을 써보라고 권유하셨었는데 제가 그런 식으로 좀 단순한 면이 있네요.
여하튼 그런 때에는 그림 속 타일을 팠다-레이스를 팠다-기와를 팠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죠. 팠다는 말은 곡괭이를 들어 땅을 팠다-우물을 팠다-수로를 팠다하는 것처럼 결실을 위해 노동이 필요함을 분명하게 의미하는데 그림을 그림에도 이 표현을 붙임이 자연스러운 겁니다. 노동이란 무엇입니까. 땀 흘려 수고하여 땅의 소출을 받는 것으로 태초에 받은 형벌이자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의 의무죠. 그래서 사람들은 으레 농부는 땅을 파길 바라고 학생은 공부를 파길 바라고 화가는 그림을 파길 바라죠. 따라서 앞서 말한 일화에서 부인이 그림 그리는데 몇 분 안 걸렸는데, 그렇게 큰 돈을 요구하냐고 물은 것은 부인의 입장에서 합당한 이의제기입니다. 화가는 거기에 대해서 40년이 그렸다고 응수함으로써 자신이 그은 그 획 획들은 자신의 평생을 쌓아서 이룬 경지이므로 노동량과 투입시간을 따지자면 보이지 않는 시간과 보이지 않는 노동이 담겨있음을 알려준 것이죠.
가브리엘 뱅상은 벨기에 브뤼셀 태생의 동화작가로 저는 ‘그 어느날 한 마리 개는’(또는 ‘어느 개 이야기’)이라는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스마트 폰을 들어 검색해보시면 그녀의 뛰어난 드로잉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동화책하면 떠오르는 다채로운 색이나 과장된 그림체, 혹은 의인화된 동물들은 없고 대신 부드러운 검정 목탄으로 때로는 휘갈기고 때로는 가만히 그려낸 형태들이 있습니다. 그 단순함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작가의 역량 때문입니다. 얇아지고 굵어지는 선의 쓰임이 그리고자하는 바에 정확히 닿아있죠. 그래서 제가 앞에서 말한 보이지 않는, 축적된 노동량 운운한 것은 그녀의 그림에서 그러한 기운생동을 느껴달라는 말씀으로 덧붙인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피인 그림은 뛰어나다치고 내용은 어떤가. 저는 그녀의 다른 작품 ‘거대한 알’에 대해서 조금 알쏭달쏭한 느낌을 갖습니다. 일단은 동화책의 형식을 빌어 나왔으나 그것은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내용이라기엔 비유하는 바가 큽니다.
내용을 잠깐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거대한 알’은 어느 날 거대한 새가 거대한 알을 낳고 떠나면서 시작되는데, 그 거대한 알을 발견한 사람들은 알 주변에 모여들어 살기 시작해서 어느새 도시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알을 중심으로 유원지를 짓기도 하고 신이 나있죠. 그런데 그 알에 금이 가며 새끼 새가 태어나게 되고...
나머지는 책을 통해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
사실 제가 동화책에 대해 갖는 의문은 어른이 제시하는 아이들을 위한 무언가가 과연 얼마만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혹은 어른인 작가가 자신의 수준을 얼마만큼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낮추어 제시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새삼 깨달은 것은 누구를 대상으로 삼았건 딱 그 대상의 시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를 담을 것은 아니라는 것. ‘거대한 알’은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보다 더 큰 것을 담고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작가가 의인화시킨 동물들을 내세워 이야기를 한 동화집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드리는 ‘거대한 알’은 어린아이의 순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 접하여 평생 이따금 떠올리며 새로운 감상과 함께 자라날 각자의 이야기를 심어주는 것으로 그래서 작가의 모순을 깨닫기도 하고, 어릴 적과 다른 결론을 내기도 하며 함께 성장할 만한 이야기인 거죠. 그렇게 주인공들은 행복하게 살게 되었답니다-내지 그래서 주인공은 나쁜 버릇을 고쳤답니다-의 개과천선이나 권선징악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접한 뒤에 이따금 떠올릴때마다 새로이 질문을 던져줄만한 풍부함을 품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것은 이 작가가 하나의 경지를 이룬 것을 말하겠죠.


