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 19번째 프로젝트 '서있음'


작가중심의 실험공간을 제공하는 오픈베타공간 반지하의 19번째 프로젝트 참여작가가 되었습니다.
프로젝트 주제는 '서있음' 입니다. 

드로잉과 설치작업 몇 점이 전시되고 기간동안 추가되는 그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3/25(월)~4/5(토)까지이며 예약제 방문입니다.


반지하라는 공간과, 이번 프로젝트에 대한 더욱 자세한 사항은 링크를 통해주세요. 감사합니다.


http://vanziha.tumblr.com/post/80468388565

편리함에 대해 말하려다 길을 잃은 글

무언가 쓰거나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다행이라는 마음도 함께 든다. 내가 뱉어놓은 것들이 산발적으로 쌓인 모양을 바라보며 답답한 와중에 글이든 그림이든 새로운 것이 나오면 그 것을 다듬는 동안 나는 내 시간을 잘 채워나가고 있구나-하면서.

[그림여행을 권함]이라는 책의 프롤로그에 이런 글이 있다.
-가장 기본적인 물음에서 시작해 보자. 그림이란 뭘까? 그림은 명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동사이기도 한 말이다. 나는 이런 구조의 말들이 좋다. 꿈을 꿈. 삶을 삶. 그림을 그림. 이런 말들에는 결과와 과정을 동등하게 중시하는 뜻이 읽힌다. 이런 의미에서, 그림이라고 하면 대개 종이에 남는 결과물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나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행동, 더 자세히 말해 그리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변화이다. ...-
김한민 저_그림여행을 권함_민음사_11p

그림이란 뭘까?-하며 저자는 그림의 정의 대신 그림을 그리는 행위. 그림 그리는 중이라는 상태에로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무척 아름다운 인도라고 생각한다. 그가 주목하는 ‘시간의 변화’를 수양에 붙여서 말하려고 한다.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고 다 마쳤다-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 해서 재차 반복하는 것을 갈고 다듬는다 하고 그것은 일종의 수양이다. 수양이라 하면 편안함을 배제하고, 편리함 또한 지양하면서 몸을 닦고 마음을 닦고 도를 닦는 일이니까. 편리하고 편안한 방법으로 갈 수 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몸을 쓰기를 선택하는 일 또한 수양하길-수도하길 택하는 거라고 할 수 있다. 쉽게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택한다거나 우유팩을 버릴 때 물에 행구고 펼쳐 버리는 것 같은 식으로 좋아, 불편을 감수해보자- 하는 건데 그러기를 택할 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게는 크게 두 가지로, 첫째는 편리하고 편안하려고 건너뛴 것이 지속해서 뭔가를 상실시킴과, 편리하고 편안한 것으로 아낀 시간을 내가 제대로 채우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과정을 건너뛴 결과물들을 늘 손에 쥐고 있다. 돈 주고 사는 것은 다 그러하니 그중서 고기의 예를 들어본다. 오늘날 고기는 가공된 상태로 깨끗하게 포장되어있다. 가공육을 사다가 요리하는 것은 손쉽고 빠르다. 생명을 잡아 거두고, 다듬는 길고 복잡한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그 시간과 노력을 우리는 값을 지불하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맡긴다.

질문한다. 만약 고기를 먹기 위해서 동물을 잡아와 목을 따고 털과 내장을 제거하고 부위별로 나누기를 무조건 해야 한다면 고기를 지금처럼 자주 먹을 수 있겠는지? 기꺼운 마음으로 동물의 목숨을 거둘지. 살을 나누는 일에서 어떤 의미를 찾게 될지. 차라리 채식주의자이기를 택할지. 무척 번거롭고 까다로운, 그리고 비위를 상하게 하는, 힘에 벅찬 일을 고기를 먹기 위해 하게 된다면 고기를 먹는 일은 우리에게 좀 더 다른 무언가가 되지 않겠나?

고기를 잡는 일만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들의 보이지 않던 과정을 체험하는 일과 같은 것들은 우리에게 능동적임에 속한 귀찮음을 선사한다. 조금 능동적인 태도로 우리는 익숙했던 것의 낯선 면을 보게 되고 낯선 앞뒤로 전후 관계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들 중 일부는 우리가 다른 모양으로 살기를 결심하도록 이끌 수도 있다. 우리가 생략하고 있는 경험들에 다른 삶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거다. 그런 하에서 비약하자면 편리함은 우리에게 기회박탈을 선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와 삶의 다양한 모양을 선택하기 위해 백정의 일을 만민에게 돌리겠나. 어떤 시대의 만민이 백정의 일을 기쁘게 자기 일상에 포함시키겠나. 어떤 문명이 자기의 만민에게 백정 일을 고루 돌리는 시스템을 만들겠나. 그러면 이제 만민은 어떻게 사서 수고로움을 겪어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갈 것인가.

수고로움에 드는 시간. 어떤 수고로움으로 우리의 시간을 들일까. 시간을 들임은 시간을 채움이기도 하다. 편리함속에서 우리를 환기시키는 것은 어떤 값을 들여도 빠르거나 느리지 않는 시간을 그 자체로 진실하게 보내는 것. 그 것은 몸과 정신이 같은 속도로 차오르는 일.

휴..

내가 암만 글쓰기를 발휘하여 다듬어봐야 사상이 누각하다. 소로가 월든을 썼을 당시 내 또래였는데 말이다. 나는 경험이 짧은 탓에 낭만적인 상상에만 의존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도축이 일상이 되면 도축은 신비롭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도축해본 일이 없다. 닭 잡는 것을 구경하거나 사슴 뿔을 자르면 피가 솟는데 그것을 받아 마시는 것이나, 개를 잡아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것에 참여해본 따위가 그나마 경험일 것이다.

문명이 가져다준 편리와 편안을 거부하는 것이 모두에게 권할 선한 것은 아니다. 실상은 쉬기도 바쁜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시간을 흘려보내지 마세요. 수양하세요!라고 말한다면 그런 나의 말을 듣는 것 자체로 짜증을 참느라 이미 충분한 수양이 되겠지. 그러나 판 벌린 김에 계속 글을 잇는다,

편리함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지만 우리는 익숙한 만큼 편리함을 잘 다루진 못하고 있다. 축지법 같은 거다, 땅을 주름 잡아 걷는 도술도 좋지만 빨리 도착한 곳에서 무엇을 할지가 중요한 거다. 땅을 주름 잡을 만큼 도를 닦은 이라면 도착한 곳에서도 도를 펼치겠지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우리가 축지법을 돈 주고 산다는 것에 있다. 빨리 도착한 곳에서 사람들이 헤매고 있다. 빠른 걸음으로 도착한 곳이 암만 높아봐야 아무것도 없으니 사방을 둘러보는데 무엇이 보이나. 여기 저기 급한 발자국들만 가득 남은 땅에서.
황폐하다.

나는 애초에 뭘 적으리라 기대했던 걸까? 황폐한 와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