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오도구. 폰에 열중한 외국인
고개 숙인 얼굴은 보며 그리기도 맘편하고 특색있기도 하다

2013. 3/2?


댓글 기능을 살렸습니다. 글만 올리니 영 쓸쓸해서.
You can write the reply on my blog. Thanks!

2013. 3/22_세상은 요지경을 통해

최근 신신애씨가 부른 '세상은 요지경'을 찾아 들었다. 어릴적 텔레비젼을 통해 보던 가요무대류의 방송에서 기억하는 노래 중 하나인데 당시 히트곡이어서 그렇기도 하갰지만 신신애씨의 목소리가 아주 요지경해서 그 목소리로 부르는 짜가 짜가가 몹시 인상깊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사는 이러하다.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산다
야이야이 야들아 내 말 좀 들어라 /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인생 살면 칠팔 십년 화살 같이 속히 간다 / 정신 차려라 요지경에 빠진다
싱글 벙글 싱글 벙글 도련님 세상 / 방실 방실 방실 방실 아가씨 세상
영감 상투 삐뚤어지고 / 할멈신발 도망 갔네 허
요지경은 속에 그림필름이 장착되어 볼록렌즈를 통해 확대해 볼 수 있는 장치를 말한다. 관광지에서 주로 판매하던 플라스틱 카메라모양의, 버튼을 누를때마다 뷰파인더를 통해 사진이 바뀌는 그런 장난감. 그리고 이해불가한 일이 벌어지는 세상을 칭할 때 쓰인다. 이해불가 세상을 말하는 요지경을 생각하면 나는 요지경의 발음을 늘려
요 지경-요런 지경-이러한 지경을 상상하고
그러한 상상에 신신애씨의 노래가 더해져서 내게 세상이라 함은 '짜가가 판치고 있는 지경'의 줄임말이 되곤 했었다. 그러면 이어서 괴로운 기분이 들곤 했는데 세 가지 이유로 요약해 볼 수 있다. 노래 가사에서 세상에 짜가가 판을 친다는 것은
1오리지널을 보기 힘듦에 대한 개탄일까,
2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나와 무얼 해도 짝퉁이 되기 쉬움을 개탄일까,
3아니면 오리지널이 대우받지 못함을, 짜가라도 자본이 있다면 오리지널의 대우를 받음에 대한 개탄일까. 하는 것이다.
 
앞서 글머리에서 최근에 신신애씨의 노래를 찾아 들었다며 얘기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사실 2012년 12월즈음이다. 글을 마무리 짓는 지금이 벌써 2013년 3월로 4개월여의 간극이 생겼다. 그래서 글의 방향도 크게 바뀌었다. 앞서의 괴로운 기분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기 때문.
1, 세상에 판치는 것은 짜가일 수 뿐이 없다. 오리지널은 원천이기에 순수한 드묾 자체이다.
2, 내가 하려는 거 이미 다른 사람이 다 했다라는 탄식인데, 오리지널이기위해 무언가를 하려하는 태도자체의 문제라고 일단락.
3에 대해선 인정했대도 통탄스러운 사실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리지널을 원한다고 하지만 감식안이 부족하거나 시간이 부족하여, 오리지널을 소개 혹은 제시 받는다. 그들이 제시받는 쉬운 통로는 자본이 번쩍번쩍하게 닦아 놓았으므로 자본이 소개하고 제시하는 것을 오리지널로 여길 수 뿐 없다. 그러니 자본이 없는 오리지널의 원천자는 자기만족만이 약속된 대가이며, 고로 자족하는 도를 닦거나 아니면 유유상종무리에게 위로를 받거나 자기가 착각중인가 하며 괴로워하거나. 오리지널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삶에 있어서도 원천자의 태도를 지녀야한다.
애초에 나는 '세상은 요지경'이 오리지널을 그리워하며 짜가를 탄식하는 노래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개탄이라고 여긴 것은 내가 치우친 방향 때문이었고 가사가 말하는 것은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살 뿐이다라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 잘났단 평, 못났단 평 모두가 짜가 속에 있는 태도이다.
 
