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6월호 장 뒤뷔페 입니다


이번호 드로잉은 특히 맘에 듭니다. 음.. 네, 그렇습니다.
http://postyri.blogspot.kr/2013/06/2013-6.html
월간이리 블로그 링크입니다.

http://issuu.com/postyri/docs/postyri1306web/1?e=5641367/2856679
이 링크를 통해 월간이리 6월호를 보실 수 있습니다.

요근래 드로잉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딱히 업로드할 만한 그림이 없었기도 했고. 쳐지네요.
올해도 벌써 여름이라 자칫하면 말라죽은듯 보내게 될테니 고삐를 잡아야죠.
모두 필요한 의식주가 풍요로우시길 바랍니다.

연재글보기
장 뒤뷔페 (Jean Dubuffet)
‘나는 무엇을 잘 못해.’
이 말을 하긴 쉽습니다.
‘나는 무엇을 잘 해.’
이게 어렵죠. 왜 어려울까요?
겸손이 미덕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가장 크게는 잘한다고 자평할 ‘자격’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객관적으로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분야, 예를 들어 달리기 같은 경우, 국민 대다수가 자신의 100m내지 50m달리기 기록을 알기에 평균내기도 쉽죠. 프로선수와 비교하면 잘하지 못하지만 대중과 비교하면 잘하는 것일 때 편하게 ‘나 잘해’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수치화가 가능하지 않은 것 중, 감상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무언가를 감상하고 잘한다, 나쁘다 얘기할 수 있으려면 우선 그 무언가를 많이 접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접해도 영 감이 안 오는 분야가 있지만 접하다보면 적어도 취향은 생기니까요. 그런 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의 구분을 하는 것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접해가며 취향을 넓히거나 깊이 파고드는 것을 취미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 취미 하나는 피아노를 치는 것입니다. 잘 치냐고 물어보시면 멜로디를 왼손 코드에 맞춰 연주할 정도이지만, 꽤 좋아합니다. 집에 피아노가 있기도 하고요. 만약 집에 피아노가 없다면 저는 피아노를 치는 생활을 할 수 없겠죠. 우리 집에선 오로지 저만이 피아노를 칩니다. 다행히 소음문제로 이웃에게 헤를 끼친 적은 없었으나 각자 방에 있는 가족에게 폐가 되지 않는가하고 신경이 쓰이곤 해요. 그래서 가끔 엄마에게 여쭤봅니다. 너무 시끄럽지 않느냐고요. 그러면 엄마는 ‘엄마는 음악은 잘 모르지만 딸내미가 피아노 앞에 앉으면 좋아.’ 라고 말하십니다. 네, 저 사랑 많이 받고 자랍니...가 아니라, 그러니까 엄마의 말씀에는 ‘엄마는 좋긴 한데 음악을 잘 모르는 내가 좋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하는 태도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겁니다.
잘 모른다는 것은 많이 접하지 않았다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나 피아노를 치고 도서관에서 책빌리는 것처럼 흔히 연주할 공간이 있다면 아마 다른 생활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면 하는 것이다가 자연스러워지는 것을요.
무언가를 좋아한다-싫어한다 구분하고 좋은 것을 취하며 탐구하는 것은 개인 취향을 공고하게 하거나 혹은 다른 차원으로 높여줍니다. 그것은 삶의 질을 높이는 활동인 것이며, 건전한 취미생활 환경이 조성되어있는 것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크게는 사회의 문화융성과 함께 가는 말로 아마추어 감상자가 늘어나는 것은 잠재적으로 아마추어 생산자도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생산, 감상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거죠. 결국 풍부한 아마추어 대중은 그 문화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것. 따라서 무언가에 대한 이론을 깊이 알 때만이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풍토는 사회적 결핍을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에 대한 결핍이냐. 예술이 소수의 엘리트화 된 것에 비해 중간층이 즐길만한 여유와 환경이 없다는 것의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예술향유가 생활이 아니라 교양인 삶을 산다는 거죠. 이론은 잘 몰라도 좋다, 싫다를 말하는 것에 스스럼없는 층이 넓다면, 그것의 저변이 넓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그 무언가를 접하고 누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기 때문에요. 따라서 예술작품이 좋다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면, 그 판단의 수준을 차치하고 대중도 예술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인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흔히 듣게 되는 말이 ‘내가 잘 몰라서...’이고요. 그리하여 무엇이 왜 좋은가를 말할 때 엘리트의 말에 기대게 되는 것이죠. 예술에 잣대를 댈 수 없겠으나, 그 잣대가 있다면 엘리트가 알리라는 겁니다.
하지만 장 뒤뷔페는 콧방귀를 뀌죠.

뒤뷔페는 ‘예술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만든 작품’을 연구하면서 전통적이고 진부한 창작의 원칙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이러한 ‘전통적’ 예술이야말로 문화적 예술보다 선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순한 만남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후 그의 창작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진정한 발견이었다. 뒤뷔페는 ‘예술은 한 사람(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며, 타자로부터의 어떤 가르침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장 뒤뷔페 [우를루프 정원]도록의 서문 18p

잣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장 뒤뷔페를 이번호 예술가로 꼽은 것은 순전히 그의 사상 때문이에요. 그는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대중을 따돌린 채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는 엘리트 문화를 비판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림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해내는 그림, 정신병원에 갇혀있거나 그림을 업으로 삼지 않은 이들의 그림을 수집하고 컬렉션 시켰습니다. 그렇게 그가 주창한 아웃사이더 아트를 살펴보면 대중보다는 미술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광인의 광기에 의한 예술을 선호하는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를 넘사벽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돼서 부분적으로만 동의하지만요. 예술에서 순수함과 광기를 드러내는 것. 정신을 번뜩 뜨이도록 낯설게 만드는 힘. 새삼 번뜩 뜨인 정신이 새로운 것들을 깨닫는 것, 잊었던 것들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니까요.
우선은 단순 유희로써 좋다-싫다를 밝혀보는 것이 분명히 도움될 겁니다.

‘예술은 놀이, 즉 정신의 놀이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주된 놀이인 것이다. 여기 순간적으로 헝겊뭉치를 쳐다보는 아이가 있다. 어떤 생각이 아이의 머릿속을 스친다. 아이에게 헝겊뭉치는 이제 인디언이다. 그리고 진짜 인디언들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헝겊인형을 두려워하기로 결심한다. 실제로 아이는 헝겊인형이 무섭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가 이것이 단순한 헝겊뭉치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어차피 애초에 인형을 인디언이라고 결정하는 것 자체가 다분히 장난끼의 발동이다. 아이는 헝겊인형을 인디언이라고 믿기로 결심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믿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아이는 바로 이런 식으로 정신이 작동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매혹시키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정신적 과정의 실험과 검증이다. 아이는 마치 아기가 작은 발을 움직이면서 노는 것처럼 이렇게 자신의 정신을 움직이면서 논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같은 도록 233p

글·그림 지인 freshdrawing.blogspot.com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