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위한 드로잉

모 도서관 폐관곡의 역사(수정2013.2.4)


모 도서관 폐관곡의 역사
 
내가 자주 가는 일산의 모(굳이 안 밝힘) 도서관에선 글을 쓰는 현재(20127*), 폐관시간이 되면 영화 인셉션의 인상 깊은 삽입곡 'Non, Je Ne Regrette Rien' 틀어둔다.
*이 글을 마무리 짓는 지금이 20132월이라니 뜨악하다.
그 전 폐관곡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So long, Farewell'이라는 곡이었다. 그리고 그 전 곡이자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폐관곡은 '또 만나요'. 우리나라 그룹 딕훼밀리의 곡이다.
그러니까, 모 도서관 폐관곡은.
또 만나요So long, FarewellNon Je Ne Regrette Rien 로 바뀌어왔다. 도서관 이용을 시작한 2008년엔 폐관곡을 들을 정도로 늦게까지 머물지 않았으며, 학교 도서관을 이용했기에 몇 개월간 가지 않았던 동안 다른 곡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을 차치하고서. 이 세 곡의 순서를 일산 모처 도서관 폐관곡의 역사이다! 라고 말해버리자.
 
도서관 폐관곡의 역사
폐관곡이라하면 -이제 문을 닫을 시간이므로 주변정리를 하고 잘 가시기 바랍니다. 라는 코멘트를 대신 전달하는 목적이 있다. 파블로프가 개에게 종소리를 들려줘서 밥시간을 알림과 마찬가지로, 때를 신호하는 음악인 것.
곡 순서대로 가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또만나요-딕훼밀리
빠빠빠 빠빠빠 빠빠빠빠 빠빠빠 빠빠빠 빠 빠빠빠
빠빠빠 빠빠빠 빠빠빠빠 빠빠빠 빠빠빠 빠 빠빠빠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다시 만나요
헤어지는 마음이야 아쉬웁지만 웃으면서 헤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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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long, Farewell-사운드 오브 뮤직ost
원래는 영어 가사이다.
(중략) 안녕, 안녕, 안녕, 또 봐요.
나는 남아서 나의 첫 샴페인을 맛보고 싶어요.
안녕, 안녕, 또 봐요, 안녕.
나는 떠나며 한숨을 쉬고 작별을 고해요.
안녕.
(중략) 햇님은 자러 가고 나도 자러 가야 해요.
안녕, 안녕, 또 봐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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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Regrette Rien-인셉션ost
(불어해석)
...아니, 전혀, 내게 후회라곤 없어
왜냐면 바로 오늘부터, 내 인생, 내 행복, 모든 것이
당신과 함께 시작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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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폐관곡으로 납득이 가기도 애매하기도 하지 않는가?
-지금은 헤어져야 할 시간이기 때문에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내용에서 -나는 자고 싶지 않지만, 여러분 이만 안녕,- 이라는 내용이 갑자기 -지난 것들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당신과 함께이기 때문에 다시 시작이다.-라는 내용으로 건너뛴다.
이 건너뛰는 변화가 내가 즐거움을 느끼고 글을 쓰게 된 이유인데
'또 만나요'는 곡의 제목이 인사이며, 그 가사에서 도서관의 폐관시간이 되었음을 직설적으로 전달한다. 두 번째 곡은 일단 영어원곡이므로 가사를 해석해야 하는 것 외엔 첫 곡과 비슷하다. 가사에 등장하는 Good Bye가 워낙 친숙한 인사말이기에, '잘 가'라는 의미 전달로 폐관시간이 다 되었음을 전달하는데 무리가 없다. 그런데 세 번째 곡에 이르면 일단 가사가 불어이며, 그래서 상대적으로 친숙하지 않다.(네이버 지식인:http://bit.ly/P8P89V) 심지어 가사를 이해하더라도 내용이 폐관과 연관이 없다. 