가사를 맡은 조명암은 시인이자 작사가로 일제강점기 시절의 1913년 출생했다고 한다. 신신애씨의 앨범은 1993년에 나왔지만 작사가가 1948년 월북을 했으므로 35세 전에 쓴 가사일 것이다 라고 추정하며 연보를 더 검색해보았다. 언제 쓴 가사인지는 역시 모르지만 오히려, 신신애씨의 '세상은 요지경'이 1939년 김정구가 부른 '세상은 요지경'에 대한 표절시비에 휘말린 것을 알게 됐는데 1993년 앨범이 발표되고 몇달 뒤의 기사로 그때분들은 꽤 아는 이야기인 것 같다. 신신애씨측은 어릴 적 들은 노래를 기억해가며 새로 쓴 것으로 표절은 아니라고 대응했다고 하며 그 후의 이야기는 알 수 없다. 이렇게 되고 나니 가사를 새로 검색해야했고, (앉은 자리에서 이 모든 정보를 찾을 수 있다는 것에 조금 경악했지만 기쁘다..) 앞서 알던 가사가 너무나 짧아 아포리즘격이라 아쉬웠는데 이번에 알게 된 원곡 즉 오리지널^^의 가사는 길고 기니 좋다. 오리지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요지경 속이다 요지경 속이다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생글 생글 생글 생글 아가씨 세상/벙글 벙글 벙글 벙글 도련님 세상
얘 얘 얘들아 내 말 좀 듣거라/얼굴이 잘나면 잘나서 살고
못난 사람은 제 멋에 산다/얼싸 음마 둥개 둥개 아무렴 그렇지 둥개 둥개
싸구려 판이다 싸구려 판이다/세상은 싸구려 판이다/
찰랑 찰랑 찰랑 찰랑 막걸리 술잔/지글 지글 지글 지글 매운탕 안주
얘 얘 얘들아 내 말 좀 듣거라/곱배기 한 잔에 웃음이 가득
삼팔 수건에 추파가 온다/얼싸 음마 둥개 둥개 아무렴 그렇지 둥개 둥개
물방아 속이다 물방아 속이다/사랑은 물방아 속이다
둥글 둥글 둥글 둥글 뜨내기 사랑/뱅글 뱅글 뱅글 뱅글 뚝배기 사랑
얘 얘 얘들아 내 말 좀 듣거라/홀애비 사정은 과부가 알고
처녀 사정은 총각이 안다/얼싸 음마 둥개 둥개 아무렴 그렇지 둥개 둥개
<세상은 요지경 : 노래 김정구 >
 
-관련링크
경향신문_1993.9.22일자 '세상은 요지경' 표절시비 기사 http://bit.ly/ZDskHw
디씨인사이드_'세상은 요지경, 그래도 원조는 있다.' 이준희 글  http://bit.ly/ZQCP9y
위키피디아_작사가 조명암  http://bit.ly/WYAsoo
남인수 블로그_김정구 노래의 '세상은 요지경' 가사 및 듣기 http://bit.ly/Xudbpu

In the Louise bourgeois's works



저는 지금 베이징에 있습니다

베이징에 왔습니다! 여긴 인터넷이 제한적이에요. 일부 SNS나 구글로 들어오기 힘듭니다. 그래도 베이징 좋아요. 사실, 서울 같아요. 지금 올리는 그림은 798지구에서 본 루이스 브루주아의 작업입니다.
I am in Beiging! I feel Beiging like a big Seoul. I will return to korea on 18 or 19th march.

