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독일남성의 얼굴, 2012

월간이리 뒷 표지 담당의 썰 (1)



(1)
소식이랄까.  월간이리 뒷 표지를 예술가 얼굴 드로잉으로 채우게 되었습니다. 월간이리는 상수동 이리카페에서 매달 발행하는 무가지인데요. 여차저차 연결되서 하게 되었어요. 2013년 1월부터 한 해간 마지막 두 면엔 제가 뽑은 예술가에 대한 글, 그리고 뒷표지엔 그의 얼굴 드로잉이 실립니다.  제 그림을 오프라인으론 처음 내보이는 것이라 좀 설레요. 글도 그렇고요.
예술가의 얼굴을 드로잉하는 것은'그리고 싶어요재밌을 것 같습니다.' 하고 쉽게 정한 것에 비해 아주 어려웠습니다드로잉이야 좋아하는 예술가를 그리면 된다 싶기도 한데, ‘자기가 좋아하는 예술가 그린거래.’에서 끝나는 그림이 아니라 이 예술가를 왜 그렸는지 그리고 앞으로 남은 사람들은 어떤 개연성으로 이어지는지의 것들을 적고자 하니 그거 어렵대요. 그리고 싶은 얼굴을 그릴 땐 동인이 저에게 있으니 그림도 술술 그려지고 논리를 세울 필요도 없는데 미션 [예술가를 그려라.]는 그에 비해 좀 복잡한 겁니다일단 외부에서 들어온 명령어라 저의 내부에는 그것이 나올 틀이 없기에 새로 짜지 않으면 글까지 한 세트인 결과물을 뽑아낼 수 없었습니다1년 예정이니 제가 생각하는 예술가를 12명이나 그릴 텐데 12명은 12사도열두 사도면 복음전파즉 이것은 제 예술관까지 전파 되버리는 무시무시한 작업인거 아닙니까? 그런데 예술관이 바로서지 않았다면 어쩌죠? ^^ 여태껏 살면서 본 것들접한 것들을 '좋다나쁘다느낌 없다.' 하며 항상 분류해왔으니 취향은 분명한데 관으로 세울만큼 그것들을 명확한 언어로 정리해본적은 없어요일단 시작이 절반으로 인도해주기를 기대하며 좋아했던 작가를 다 꼽아 놓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뭔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지만 사실 그게 그거에요. 닭과 알. 뭐가 먼저인지는 문제가 아니에요. 진리는 알이 있다면 닭은 분명히 있는 거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현현한 순서의 전후관계가 바뀔 때 서로가 부정된다면 그때만이 순서를 두고 진리를 논할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요. 이 생각을 요번 경우에 적용하자면 예술가를 먼저 정해놓고 글을 쓰기 시작해도 사실 제 안에선 동시에 존재한 것이기에 자연스레 논리와 맥락이 설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무에서 유를 내는 창조로 썰을 푸는 것도 가능한 경우가 있지만 적어도 제게는 아니라서 만약 그렇다면 글 자체가 진행이 되지 않을겁니다. 그래서. 제가 술술, 어떤땐 쥐어짜가며라도 글을 바르게 썼다면 그와 함께하는 그림도 결코 지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완벽한 콘텐츠*가 된 셈일 테니까요. 

*콘텐츠-위키백과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콘텐츠(content)는 각종 매체가 제공하는 정보이다저작물창작물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쥐어짜네 어쩌네 해도 즐겁습니다. 위에도 적었다시피 글과 그림을 세트로 처음 내보이는 거에요. 그림은 뭐 그렇지만. 글도 읽어줄만 할지..?

(월간이리는 굉장하게도 인터넷을 통해서도 볼 수 있어요. 1월호가 나오면 (2)번 글을 올리면서 링크를 걸어두겠습니다.)

팬티를 입어야 할 것 같다_종이에 연필, 오일 파스텔_2012

종이에 연필, 46*66cm, 2012

20121219_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에 대해





이전 사람들이 스포츠를 자신의 마을 내지 도시의 명예와 연관지어 열광했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피와 땀이 정당하게 보상받는 드라마를 보고 싶기 때문아닐까.
언제부터 정당한 보상이 드라마가 되었는지 잘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 나아가
승리의 지표가 객관적 지수인 것과, 노력의 보상은 승리라는 가시적 성과임을 새기며
객관적이고 가시적인 것엔 거짓이 없는지 잘 살펴야할 일이다.
사실이렇게까지 따지지 않아도.
언제나 승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져간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이 보고 싶은것은 정당한 보상이 아니라
한 번의 승리가 가져오는 계급상승의 드라마가 아닌가.
그런하에서 세상은 누구를 승리자로 맞더라도 바뀌지 않는다.
이전 사람들이라고 달랐을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언제나 깊은 후회속에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언제나 깊은 후회속에 가인은 아벨을 친다.
뱀은 승리에 있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도시정착민에게 알맞은 사고방식이 아니다.
그래서 이 생각은 건강하지 않다.
모든 것이 병들었다고 빈정거리지 않나.







