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해와 신파

나는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 중에서도 만화책을 최고로 즐겨서 어릴 적엔 만화책이라면 일단 집어 들고 내용이 재미없어도 재밌게 읽었다. 그러니 만화책을 통해 배운 단어들도 참 많을 테다. 물론 요새도 만화책을 좋아하지만 학생 때만큼 읽지는 못하는데 특히 중, 고등학교 다닐 적엔 참새 방앗간 격으로 학교 끝나면 만화대여점을 들렸었다. 사실 그 나이 때라면 가지고 있는 경험과 함께 국어사전 또한 빼곡하다고 스스로 자신할 테고, 어디서든 낯선 단어를 접하면 이 단어가 잘못 사용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 오타인지. 내가 모르는 단어인지 파악할 수 있다. 몰랐던 단어라면 문맥상 어떤 뜻인지 가늠하고 금방 다시 적용할 수도 있다. 그 활동은 매우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일상에서 배운 단어들 대부분을 언제 익혔는지 기억하지 않는다. 내가 만화를 통해 많은 단어를 배웠을 것이지만 대부분 생각나지 않는 것이 그 자연스러움 때문이고 기억하는 두 개는 머릿속에 남는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지 않게 기억에 남은 두 단어는 곡해신파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이렇다. 곡해는 일단 오해의 잘못된 표기라고 생각하며 시작되는데, 그리 비슷하지도 않은데 왜 오타라고 생각했냐하면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언어 성적도 좋았던 터라 만화책에서 내가 모르는 단어를 접하리라고 생각지 못했기 때문. 앞뒤 문맥을 보면 오해라는 뜻 같은데, 곡해라고 적다니 오타다! 하면서 의도적으로 무시했던 것이다. 무시는 마음속에 뭔가 찝찝하니 잘못된 판단으로 계속 남아 있다가 친구와의 대화 중에 만화책에는 오타가 너무 많다는 이야기로 튀어나왔는데, 그때 그 친구가 곡해라는 단어는 있는 단어라고 말했고 나는 그제야 사전을 찾아 곡해를 발견했다. 나는 내가 모르는 단어가 만화에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곡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곡해했던 것이다. ^^;; 그 만화는 야자와 아이 작가의 나나’. 어쩌면 곡해하지 마.” 라고 말한 작중인물이 변호사 출신이라는 설정이었기에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일본에선 곡해를 자주 쓸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곡해를 늦게 접한 것이 맞겠지만 그런 식으로 언어 자신감에 찼던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이제 언어 자신감은 우물 개구리로 사라졌으니 곡해는 이제 그만하곡:> 신파를 얘기해보겠다.
나는 최경아 작가의 순정 만화 스노우드롭1권에서 신파라는 단어를 접했다. 작중 상황은 이랬다. 남자주인공은 고등학생으로,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아버지와 형은 죽었고, 막내 동생은 사고만 치고 돌아다닌다. 남자주인공은 어머니의 병원비를 벌기위해 학교를 자퇴하기로 한다. 남자주인공과 친한 여자아이 하나가 남자주인공이 자퇴한다는 것을 듣고 그런 남주의 배경 상황을 읊으며 왜 오빠만 희생해야하냐고 엉엉 우는 장면을 여자주인공이 자신의 보디가드와 함께 목격한다. 그때 보디가드는 남자주인공이 기구하다며 손수건을 물고 우는데, 여자주인공이 되레 정색을 하면서 말한다. ‘누구야, 저 신파는!’ 이라고.
신파, 신파라. 몹시 어렴풋했다. 신파적이다라는 용례를 떠올렸으나 신파적 또한 이해 못했긴 매한가지. 머릿속 사전의 다른 단어 중 하나로 파로 끝나는 노파가 있었고 당시엔 노파심도 흐릿하였던 초등학생 시절, 일단 노파와는 거리가 먼 것 같고 나는 신파=new() 새로운 등장인물, 그래서 누구야 저 새로운 캐릭터는? 정도로 곡해한 채 넘어갔다. 문제는 내가 이 만화책을 구입해서 보았다는 것으로, 만화를 다시 읽을 때마다 이 ‘New에서 뺑뺑 돌며 신파라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결론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거진 십년이 더 지난 지금 내게 신파란 비극에 취한정도의 의미로 새겨져있고 그래서 작중인물이 말한 신파는 스스로의 또는 주변인물의 비극에 취한 인물로 신파적인 인물은 기승전결의 승에 해당하는 강한 비극을 자신, 혹은 타인의 삶에 부여하는 그런 인물이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말한 신파란 비극양산자로써 비아냥의 대상이었던 것. 나중에 그 여주인공은 남주인공 못지않게 신파의 지위에 오르지만.
여하튼 내가 신파를 제대로 깨닫기까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다만, 과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과함이 비웃음꺼리로 칭해지는 것은 절제가 미덕일 때 가능한 것이며 신파란 본래 연극에서 출발한 것임을 보면 연극 요소로써의 신파의 과함을 비웃는 것이 과연 쿨한 행동이라 할 수 있을까? 연극에서의 큰 동작과 과장된 어조는 물리적 거리를 극복해야하는 것으로 그만의 매력이 있으며 그 맥락으로 신파도 이해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촬영기술로 거리를 극복하는 드라마의, 영화의 연기를 보는 것을 통해, 큰 착각에 빠져있다. 아무도 드라마처럼 살지 않는다. 누구도. 나를 관람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한 아무도 드라마로 살지 못한다.
왜 비극에 취한 인물을 위로하지 못하고 비아냥하는가. 자기의 슬픔이나 징징대고 싶은 부분을 맘껏 풀어버리지 못한 채 애매한 어른의 태도를 흉내내며 자란 탓은 아닌가. 신파라는 비아냥을 피하기 위해 쿨함을 가장하게 되고 그렇게 자기가 맘껏 울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울 때 어린애취급을 하는 동시에 다시 한번 자기의 어린아이부분을 묵살하는 것이 아닌지. 남의 신파를 받아줄 만큼의 여유가 성장하는 모두에게 있길 바란다. 그리고 모두 건강하게 성장합시다.
 
. 그러고 보니 만화 상에서 주인공의 상황에 대해 열을 올리는 것에 신파적이라는 대사를 했다는 것은 작가 자신이 자신의 설정이 신파적임을 자조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