포켓몬스터 주제가에서 출발



동생과 포켓몬스터 주제가를 부르다가 성장기 넘치는 어린이의 에너지를 건강하게(?) 소모함으로 바른 교육과 사회적 성장을 시키려는 목적의 만화영화를 통해 결국 어른이 제시하는 재미가 가진 필연적인 한계인 '높은 사회 위치에의 욕망'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오프닝 곡인 '모험의 시작'. ', 이제 시작이야'로 더 많이 알려져있다. 그 중 살필 가사는 아래와 같다.
'언제나 어디서나 피카츄가 곁에 있어 약할때나 강할 때나 피카츄가 곁에 있어. 너와 나 함께라면 우린 최고야'
포켓몬스터는 자연의 특정속성을 다루는 능력을 가진 포켓몬스터가 동물처럼 존재하고 그 포켓몬과의 대결을 통해 이기면 몬스터볼에 가둘 수 있어서 그렇게 가둔 몬스터와 주종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부 설정을 살펴보는 것은 이 글에서 의미가 없고, 단순화를 해보면 이렇게 된다.
포켓 몬스터는 자연을 다룬다.
 →인간은 포켓 몬스터를 다룬다.
  인간은 포켓 몬스터를 이용해 자연을 다룬다.
고로 포켓몬스터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포켓몬이라는 매개체를 사용해서 재미를 주며 풀어낸 만화이다. 주인공 한지우가 여행을 통해 만나는 여러 군상을 통해 소개되는 몬스터와 주인의 관계는 인격적이기도 하고 비인격적이기도 하며, 일대일이기도 하고 일대다수이기도 하다. 포켓몬을 획득하고 사육시키는 목적 또한 애완이기도하고 투자, 투기이기도 하다. 인간과 포켓몬 둘 모두 트라우마를 가진 경우도 많아, 서로의 관계가 그것을 해소시키기도 강화시키기도 한다. 지우와 피카츄는 매 회마다 그런 많은 관계들을 만나고 그들과의 만남이 각자에게 변화의 계기가 된다.
인간과 포멧몬의 주종관계는 앞서 말했듯이 대결을 통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주인공인 지우와 피카츄에겐 남다른 스토리가 있는데 지우가 피카츄를 '갖기 위해'에서 지우가 피카츄와 '함께하기 위해'로 변한 과정이 그것이다. 함께하는 것이 이상적인 동료 관계임은 여행을 통해 많은 다른 관계를 접하며 점점 확실해진다. 사실 포켓몬스터의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권리부분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생명과 자유의지를 가진 동물을 몬스터볼이라는 공간에 가두니 말이다. 지우는 피카츄를 몬스터볼에 담지 않고 함께 돌아다니는데, 그것은 개성강한 피카츄를 존중해서이지만 나중에 피카츄가 몬스터볼에 들어가는 것에 순응했음에도 여전히 지우는 피카츄를 풀어둔다. 물론 지우와 다른 사람들만 화면에 줄창 나오다가 싸울 때만 피카츄를 꺼냈다면 애니메이션의 인기는 반 토막 났을 것이란 현실적인 이유가 있지만 차치. 차치한 김에 각설하고. 포켓몬스터는 자연과 인간 공존관계의 이상향을 제시하는 만화인 셈이다.
모양과 성격이 다양한 여러 포켓몬 중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피카츄는 현실세계의 설치류와 비슷한 종류로, 공격형 포켓몬 중 전기속성을 가졌다. 피카츄는 외상으로 드러날 정도의 전기 충격을 가할 수 있는데, 100만 볼트라는 공격명칭은 과한 액션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기는 피카츄의 빨간 두 볼에서 시작되어 꼬리를 통해 일정한 방향을 향해 방전되는데, 주로 공격을 하지만 일상생활 충전용으로 쓰기도 한다. 전기는 인간이 다루는 에너지 중에서도 근대적인 것이다. 화력-불 포켓몬인 파이리와 수력-물 포켓몬인 꼬부기가 각각 공룡과 거북이로 고대의 느낌이라면 피카츄는 유일하게 털 달린 포유류로써 좀 더 근대적인 생명인 것은 참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더 친근하고, 친근함은 더 근대적이란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야생. 주인이 없는 포켓몬은 야생-즉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으로 배척받는다.
전기가 필요한 마을에서 피카츄와 지우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에피소드가 있던 것이 기억나는데, 에너지를 다루는 인간은 이와 같이 높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자. 따라서 전기속성 포켓몬이고 인간과 친근한 이미지의 피카츄는 자신의 주인인 지우와 함께일 때, 그리고 심성 고운 어린이인 지우는 에너지를 가진 포켓몬을 소유함으로써 서로가 높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까 살핀 이 가사
'언제나 어디서나 피카츄가 곁에 있어 약할 때나 강할 때나 피카츄가 곁에 있어. 너와 나 함께라면 우린 최고야'
는 어른이 제시하는 세계에서 최고가 되고 싶은 열망은 에너지(자본)를 소유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함의하는 것이다. 만화를 통해 어린이들은 자기의 힘을 강화하고 싶다는 성장욕구를 포켓몬을 소유하는 것으로 가능케 하려는 욕구를 갖게 된다. 따라서 만화의 스토리가 지우와 피카츄의 인격적인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바른 성장을 돕고 싶다는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장 먼저는 소유욕을 자극하는 것이고, 소유하거나 소유하지 못하거나를 딛고 다음단계로 넘어가는 장을 벌리게 된다.
이쯤 되고나니, 이것은 포켓몬스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란 걸 알 수가 있다. 애니메이션이란 매체가 자본을 향해 기획되어 있으며 그 말은 즉 만화는 이미 투입보다 큰 시장성이 포함되어있다는 것. 어린이를 소비시장의 중요 요인으로 보고 활발하게 움직인 것이란 말이다. 파워레인져의 로보트, 우리는 챔피언의 미니카, 세일러문의 변신 봉, 유희왕의 카드, 드래곤 볼의 탈색약^^. (통키의 피구공이나, 슛돌이의 축구공이 친근해지는 순간이다.) 아동 컨텐츠의 풍성함은 아동을 대상으로 한 시장의 짭짤함과 함께 간다.
많은 애니메니션은 오프닝곡과 앤딩곡이 다르다. 포켓몬스터의 앤딩곡 우리는 모두 친구Imagine만큼 이상적이니 음악을 들으며 다시 만화는 동심을 위한 것이라는 낭만주의적 생각으로 마무리 지을까.