글·그림 지인 freshdrawing.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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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


발 아님

곡해와 신파

나는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 중에서도 만화책을 최고로 즐겨서 어릴 적엔 만화책이라면 일단 집어 들고 내용이 재미없어도 재밌게 읽었다. 그러니 만화책을 통해 배운 단어들도 참 많을 테다. 물론 요새도 만화책을 좋아하지만 학생 때만큼 읽지는 못하는데 특히 중, 고등학교 다닐 적엔 참새 방앗간 격으로 학교 끝나면 만화대여점을 들렸었다. 사실 그 나이 때라면 가지고 있는 경험과 함께 국어사전 또한 빼곡하다고 스스로 자신할 테고, 어디서든 낯선 단어를 접하면 이 단어가 잘못 사용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 오타인지. 내가 모르는 단어인지 파악할 수 있다. 몰랐던 단어라면 문맥상 어떤 뜻인지 가늠하고 금방 다시 적용할 수도 있다. 그 활동은 매우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일상에서 배운 단어들 대부분을 언제 익혔는지 기억하지 않는다. 내가 만화를 통해 많은 단어를 배웠을 것이지만 대부분 생각나지 않는 것이 그 자연스러움 때문이고 기억하는 두 개는 머릿속에 남는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지 않게 기억에 남은 두 단어는 곡해신파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이렇다. 곡해는 일단 오해의 잘못된 표기라고 생각하며 시작되는데, 그리 비슷하지도 않은데 왜 오타라고 생각했냐하면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언어 성적도 좋았던 터라 만화책에서 내가 모르는 단어를 접하리라고 생각지 못했기 때문. 앞뒤 문맥을 보면 오해라는 뜻 같은데, 곡해라고 적다니 오타다! 하면서 의도적으로 무시했던 것이다. 무시는 마음속에 뭔가 찝찝하니 잘못된 판단으로 계속 남아 있다가 친구와의 대화 중에 만화책에는 오타가 너무 많다는 이야기로 튀어나왔는데, 그때 그 친구가 곡해라는 단어는 있는 단어라고 말했고 나는 그제야 사전을 찾아 곡해를 발견했다. 나는 내가 모르는 단어가 만화에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곡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곡해했던 것이다. ^^;; 그 만화는 야자와 아이 작가의 나나’. 어쩌면 곡해하지 마.” 라고 말한 작중인물이 변호사 출신이라는 설정이었기에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일본에선 곡해를 자주 쓸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곡해를 늦게 접한 것이 맞겠지만 그런 식으로 언어 자신감에 찼던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이제 언어 자신감은 우물 개구리로 사라졌으니 곡해는 이제 그만하곡:> 신파를 얘기해보겠다.