뜨는 밤을 등지고 서있는 것이 쉽지 않다. 서있는 것은 어렵다. 등지고 서있는 것도 어렵다.
해가 지고 뜨는 밤. 달마저 저물었는데. 어둠을 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가볍지 못하고.








두꺼운 종이에 목탄 (charcoal on paper)_54*39 cm_2012


두부펀치 머신 Tufu punch machine, 2011

20121021-내가 오늘 카페에 앉아있던 11시에서 4시사이

내 자식과 같은 반의, 라는 공통점으로 뭉친 아줌마 일단이 들어왔다가 나간뒤에
바깥으로 여자를 보며 품평을 하는 남자 둘이 나간뒤에
두 시간 공부하고 징징대는 여자와 달래다 지친 남자라는 커플이 나간 뒤에
자기가 나쁜 남자라고 하는 수탉같은 남자와 선배 소리가 푹익은 공대출신 여자의 조합이 도합 세 커플이던 무리가 나간뒤에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으니 나와 연락이 되지않았다고 하란 당부의 전화를 네번째 반복하는 뒷자리 남자와 나만 남았다.
내가 오늘 카페에 앉아있던 11시에서 4시사이

사실 사람은 11시에서 4시사이의 일면으로 이렇다 저렇다 할만큼 단순하거나 뻔하지 않지만, 또 보게 될 지 다신 안 볼지 모르고 다시 봐도 모를 사람들을 나는 그런 전형적인, 내가 파악할 수 있는 100명의 캐릭터 중 한 사람으로 분류한다. 이건 노력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 나또한 남에 의해 쉽게 분류되곤하고, 그래서 첫 만남에 그림그리는 사람답네요 하는 소리를 듣고 나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그림그리는 사람의 캐릭터에서 나를 독립시키고 싶어진다.
초교 운동회 중에, 100미터 달리기를 해서 6명 중의 1등이 되었다고 하자. 1등 도장을 받고 자랑스러웠는데 곧바로 다른 1등들과 합쳐져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1등 뭉치가 된 것과 같다.  달리기 1등들. 이렇게 되고나면 도장찍힌 위치가 손목인가 팔꿈친가 비교하며 다른점을 찾아야한다. 그러다가 깨닫는 것은 1등 참 많고 별거 아니구나 하는 그런.
하지만, 내가 수많은 1등 중의 하나이든, 수많은 러너중의 하나이든 그것 별 것 아니구나 했을때.  1등은 뻔할지언정, 사람은 뻔하지 않다는 걸 다시 생각한다.


 타인을 내가 가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분류한 뒤 '뻔하다'고 느끼는 것은 만나는 모두를 개별자-개별관계-나 너로 받아들이기엔 우리가 너무나 많은 인간들에 둘러쌓였기 때문이 아닌가. 확실히 우리는 서로를 인간으로 대하고 관계맺기보다 너무 많은 서로에게 잠겨 숨막히기 쉽다. 빨리 내 눈 앞의 당신을 정의내리고 분류해서 내가 아는 인간의 범위에 위치시킨다.
10분 아니면 1분의 일들로 전형적인 공대남 내지는 전형적인 학부형, 징징대는 여친 등으로 그 사람을 분류하는 것.
그리고 내가 분류하여 파악한 세계를 희화시켜 말하는 것, 그것은 놀이다.
내가 사람에 대해 갖는 이해를 공감하며 함께 즐거워하길 바라는-대상을 파악하고 분류하고 다음 대상으로 나가며 분류와 파악을 멈추지않는 태도를 가진 때문이다.
'놀이'에서 멈춰서, 마치 그렇다. 세계는 우리에게 그 거대함 자체가 아닌, 조그만한 구슬에 비춰보이는 세계. 손안에 담긴듯한. 비유의 언어는 잠시 맺히는 비눗방울로 세계를 둥글게 투영하고 잠시보인 세계의 전면을 일렁거리며 우리는 이 곳을 유희한다.