영화 인셉션을 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지 않았더라도 'So long, Farewall'이 폐관곡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인셉션이 워낙 흥행하긴 했지만 보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세 번째 폐관곡이자 인셉션의 OSTJe Ne Regrette Rien은 타인의 꿈에 들어가 무의식을 조작함으로써 사업상 결정을 하는데 영향을 미치거나 기밀을 빼내는 일을 하는 주인공이 꿈에서 깨어나기 위한 신호로 삼은 음악이다. 이렇게 폐관곡으로 쓰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인셉션을 보았거나 들어야하는 -정보 내지는 경험이 필요하게 되었다. 단순 신호로 기능한 음악에서 지식이나 정보의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 이해가능한 음악으로 심화된 것. 그래 이게 뭐가 재밌다는 것인가? 그 곡이 어떤 곡인지는 아는 사람만 알면 되는 것 아닌가? 폐관을 알림이라는 신호의 기능만 수행한다면 뭐, 생일축하노래가 나와도 상관없지 않나?
내가 재미를 느낀 점은 폐관곡이 차근히 단계를 밟아 변한 것에 있다. 만약, 최초에 그러니까 2007년 일산의 모 도서관이 개관한 622일엔 폐관 음악이 없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도서관 사서는 시민들에게 일일이 도서관 폐관시간이 되었으니 나가달라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누군가 음악을 틀어두자고 아이디어를 냈겠지*.
*애초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짙지만.
음악은 도서관의 고요함을 권위를 가지고 깸으로써 훌륭한 폐관 신호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엔 단순히 알림으로써만 기능하기위해 단음의 멜로디가 신호로 쓰였다면, 더욱 더 재미있겠다.
도서관측에서 음악을 튼다. 음악은 신호다. 방문객은 도서관 폐관시간이 되었다는 의미를 전달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전달체계가 도서관측과 방문객에게 익숙해진 상황에서, 도서관측은 또 만나요로 곡을 정한다. 가사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폐관곡은 단순 신호에서 의미를 담게 된다. 음악 신호로 폐관임을 알린다.’라는 체계가 생겼기에, 폐관을 알리기 위해 다른 멜로디의 가사 없는 곡을 써도 되는데, 가사로 의미를 전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신호의미)그리고 ‘So Long Farewell’로 의미전달에 스토리를 담아 심화시킴을 통해 현재의 Non, Je Ne Regrette Rien이 폐관곡으로 정해질 수 있었던 거다.
그러니까 단순 신호 전달 의미를 담은 신호 전달/의미와 상통하는 스토리를 담은 신호 전달 상징을 담은 신호 전달
폐관시간이 되면 음악으로 알려준다는 사실이 친숙하게 받아들여지기에 그 곡이 왜 선택되었는지 모름에도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메시지, '폐관시간이 되었다.'를 신호하는 것이 가능해지며, 그것이 도서관측과 방문객에게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상태이므로
이 곡은 영화 인셉션에서 꿈에서 현실로 되돌아가야함을 알리는 음악으로 사용되었으니 폐관시간에 틀어두면 괜찮겠군.’ 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 이다.
 
세상은 더욱 풍부해진다지만 의미차원에서 전 의미를 다 이해하는 것, 그 상징을 모두 알아차리는 것, 숨은 것을 발견하는 사람은 점점 적어진다. 그러면 과연 풍부해진 것인가.
정말 즐겁지 않은가내가 느낀 이런 즐거움은 꼬아둔 것을 이해하는 것에서숨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사실은. 의미가 없던 무엇에 무언가를 빗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정수는 무엇인가나는 알 수 없고 그것을 찾으려 애쓰는 일은 즐겁다그래서 ‘예술이 그렇다더라.’가 신호처럼 모두에게 익숙해져 예술이라는 신호는 점점 숨겨진 의미를 갖게 되는 쪽으로 넘어간다고 해버리고 말이다. 어쨌든 노래가 나오면 사람들은 갈 준비를 한다. 인셉션을 생각하며 더 감흥을 느낄 사람들도 가야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 일하다가 문득 Non, Je Ne Regrette Rien을 들으면 왠지 퇴근해야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난 일하는 것이 좋아서 깨기 싫다)
 
 

2013.1/16

적당히 위에서 걷는 사람들을 그리자면 일정한 곡선이..