나는 최경아 작가의 순정 만화 스노우드롭1권에서 신파라는 단어를 접했다. 작중 상황은 이랬다. 남자주인공은 고등학생으로,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아버지와 형은 죽었고, 막내 동생은 사고만 치고 돌아다닌다. 남자주인공은 어머니의 병원비를 벌기위해 학교를 자퇴하기로 한다. 남자주인공과 친한 여자아이 하나가 남자주인공이 자퇴한다는 것을 듣고 그런 남주의 배경 상황을 읊으며 왜 오빠만 희생해야하냐고 엉엉 우는 장면을 여자주인공이 자신의 보디가드와 함께 목격한다. 그때 보디가드는 남자주인공이 기구하다며 손수건을 물고 우는데, 여자주인공이 되레 정색을 하면서 말한다. ‘누구야, 저 신파는!’ 이라고.
신파, 신파라. 몹시 어렴풋했다. 신파적이다라는 용례를 떠올렸으나 신파적 또한 이해 못했긴 매한가지. 머릿속 사전의 다른 단어 중 하나로 파로 끝나는 노파가 있었고 당시엔 노파심도 흐릿하였던 초등학생 시절, 일단 노파와는 거리가 먼 것 같고 나는 신파=new() 새로운 등장인물, 그래서 누구야 저 새로운 캐릭터는? 정도로 곡해한 채 넘어갔다. 문제는 내가 이 만화책을 구입해서 보았다는 것으로, 만화를 다시 읽을 때마다 이 ‘New에서 뺑뺑 돌며 신파라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결론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거진 십년이 더 지난 지금 내게 신파란 비극에 취한정도의 의미로 새겨져있고 그래서 작중인물이 말한 신파는 스스로의 또는 주변인물의 비극에 취한 인물로 신파적인 인물은 기승전결의 승에 해당하는 강한 비극을 자신, 혹은 타인의 삶에 부여하는 그런 인물이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말한 신파란 비극양산자로써 비아냥의 대상이었던 것. 나중에 그 여주인공은 남주인공 못지않게 신파의 지위에 오르지만.
여하튼 내가 신파를 제대로 깨닫기까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다만, 과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과함이 비웃음꺼리로 칭해지는 것은 절제가 미덕일 때 가능한 것이며 신파란 본래 연극에서 출발한 것임을 보면 연극 요소로써의 신파의 과함을 비웃는 것이 과연 쿨한 행동이라 할 수 있을까? 연극에서의 큰 동작과 과장된 어조는 물리적 거리를 극복해야하는 것으로 그만의 매력이 있으며 그 맥락으로 신파도 이해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촬영기술로 거리를 극복하는 드라마의, 영화의 연기를 보는 것을 통해, 큰 착각에 빠져있다. 아무도 드라마처럼 살지 않는다. 누구도. 나를 관람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한 아무도 드라마로 살지 못한다.
왜 비극에 취한 인물을 위로하지 못하고 비아냥하는가. 자기의 슬픔이나 징징대고 싶은 부분을 맘껏 풀어버리지 못한 채 애매한 어른의 태도를 흉내내며 자란 탓은 아닌가. 신파라는 비아냥을 피하기 위해 쿨함을 가장하게 되고 그렇게 자기가 맘껏 울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울 때 어린애취급을 하는 동시에 다시 한번 자기의 어린아이부분을 묵살하는 것이 아닌지. 남의 신파를 받아줄 만큼의 여유가 성장하는 모두에게 있길 바란다. 그리고 모두 건강하게 성장합시다.
 