그렇기에
카페에 앉았던 내가 창밖의 롱샴가방을 든 남자를 보며 조금 놀랐다가 곧이어 그가 여자와 팔짱 낀 것을 보고 '아, 여친가방을 들어줬군.'하고 납득한 뒤에 '그런데 남자가 롱샴매면 또 어때' 까지 생각했다고 치자. 하지만 조금 뒤에 나를 만나러 카페에 온 친구가 자리에 앉자마자는, '나 방금 롱샴 맨 남자를 봤어. 이상하지 않냐' 하며  웃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내 말을 홀로 있고 싶은 뒷자리 남자가 듣고선 남자가 롱샴들면 뭐가 어떻다고 웃음꺼리 삼는지 하며 나를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전통적 굴레에 매인 배타적 인간으로 여기는 그런 상황이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그런 사람만은 아니다.
당신도 역시 그런 사람만은 아니다.

자는 것

입술은 복합적이다. 코도아니고 턱도아닌 상태.

20120808-나는 김밥을 좋아하지 않는데 (10/9 부분 수정)

어떤 것이 많을 때, 그것의 천국이라고 이름 붙이곤 한다.
혹은 그것과 밀접한 관계-그것을 필요로 하는 상대의 천국이 되기도 하고,
예를 들어 도토리가 되게 많다면
도토리천국이라 하거나, 다람쥐천국이라 하는거지.

예외로 생각나는 것이 길가며 스쳤던 낚시용품점 간판인데, 붕어들의 천국이라 적혀있었다.

붕어들의 천국.

붕어 낚는 도구가 잔뜩한데 붕어들의 천국이란다.
뭐 사실 이런 혼재야 돼지고기 집의 간판에 요리사복을 입은 돼지라든가,
치킨집 상표에서 닭다리를 들고 웃는 닭 그림으로 흔하니 다시 짚어 길게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붕어들의 천국이 특히 거슬리는 것은 낚시라는 행위 때문인데,  낚시는 그러니까 사냥이고, 사냥은 돼지고기나 닭고기 식품을 사는 것과 느낌이 아주 다르다는 것. 그것은 붕어의 죽음과 맞닿아있는 것. 그리고 붕어들'의' 천국이라고 함으로써, 빼앗긴 뭔가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낭만을 담아 묶어버린 것. 뭐 이차저차해서 매우 불편하다.

천국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편한대로 사용되므로,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마구 쏟아져 그것들을 맞춰보는 것이 즐겁다.

내가 입시를 할 때 깁밥은 1000원이었다. 참치김밥과, 일반김밥사이에 매번 고민했었다.
참치김밥이 입에 월등한데, 가격도 월등하니까 좀 고민을 했던 거다.
입시학원이 있던 주엽역 근처 김밥집은 두 곳이었지만 나는 다 한 가게였는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김밥천국과, 김밥나라로 달랐더랬다.
천국이든 나라든 김밥집은 주홍색 간판에 즉석김밥 1000원 이렇게 써있는 식의-
워낙 비슷한 인테리어에 비슷한 메뉴이니 구별 못할만 하다.
그런데. 김밥천국과 김밥나라.
천국과 나라를 구별 못했던 점이 또 재미있다.

두루뭉술하게 엮어놓고, 재밌다! 하는 것도 좋지만 자체동력으로 글쓰는 만큼 스스로를 견인해서 좀 물고늘어져보자면.

김밥천국은 1995년 인천 주안동에서 시작되어, '김밥천국'과 '정 김밥천국 즉석김밥since 1995'를 등록상호한 곳이 원류인 것으로 결론지었다.*
*특허정보넷 kipris.or.kr 키프리스에서 확인

찾아본 바대로라면 김밥천국은 기업이 아닌 개인 음식점으로 시작, 성공하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경영비법을 알려주며 점포를 늘려가다가 김밥천국으로 상호를 통일해 프렌차이즈를 발족시킨 경우이며
김밥나라는 찾다보니 동일 상호를 사용하는 곳이 워낙 많고 시기가 섞여있어 원류가 헷갈리고 그러다보니 결국엔 재미가 없어져 그만 두지만 천국 다음임은 확실한데
그러니까 김밥 프렌차이즈는 김밥천국의 성공에 의한 줄타기로, 프렌차이즈 기업들이 줄줄이 런칭한 것이 대부분인 것. 천국이 나라보다 먼저인 것만 아니라 신의 천국 이후, 맘몬이 천국과 유사한 모습을 띈 나라를 발족시켰다고 뭉뚱그리면. 역시나 재미 덕에 아찔해진다.
천국과 나라를 구별 못하는 것은 맘몬의 나라가 천국을 충실히 모방했기 때문인 셈이 되고말이다.