2013.1/7


카페8.5에서 바자리에 벽보고 앉으니 보고 그릴 사람이 없어 내면을 그림.
 저렇게 큰 서명을 해두니 어색함에 몸둘바를 모르겠다.
그림에 서명을 하는 것은 익숙치 않고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은데 그에 대한 생각을 좀더 구체화해볼까 한다.

블로그 구성을 조금 바꾸었습니다.

1987년 이래로 26년만에 다른 숫자 4개로 이루어진 해라는 2013년을 맞아 블로그 메뉴를 약간 바꾸었습니다. 블로거는 tag를 이름순으로 나열하도록 설정이 가능해서 메뉴바로 사용하기 좋죠..

메뉴바를 설명합니다.
About : 이 블로그에 관한 짧은 정보가 들어있습니다.
Contact : Email 등의 아이디가 적혀있습니다.
Daily : 그간은 Daily에 글을 올렸었는데 이제 글은 Text에 담기고, 대신 Daily에는 그날 그린 드로잉이 올라갑니다. 주로 크로키겠죠.
Drawing : 지금과 같이 주제가 있거나 없는 시리즈이거나 아닌 드로잉을 캡션과 함께 업데이트됩니다.
Text : 산만한 주제의 글들이 올라옵니다.

그리고 작년 말부터 리스트 기능을 사용하고있습니다.
연도-월별로 포스트를 보실 수 있어요. 스크롤을 쭉 내리면 오른편에 리스트가 보입니다.

리플 달기 복잡하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해결방법을 모르겠어서 리플기능을 해제했습니다.

앞으로 2019년도까지 다른 숫자로 구성된 해가 이어지네요. 저의 올해활동이 양(+)적 역할이었으면 합니다.







지난 해 특히 맘에 들었던 얼굴들

월간이리 뒷 표지 담당의 썰 (2) -10/9에 수정

월간이리 13년 1월호:마리나 아브라모비치, 2012




우헤헤 월간 이리 1월호가 나왔습니다.
월간이리 2013년 1월호(클릭)http://postyri.blogspot.kr/2013/01/2013-1.html
위 링크를 통해 웹에서도 월간이리를 읽으실 수 있어요.

그럼 1월호도 나왔겠다. 썰을 풉니다.

(2)
두루 두루 크게 말해 예술가는 콘텐츠 제공자입니다. 예술작품이라는 콘텐츠를 내놓는 이로써, 작품의 질은 예술이라고 칭해질 때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놓는 사람 개인의 수준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의 수준은 그가 타고난 바와 그것을 연마한 정도입니다. 모두의 출발선이 다르고 삶 중에 터지는 아이템 운도 다르고 하여, 목적지까지의 도달한 시간이라든가 따낸 점수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결국 눈에 볼 수 있는 척도로 우열을 가립니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부당함은 어쩔 수 없으나 사람들은 자기의 잣대가 가장 합당하다고 여기지만 가장 덜 부당한 것 뿐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금 제 잣대를 내미는 겁니다. 제가 뽑은 예술가는 제 잣대로 볼 때, ‘타고나고 연마되었다.’ 싶은 사람들(이자 제가 알만큼 유명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진 편향됨을 건강하게 키웠다고 봅니다사람들을 나무라고 치면 그 줄기나 가지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다는 겁니다. 나무의 유전인자는 둘째 치고 늘상 그늘져있는 곳엔 가지가 잘 가지 않고, 땅속에 바위가 있다면 뿌리가 구부러지겠죠. 그런 식의 편향 가능성이 사람에게 있는데, 예술가는 그중에서도 특히 굽어자라기 쉬운 인간유형이고 이제는 편향을 권장받기도 합니다. 편향권장에 대해서 제 짧은 생각은 사람들은 번뜩임의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건데요.