. 그러고 보니 만화 상에서 주인공의 상황에 대해 열을 올리는 것에 신파적이라는 대사를 했다는 것은 작가 자신이 자신의 설정이 신파적임을 자조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
 

월간이리 7월호 김범작가입니다.



이번호는 김범작가입니다.

http://postyri.blogspot.kr/2013/07/2013-6.html
월간이리 링크입니다.

http://issuu.com/postyri/docs/postyri1307web/41?e=5641367/3844431
이 링크를 통해 7월호를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웹상에서 보시는 페이지의 하이퍼링크가 살려져있습니다. 따라서 클릭하시면 해당 작가의 블로그나 트위터 등으로 연결이 된다고 합니다.
편집장님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6월에 한발짝도 못 움직였고 그에 덩달아 형편없는 기분입니다.
기분만 그렇고 형편없이 살진 않았지만 어쨌든 매한가집니다.
기운 빠지는 근황을 전하게 되어 면구스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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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 (Kim Beom)

‘왜 좋아?’ ‘그냥’
‘왜 좋아?’ ‘잘해서’
의 차이는 뭘까요?
‘좋다’와 ‘잘한다’는 틀립니다. 라는 말은 틀린 말이죠. 아시다시피 ‘좋다’와 ‘잘한다’는 다릅니다가 맞습니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분명히 다른 말이지만 혼용됩니다. 그리고 그 다르다-틀리다의 혼용이 문제되는 것은 저변에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는 차별정신이 깔려있기에 그렇고요. 좋다-잘한다도 마찬가지로 혼용되는 말사이인데, 이 경운 ‘좋다’의 의미가 워낙 넓게 쓰여 ‘잘한다’를 부분 포함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잘한 것이 좋다’라는 표현은 ‘좋은 것이 좋다’는 표현이상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의미의 겹침은 다르다-틀리다와의 관계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분명히 해야 할 것임엔 마찬가지인데요.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리기 쉽기 때문이에요. 뭔 소리냐면 잘한다-좋다-착하다/옳다로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게 좋은 것이 옳다로 스물스물 넘어가는 정신작용을 경계해야하는 거죠. 취미활동을 건강하게 발전시켜나가는 데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잘한다-좋다가 동어반복이 되는 중복 부분을 빼고 ‘잘한 것이 좋다’ 했을 때 잘한다-좋다는 좋다-잘하니까라는 판단과 근거의 관계인거죠.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 일컬어 ‘절대미’에 더 가까운 것은 내 기준에서 볼 때 잘한 것이고 그렇기에 좋은 것이지만, 좋다에 옳고 그름을 포함해버리는 실수를 한다면 그것이 사회의 도덕기준이나 가치평가의 영역으로 비어지는 거죠. 나에게는 좋은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옳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을 일단 못 박아야 해요. 이것이 당연한 것인데 때때로 의식하지 않으면 의식 사이에 교묘하게 감춰진 채 나도 모르게 작동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잘한 것이고 옳은 것이야. 너가 나와 다른 것을 좋아한다면 네 취향은 틀린 것이야.- 이렇게 자연스럽게요. 취미활동은 이런 태도를 경계하는 고도의 판단을 겸해야 하며 결국 취미활동으로 정신은 더 자랄 수 있게 됩니다.
잠시. 개인의 취향을 절대미로 말해서 싫으실지 모르겠는데요. 집단의식이 공유하는 미가 어떻든 제겐 절대라는 개념은 절대적으로 개개인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대를 추구하는 개인들끼리는 절대를 추구한다는 것만 공유될 뿐, 그 ‘절대’는 같지 않은 것이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절때리세요. 제 생각엔 절대가 절대인 것은 절대라는 개념 하에서만 절대인 것이고 개개인에게 절대는 다르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고, 내게 좋은 것이 옳은 것은 아닌 하에서 그리고 우리서로는 진짜 많은 부분이 같은데 개성인 부분만 다른 하에서만큼 ^^ 우리의 절대는 다릅니다-라는 것.
김범 작가의 작업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게시판의 포스터. 아마 2010년 아트선재에서의 개인전 알림 포스터였던 것 같습니다. 치타가 영양을 쫓는 영상을 영양이 치타를 쫓는 것으로 보이게끔 편집한 비디오 작업의 캡처가 그 포스터에 있었고요. 작품 제목 및 연도는 [볼거리(spectacle) 2010]입니다. 와, 좋다. 라고 생각했죠. 사실은 사진 작업인 줄 알았다가 후에야 비디오인 것을 알았지만.
이 경우에 ‘잘해서 좋다’를 적용하려면 무엇을 잘했다고 해야 할까요. 일단 예술작품이니까 미적인 의미에서 접근해야할까요? 아니면 비디오 작업이니 기술인 영상편집을? 이런 경우엔 발상을?
이렇게 그냥 좋다에서 멈추지 않고 왜 좋은가를 찾는 일. 즉각적으로 느낀 ‘좋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을 하도록 만드는 작품은 성공한 것일 겁니다. 어떤 것이든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은 결국 내가 본 작업을 마지막 도미노로 삼아 넘어진 도미노의 과정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도착한 첫 번째 도미노에는 어떤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세계관이 되었든 미적 기준이 되었든 간에요. 그 것은 절대미와 닮아있고, 내지는 닿아있고요. 사람들은 절대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작업이 되었든 삶의 다른 것에 있든 본인의 여정이나 결과물이 절대를 암시하거나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접했을 때 때로 그냥 좋다는 말로 두루뭉술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말로 표현이 안 되거나 말로 표현을 할 필요가 없거나인데 가끔은 말로 표현할 테면 말로 하지 뭣 하러 작업을 하나 싶기도 하니까. 좋아서 좋음을 내세우죠. 저는 김범 작가의 작업의 방향이 가르키는 절대에 공감을 하며 그것들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것은 즉 그냥 좋습니다. 그리고 그냥 좋기에 왜 좋은 가를 찾도록 시작하게 하는 것이고요. 그러니 ‘잘해서 좋다’보다 때로 ‘그냥 좋아’가 더 가능성을 품은 말일 겁니다.