천국은 죽은 뒤에 가는 곳이지만 이렇게 상호로 사용되는 천국은 사후세계보다는
지상낙원에 가까운 느낌으로, 그 곳은 몸을 가진채 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곳이 된다.
가끔의 우스개로, 천국엔 가고 싶지만 죽고 싶지는 않다. 뭐 이런.
분명히 죽음이 전제되야할 천국조차 현실의 우리가 편할 수 있는 곳으로 상상하는 이 것은.
천국의 나라로의 도래이자 맘몬의 우세이다.

...

사람이 죽어 흙이 되고, 그 흙에서 시금치가 자라서 김밥으로 말리면,
현재 내 상태에서 그 김밥은
돈에 팔리고 만다.

그것을 먹고 튼튼히 살아갈 사람을 기대하지 못하고 자꾸만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
팔려나가고 만다.
이건 재미가 없다.
나는 김밥을 좋아하지 않는데.


너는 거울 볼때도 그런 표정일거야.
그리고 나는 그런 표정이 아주 좋아
너 눈을 그릴때 아찔아찔했어.

그렇게 멍때리면 좋고만다




당신 눈이 징그럽게 큰 게 송아지 같아.
당신은 이마부터 턱까지 골격을 그대로 드러내네, 당신 뼈만큼만 솔직해봐.
당신 휜 코를 그리다가 나도 휘어버리는 줄 알았어.
정신이 말이야.
알아. 한 잔 했지? 늘 그렇듯이?



강한빛에 눈꺼풀은 꿈찔대고
이빨이 입술을 밀어내며 비죽히
지금 웃는지도 모르지

20120729-페이스 북에 관해서


#좋아요

 1.
예를 들어서 내가 글을 삭제하면 지인님이 글을 삭제했다고 뜨거나
좋아요를 취소하면 지인님이 좋아요를 취소했습니다-의 메시지는 알림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변화이되 업데이트는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마이너스 변화 - 비긍정 활동 - 밝고 명랑한 소셜네트에 어울리지 않음

...업데이트를 알림으로 받게되면,
업데이트 외의 것을 능동적으로 찾기 더 어려워진다.
편리한 시대엔, 제공된 편리함을 벗어난 활동은 적어질 수 밖에 없다.

사실 우리 모두 글을 삭제하고 좋아요를 취소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활동이 알림되지 않는 이 구조를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묵인되는 활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고,
그것을 느끼기가 조금씩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내 경우 그러한 감은 불안과 함께 오는데,
어쩌면 다들 비슷한지 모른다.
우리는 좋아요로 대표되는 긍정활동과 그것에 반대되는 교감 역시 필요로 한다.
그것이 없는 이 공간이 불안하다.


2.
-님이 내 상태를 좋아합니다
-> 이런 걸로 얻는 위안이 안타깝다.


3.
좋아요 누르면 후원된다는 부류의 게시물을 보면
...
되게 복잡한 모르겠는 기분이 든다.

1 like is 1$ 같은 것.

넷상에서 달성되는 과업이란 이런 것이기 쉽다.
클릭하면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글을 볼 때마다
복잡해지는 마음을 어떻게 다룰 수가 없다.
이를테면,
생존장치를 매달고 온전치 못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타인의 사진.
사진은 어떤 상황을 따로 떼어 그 것 하나로 존재하게 한다.
전후 문맥 없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이 어떻게 얼마나 아픈지,
어떻게 이 사람이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상황에 오게 되었는지,
이 후원이 이 사람을 위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 수 없고,
그저 '좋아요'를 클릭하기만 유도 받는다.

그런 게시물이 불편한 이유
이미지를 통한 즉각적인 반응만을 자극받는 데서 오는 불쾌함이다.
그런 이미지는 우리 시각의 통점을 자극하는데
할 수 있는 것은 클릭을 하냐 마냐밖에 없다.

...
글을 쓰면서 뭔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든다.




당신은 살짝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 했고,
고개를 살짝 틀었기 때문에
눈도 코도 입술도 조금 더,
나는 그 너머를 그리고.