영국의 부유하고 명예로운 가문 출신으로 풍요로움에 익숙했던 작가는 아버지의 인도 발령으로
인도에서 살며 마주한 식민지의 삶을 통해 겪은 고뇌를 그림을 통해 드러냈다.*

예처럼 뚜렷한 인과관계를 출처로 그림을 이해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삶의 고통을 마주할때마다 자극되는 창조성이 그를 몰아갔다. 그는 피를 뿌릴 수 없어 대신 물감을 뿌렸고,
그 위에 굴렀고, 핥았고 신음했다. 마침내 만들어진 화면은 그 영혼의 울부짖음 그 자체였다.*

식으로 예술가의 광기, 기이함의 소산으로 말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두 예시 다 있을 법하게 지어낸 겁니다.

아마 그 편이 더 신비롭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은 신비의 자리를 너무 많이 잃었고 예술에게 잃은 신비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예술가가 품은 창조적인 무엇을 인위이나 인위를 넘은 것이라고 평가하고, 그 활동을 하는 예술가를 그림자가 없는 인간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의 광기가 그 예술의 진실함을 담보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워져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예술가의 광기는 공유되지는 말았어야 했습니다. 공유는 반복 노출의 가능성을 높이고 반복 노출은 곧 학습이죠. 광기를 학습할 수 있다는 말은 광기의 태도만을 배운다는 소리에요. 광기가 예술의 척도라고 여기는 것은 결국 예술가를 지망하거나 그 태도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광기의 태도를 권장하는 것입니다. 예술가의 기이한 태도는 수급에 맞춰 소비되고 있어서 연출과 진짜사이에 헤매기가 피곤합니다. 학습된 광기가 대중에게 다시 한 번 먹거리로 제공되는 것도 막을 순 없지만 막고 싶은 일입니다.

물론, 편향됨=치우침은 중립의 자세로는 균형이 맞을 수 없을 때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변화가 필요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그렇지만 권장될 바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테트리스 게임에서 작대기는 길이방향으로 자란 편향의 결정체이지만 그게 아주 절실할 때가 있죠. 한방에 4, 5줄을 소멸시켜 노력대비 큰 쾌감을 주고요. 하지만 그것만을 기대하는 테트리스는 조화가 깨져 산으로 가기 쉽습니다.

제 잣대에 대해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저는 타고난 것에 덧입어 풍부한 혹은 설득력 있는 = 내실 있는 계속해서 제공할 수 있으려면 제대로 된 인간이길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라는 말은 매우 깊이 있는 말입니다. 삶에 적용하자면 '제멋대로'와 혼동되는데 '제대로'는 훨씬 어렵죠. '제대로' 가고자하는 그들은 다분히 인간적인 자기 기준에서 인간이고자, 혹은 인간이길 초월하고자 하면서 주변 환경을 극복하고 자기를 형성합니다. 물론 어떤 계층이라도 사람은 자기의 환경을 극복해야합니다배고픈 사람은 배고픔을배부른 사람은 배부름을 말이죠그렇게 자기극복과 자기형성의 진실함에 목마른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은 훌륭한 태도를 지닌 것입니다. 예술가 뿐 아니라 어떤 삶의 모습에서도 제대로를 추구하며 살 수 있을 것인 그러한 성질입니다.

'자기극복'은 '자기형성' 내지는 '자아실현'을 배척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둘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줄 수 있는 태도입니다. 제대로와 제멋대로의 차이인 것인데요. 나무는 자라는 것이 본성이지만 자라기 쉬운 쪽으로 치우쳐 자라는 것을 극복해야 건강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며, 건강하게 유지된 생명이 결국 건강한 열매를 줄 것이라는 간단한 사고방식이죠. 제대로 먹는 것과 제멋대로 먹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보시면 이해하기 쉽겠습니다. 제대로 먹으면 좋은 똥을 쌉니다.

똥이 흙으로 돌아가 거름이 되는 세상의 환원을 저는 정말 사랑합니다.
사람 또한 그런 환원의 일부임을 볼 때, 정말로 사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