글·그림 지인 freshdrawing.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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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이리 6월호 장 뒤뷔페 입니다


이번호 드로잉은 특히 맘에 듭니다. 음.. 네, 그렇습니다.
http://postyri.blogspot.kr/2013/06/2013-6.html
월간이리 블로그 링크입니다.

http://issuu.com/postyri/docs/postyri1306web/1?e=5641367/2856679
이 링크를 통해 월간이리 6월호를 보실 수 있습니다.

요근래 드로잉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딱히 업로드할 만한 그림이 없었기도 했고. 쳐지네요.
올해도 벌써 여름이라 자칫하면 말라죽은듯 보내게 될테니 고삐를 잡아야죠.
모두 필요한 의식주가 풍요로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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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뒤뷔페 (Jean Dubuffet)
‘나는 무엇을 잘 못해.’
이 말을 하긴 쉽습니다.
‘나는 무엇을 잘 해.’
이게 어렵죠. 왜 어려울까요?
겸손이 미덕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가장 크게는 잘한다고 자평할 ‘자격’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객관적으로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분야, 예를 들어 달리기 같은 경우, 국민 대다수가 자신의 100m내지 50m달리기 기록을 알기에 평균내기도 쉽죠. 프로선수와 비교하면 잘하지 못하지만 대중과 비교하면 잘하는 것일 때 편하게 ‘나 잘해’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수치화가 가능하지 않은 것 중, 감상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무언가를 감상하고 잘한다, 나쁘다 얘기할 수 있으려면 우선 그 무언가를 많이 접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접해도 영 감이 안 오는 분야가 있지만 접하다보면 적어도 취향은 생기니까요. 그런 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의 구분을 하는 것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접해가며 취향을 넓히거나 깊이 파고드는 것을 취미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 취미 하나는 피아노를 치는 것입니다. 잘 치냐고 물어보시면 멜로디를 왼손 코드에 맞춰 연주할 정도이지만, 꽤 좋아합니다. 집에 피아노가 있기도 하고요. 만약 집에 피아노가 없다면 저는 피아노를 치는 생활을 할 수 없겠죠. 우리 집에선 오로지 저만이 피아노를 칩니다. 다행히 소음문제로 이웃에게 헤를 끼친 적은 없었으나 각자 방에 있는 가족에게 폐가 되지 않는가하고 신경이 쓰이곤 해요. 그래서 가끔 엄마에게 여쭤봅니다. 너무 시끄럽지 않느냐고요. 그러면 엄마는 ‘엄마는 음악은 잘 모르지만 딸내미가 피아노 앞에 앉으면 좋아.’ 라고 말하십니다. 네, 저 사랑 많이 받고 자랍니...가 아니라, 그러니까 엄마의 말씀에는 ‘엄마는 좋긴 한데 음악을 잘 모르는 내가 좋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하는 태도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겁니다.
잘 모른다는 것은 많이 접하지 않았다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나 피아노를 치고 도서관에서 책빌리는 것처럼 흔히 연주할 공간이 있다면 아마 다른 생활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면 하는 것이다가 자연스러워지는 것을요.
무언가를 좋아한다-싫어한다 구분하고 좋은 것을 취하며 탐구하는 것은 개인 취향을 공고하게 하거나 혹은 다른 차원으로 높여줍니다. 그것은 삶의 질을 높이는 활동인 것이며, 건전한 취미생활 환경이 조성되어있는 것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크게는 사회의 문화융성과 함께 가는 말로 아마추어 감상자가 늘어나는 것은 잠재적으로 아마추어 생산자도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생산, 감상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거죠. 결국 풍부한 아마추어 대중은 그 문화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것. 따라서 무언가에 대한 이론을 깊이 알 때만이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풍토는 사회적 결핍을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에 대한 결핍이냐. 예술이 소수의 엘리트화 된 것에 비해 중간층이 즐길만한 여유와 환경이 없다는 것의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예술향유가 생활이 아니라 교양인 삶을 산다는 거죠. 이론은 잘 몰라도 좋다, 싫다를 말하는 것에 스스럼없는 층이 넓다면, 그것의 저변이 넓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그 무언가를 접하고 누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기 때문에요. 따라서 예술작품이 좋다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면, 그 판단의 수준을 차치하고 대중도 예술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인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흔히 듣게 되는 말이 ‘내가 잘 몰라서...’이고요. 그리하여 무엇이 왜 좋은가를 말할 때 엘리트의 말에 기대게 되는 것이죠. 예술에 잣대를 댈 수 없겠으나, 그 잣대가 있다면 엘리트가 알리라는 겁니다.
하지만 장 뒤뷔페는 콧방귀를 뀌죠.