이 오르막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뭔가를 웅얼대다 천장을 보면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말도 잇지 못하고
상대는 가만히





척추 휨 보정기를 한 사람

20120710-받침에 관해서

엉망이다. 뭐가 엉망이냐면,
''''이만나 완벽하게
연달은 'ㅇㅇ'받침을 발음 하며 표정이 멍청(연달은 'ㅇㅇ'의 또다른 멍청한 예)해져선
호소적 성격을 띈다는 건데, (이건 성급한 일반화임, 그러나 호소하고 싶다고 치자. 지금 그러니까.)
정말 끝내주는 말이다.
엉망이야. '진창'까지 붙일 필요도 없어.
징창이라면 모를까.
..엉망징창..중국말같네. '어머진짜' 같기도 하고.
 
생각을 훌쩍 뛰어서- 넘어가자.

받침들은 정말로 사랑스럽다.
예를 들어 치솟다 할때, ''을 보면, 정말. 솟아나오는데 딱인 조합이지?
합하다도 그래, . 하고 나면 입이 딱 닫히잖아. 그렇게, 합해지는거야.
이런 글자들을 찾자면..
수많은 예외들 중 조건에 맞는 녀석들만 떠올라 끼워맞춰지고 마는데
그러나 그 조건에 맞는 예들이 너무 설득력있어서
그 재미에 기뻐져.
많은 혼돈 속에서 뭔가 제대로 들어맞는걸 찾은 듯한 기쁨.
퍼즐 맞추기 같지.
그래, 사는 건 퍼즐 맞추기에 다름없어.
조각이 멀리 있거나, 혹은 비슷한 조각들만 넘쳐나거나하는..
의식하고 조각을 맞추기 시작했을때의 조건이 너무나 달라도
우리는 한 몸으로 하나의 사건을 접하며 그것의 조각을 주워들지.
그렇게 내 세상을 지어가.
어느 곳에 맞출지 헤매면서..


, 그래서 연달은 'ㅇㅇ'받침의 다른말은 양갱정도인가?
좋아. 이렇게 말해보자.
양갱은 멍청하고 싶을 때 먹는 거라고말야. 그 달달함에 뇌가 '리을리을'해지라고.
엉망이지? ^^
난 좋아. 

2012.07.03

정대세선수 결혼 뉴스에 선수복 들고 있는 거 멋있어 보였다.

강백호가 내 최고의 순간은 지금입니다 했을때와

인문수업듣던 친구에게 대학강사님이
자기 최고의 순간이 언젠진 모르겠는데 이미 지난 것은 확실하댔던 얘기가 생각난다.


백호의 경우 멋있기도 했지만 겁나기도 했다. '불나방'성을 더 강하게 읽어서.
그런데 불나방도 탈피를 걸쳐 성충이 된 거잖아?
그러면 이 대학강사님은
탈피를 안했거나 탈피를 했더니 꿀벌이 아니라 꽃등에여서
끝까지 꿀벌은 되지 않은거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꽃등에를 보는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사를 식물이나 벌레에 비유해놓고 혼자 씁쓸해 하는 거 그만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 사실 그만하고 싶지도 않다. 혜안을 얻을 것 같아서. 근데 혜안보다 먼저 우울의 늪에 늡같이 빠지는게 문제,

생각은 파고 들때 우울해지고, 펼쳐나갈때 긍정적이게 된다는 점이 좀 재밌다.
이 경우에 펼쳐나가려면 잠을 많이 자두었어야 함.

아무튼 정대세 선수 부럽다. 슬램덩크 다시 볼까보다. 산왕전부터.

발 담그고 있을 때 그래도 소중했던 나의 웅덩이.

발 담그고 있을 때 그래도 소중했던 나의 웅덩이.
빠져나온 지금 그 웅덩이를 멍하니 응시하며
저 흙물들이 나의 소중한 책이었고 의자였고 빵이었고 음료였던가 한다.
여전히 그것이 책이며 의자며 빵이며 음료인 사람들.
-내가 경멸한다면-

-아니다-
누구나 책이며 의자며 빵이며 음료를 자기의 웅덩이에서 끄집어낸다.
흙물 웅덩이에 가만히 앉아 맑아짐을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것.
나는 나의 맑은 웅덩이를 찾아 헤매며 여러 웅덩이의 흙탕을 참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고 그 시간의 때가 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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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유지되는 척추에 가까스로 걸린 머리, 고개는 수그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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꽹과리 친다. 농사를 앞두고 지신 밟는다 했다.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