뒤뷔페는 ‘예술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만든 작품’을 연구하면서 전통적이고 진부한 창작의 원칙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이러한 ‘전통적’ 예술이야말로 문화적 예술보다 선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순한 만남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후 그의 창작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진정한 발견이었다. 뒤뷔페는 ‘예술은 한 사람(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며, 타자로부터의 어떤 가르침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장 뒤뷔페 [우를루프 정원]도록의 서문 18p

잣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장 뒤뷔페를 이번호 예술가로 꼽은 것은 순전히 그의 사상 때문이에요. 그는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대중을 따돌린 채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는 엘리트 문화를 비판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림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해내는 그림, 정신병원에 갇혀있거나 그림을 업으로 삼지 않은 이들의 그림을 수집하고 컬렉션 시켰습니다. 그렇게 그가 주창한 아웃사이더 아트를 살펴보면 대중보다는 미술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광인의 광기에 의한 예술을 선호하는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를 넘사벽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돼서 부분적으로만 동의하지만요. 예술에서 순수함과 광기를 드러내는 것. 정신을 번뜩 뜨이도록 낯설게 만드는 힘. 새삼 번뜩 뜨인 정신이 새로운 것들을 깨닫는 것, 잊었던 것들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니까요.
우선은 단순 유희로써 좋다-싫다를 밝혀보는 것이 분명히 도움될 겁니다.

‘예술은 놀이, 즉 정신의 놀이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주된 놀이인 것이다. 여기 순간적으로 헝겊뭉치를 쳐다보는 아이가 있다. 어떤 생각이 아이의 머릿속을 스친다. 아이에게 헝겊뭉치는 이제 인디언이다. 그리고 진짜 인디언들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헝겊인형을 두려워하기로 결심한다. 실제로 아이는 헝겊인형이 무섭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가 이것이 단순한 헝겊뭉치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어차피 애초에 인형을 인디언이라고 결정하는 것 자체가 다분히 장난끼의 발동이다. 아이는 헝겊인형을 인디언이라고 믿기로 결심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믿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아이는 바로 이런 식으로 정신이 작동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매혹시키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정신적 과정의 실험과 검증이다. 아이는 마치 아기가 작은 발을 움직이면서 노는 것처럼 이렇게 자신의 정신을 움직이면서 논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같은 도록 233p

글·그림 지인 freshdrawing.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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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음이 너무 가난합니다.
당신이 저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주저치말고 다가와주세요.

의지와 의사와 뭐 먹을까.


여럿이 밥 때를 맞이하면 서로 너 뭐 먹고 싶어, 너 어디가고 싶어? 하고 물으며 또, 서로 글쎄 딱히...하고 어물거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두고 사람이 우유부단하다 뭐 분명하게 바라는 바가 없냐고 한다면 정확한 지적이 아닌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고파서 먹고자하는 욕구가 무얼 먹을지까지 분명하게 향할 리가 없잖아? 게다가 타인이 뭘 먹고싶어할지의 의사를 배려한다면서 흐무흐무하는 사람들은 우유부단하다고만 할 순 없지 않나. 선택을 별로 안 해보기도 했고.

무리에서 메뉴를 주로 정하는 사람의 몇가지 사고방식이 있다. 항상 욕구가 분명한 의사형태를 띄는 경우, 모두가 맛있게 먹어야한다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 메뉴가 반드시 맛있으리란 확신이 있는 경우. 고르라 해도 고르지 않을 것이기에 하나를 정하는게 낫다는 경우 등등. 그런 분들에 붙여 잠시 말하건데, 이 글은 다수가 원하는 무언가를 고르자며 흐리멍텅하게 되기 쉬운 사람인 나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쓰였다.

사실 어디가서 무얼 먹고자 할 때 타인이 먹고싶은 것을 묻는 일은 '없는 것을 찾는 일'일 공산이 크다. 위에 적었다시피 항상 '먹고자하는 의지'가 '무얼먹을지의 의사'로 연결되진 않으며 무리속에서 사람은 '내 의지는 다수가 좋아하는 것을 먹는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기에 그렇다. '다수가 좋아하는 것을 먹자'고 대다수가 말하고 있는 무리속에서 그들은 당췌 원하는게 없음인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그들은 뭘 먹게 될까?
의지와 의사를 동시에 가진 이가 원하는 냉면을 먹게 된다.
본인의 의사가 분명해 의지로 이루는 경우. 냉면먹자! 외친뒤 몇가지 행동을 보일 수 있는데,
'오늘은 더우니까', '면이 땡기니까', '새로 생긴 냉면집이 있던데'의 이유를 붙이는 경우.
'냉면이 싫으면 너희가 먹고싶은 걸 말해'하며 대안을 요구하는 경우.
'배고프다, 빨리 가자'하며 욕구를 우선하거나 하는 식.
이제 딱히 냉면이 당기는 경우는 아니더라도 쫓아가게 되기 때문에 냉면식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냉면을 다수의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합리화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예를 들어 '그래, 오늘같이 더운 날은 냉면이지,' '속이 타는게 시원한 국물이 먹고 싶었어,' '밥보단 면이 낫지'. '새로 생겼다니 가볼까?' 등등이다. 이런 합리화를 거쳐 냉면은 공고한 다수의 의사가 된다. 게중 몇몇이 속쓰려서 냉면은 싫은데라고 속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그거 아는가? 선택지가 다양한 평등사회만이 고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회사 밀집지역이나 대학교 앞 번화가같이 사방에 음식점이 있는 공간에서, 우두머리가 메뉴를 정하지 않는 상황에 있다면 말이다.

현재 다수가 원하는 공통의 무언가는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무언가를 콕찝어 호불호를 나누는 식으로 의사를 깨우는 편이 낫다. 사람이 다수일때는 자기 뇌를 잠시 잠재우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 개개인의 뇌를 깨우는 질문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냉면먹자의 사람과 약간 다른 분위기로 무리를 이끌게된다. 합의점을 내는 사람인 것. 합의점이 나지 않은 상태로 메뉴를 정하면 구성원들은 냉면을 먹는 것이 이래이래서 좋다고 합리화하는 의식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합리화에 익숙져서 뭐 먹을까?, 뭐 먹고 싶어라는 질문에는 들어도 들어도 뇌가 활성화되지 않는 것이다.
비단 뭘 먹을지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러하니 사는데는 어떻겠나.

정리하자면 이렇다. 보통 의사는 혼자서 하는 일에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지만 이게 나 혼자 있지 않게되면 쉽게 무언가를 원함을 드러내지도 그런 맘이 생기지도 않지 않나? 누군가의 강한 의지로 끌려가는 것이 더 낫겠다 싶게 되는데, 여럿 있을때도 자기의지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사람 즉, 목적한 바로 남을 끌어들이는 것에 스스럼 없는 이가 주동하지 않는다면 다들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의지에 비해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의사가 없으므로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다는 상태에서 머릿속에 공란이 생기게 된다.
그런 경우에, 모두의 의지를 종합해서 합의된 메뉴를 정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본인의 분명한 의사와 강한 의지로 메뉴를 통일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무리는 메뉴에 대한 합리화를 자동적으로 수행한다. 선택이 다양한 사회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바에 대한 생각이 없다면 결국 그 다양한 선택지가 무용한 것이 되는 거다. 그리고 그 다양한 선택지 중에 고르지 못했다는 열패감에 이어 주동자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합리화과정이 익숙해지는 것.
으레 이끄는 대로 냉면을 먹는 사람에게 합의점을 내보는 노력을 해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기운이 꽤나 필요한, 그래서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뭐 먹는지 고민하는 노력을 하느니 빨리 먹고 쉬겠다며 불편한 기색을 받기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고민하다보면 무언가를 고르고,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며 좀더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어떤가. 고민하고 선택하는 힘이 필요한 것은 비단 식사 메뉴에만 적용되는 일은 아니다.

뭐 먹을까는 선택의 연습이며, 합리화보다는 합의점 추구하겠다는 의지일수 있다. 그래서 뭐 먹고싶은지를 생각해내는 것은 개인으로썬 주관을 키우는 것이며, 개인의 주관이 성장하는 것은 무리가 건전하게 의사를 표현하고 이룰 수 있는 동력이다.
나는 냉면이 좋지만, 갈비탕에 들은 당면이라면 합의할 수 있다.
뭐 먹을까?

월간이리 4,5월호는 바스티앙 비베스와 양영순작가입니다.



왜 이제 올리나 하신 분이 있다면 감사합니다.

월간이리 링크입니다. http://postyri.blogspot.kr/

두분모두 제가 좋아하는 만화작가입니다. 왼편이 [염소의 맛], [그녀들], [폴리나]의 작가 바스티앙 비베스. 오른편이 [아색기가], [천일야화], [덴마]의 작가 양영순입니다.
만화는 정말 대단합니다만 폄하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수준차가 심해서라고 생각하는데요. 심지어 그 수준차가 심한 것들을 함께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화는 글(스토리), 그림, 연출이 종합되어 있기에 수준이 골고루 높거나 골고루 낮거나 어느 한 곳에 편중되어있거나 어쨌든 만화의 모양새로 나오고 같은 매대에 놓이고 같은 포털에 연재가 된다는 거죠.
제가 꼽은 이 두분은 글과 그림과 연출 모두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감에 있어 뛰어난 작가입니다.
...
이번에 4월호에 글을 펑크내서 5월호에 바스티앙 비베스와 양영순 작가에 대한 글을 함께 썻으나 생략합니다.

양작가님은 작가님의 그림체를 참고하여 그려보았는데 팬심에서 우러난 행동이었습니다. ^^
왼손

외로운 일이다.
아침이 되면 돌멩이를 깨끗하게 닦아 밖에 내놓고
저녁이 되면 들여와 먼지 쌓인 돌멩이를 한참 보는 것.
내 사랑하는 돌멩이.
누운 사람

오늘의 업로드는 끝입니다. 고맙습니다.

This drawing is today's last. thanks to first visitor.

누운 사람

누운 사람

고개를 도리도리 하고 있다. 참 좋은 그림이다.
누운 사람
누운 인가 누은 인가 갑자기 헷갈린다. 내가 업로드를 하고 있는데 지금 누군가가 동시에 보고 있다. 앞으로 한 3번 더 올릴겁니다.
연달은 손

오늘 노트하나를 마쳤다. 스캔한 그림을 노트별로 관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연달은 발
꽤 달라붙는 청바지와 꽤 달라붙는 컨버스 차림새였기 때문에 동작을 잡는데에 문제 없다고 생각했지만 맨다리 맨발인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다리를 제외하고 신발에 집중하는 편이 더 리듬이 좋다.
연달은 손

연달은 손


이건 진짜 우아하다.

연달은 손에서, 위 처럼 간격차를 둬서 리듬을 살린 것과
아래와 같이 간격은 비슷하게 가되 마지막 동작에서 팔을 슬쩍 그려 묶어주듯 완결지은 것.
이런 식으로 연달아 보는 것도 괜찮다. 한 화면에 손을 여럿 그린 느낌보다는, 일련의 동작을 보여주는 느낌으로..


주말에 같이 일하는 경은이가 손동작을 협찬해주었다. 근육의 움직임이 잘 드러나는 고루 발달한 팔이었다.


왼손
올리는 그림은 대부분 맘에 드는 것들을 추리고 추린 것들이지만, 게 중에서도 특히 좋은 게 요새 그린 손그림 몇몇. 이 것도 그 중 하나인데,
일하는 시간에 손님이 비어 그틈에 그렸던 것이라 선물 받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손가락 네 가닥이 곧은 자세를 취한 때엔 한획으로 쭉 뻗고 싶다. 그 한 획에 있는 굴곡을 통해 마디가 느껴지기 때문에 해냈다. 하는 기분이 든다.
왼손

왼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