피카츄 라이츄 파이리 꼬부기 버터플 야도란 피죤투 또가스 서로 생긴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모두 친구

해맑음 속에서 맥이 빠지는 이유는 늘 비슷한 것 같다. 이상을 크게 울려퍼지게 하는 것이 커다란 스피커라는 것.
관련 링크
오프닝 '모험의 시작' 듣기
엔딩 '우리는 모두 친구' 듣기

월간이리 3월호 시스토 로드리게즈

월간이리13년 3월호 시스토 로드리게즈, 2013
월간이리 3월호 바로보기


연재를 시작하기 전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예술가 12명을 쓰고그리면 제 예술관이 복음전파급으로 드러나버릴 거란 반 우스개 말을 했었는데 이번 글에 제가 지향하는 바가 가장 드러난 것 같습니다. 할 말 다한것 같은데 앞으로 9명 어쩌지...
글 전부를 올립니다, 위의 링크로 보시면 다른 글들도 보실 수 있습니다.




시스토 로드리게즈 (Sixto Rodriguez)
 
작년 11월에 홍대 상상마당에서 서칭 포 슈가맨이라는 다큐영화를 관람했습니다. 글 전개 차원에서 그 내용을 살짝 읊으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다큐멘터리 후기처럼 된 이번 글입니다.
서칭 포 슈가맨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50만장이 팔린 앨범을 낸 유명 가수 로드리게즈를 찾는 내용의 다큐멘터리입니다. 그렇게 유명한 가수를 어떻게 찾으면 다큐감이냐 싶겠지만 로드리게즈는 유명한 무명인이었습니다. 앨범이 나온 당시인 1970년대의 남아공은 정치적으로 몹시 보수적인 상태로 정부에서 문화를 통제하던 시기였습니다.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가사의 자유로움으로 인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으나 외려 저항음악으로 더욱 더 알려지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다큐의 표현대로라면 남아공에선 전축이 있는 집이라면 대부분이 로드리게즈의 앨범을 가졌으며 그 인기는 미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앞서 유명무명 했다시피 로드리게즈가 현재에 어떻게 지내는지는 물론 당시에도 어떤 인물이었는지 남아공의 아무도 몰랐습니다. 로드리게즈는 앨범만 남긴 가수였기 때문인데요. 앨범으로 돈을 벌었을 음반사의 행방자체가 묘연하고 팬들 사이에 그나마 있는 루머는 모두 로드리게즈가 진즉에 죽었다는 얘기로 연달은 공연 실패로 인해 자살’, ‘공연 중 관객에게 인사를 고하고 자살’, ‘약물 과복용으로 자살등등이 있었습니다. 로드리게즈의 빅팬이었던 시거맨은 그토록 인기 있던 가수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사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음에 놀라워하며 그를 찾기 시작했는데 로드리게즈의 노래 가사에 적힌 지역명을 힌트로 남아공이 아닌 미국, 디트로이드를 추적해냅니다. 그래서 밝혀진 사실은 음반이 처음에 미국에서 발매되었다는 겁니다
미국의 음반 제작자는 디트로이드의 허름한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한 남성의 음악이 참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는데 그가 바로 로드리게즈였으며 담배연기 자욱한 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사는 곳은 어디인지 어떤 일을 하며 먹고사는지 모두 알 수 없었고 다만 정처 없는 일용직 노동자 정도로 살았으나 그는 진짜 예술가였다는 평을 합니다. 음반을 냈으나 성공하지 못한 채 거의 무명과 마찬가지로 끝을 냈는데, 그들은 로드리게즈의 실패에 아직도 납득하지 못한 채로 멕시코 출신임이 너무 분명한 그의 이름 때문에 미국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게 아닐까 말합니다만 여하튼 음반이 실패하고 계약도 마친 뒤 로드리게즈는 음악가로 다시 활동하지 않았고, 그 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 또한 미궁인 채였습니다
시거맨은 로드리게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웹사이트를 열어둔 상태였는데 그로 인해 한 여성의 연락을 받게됩니다. 그녀로부터 자기 아버지가 당신들이 찾는 로드리게즈인 것 같다면서 자기 아버지는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듣죠.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시거맨은 로드리게즈가 미국 디트로이드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고 네 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로 살고 있다는 것과 남아공에서 자신의 음악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았는지 모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긴 시간의 노력 끝에 로드리게즈를 발견한 시거맨과 다른 사람들은 열광하며 남아공으로 그를 초대하고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남아공에 도착한 로드리게즈의 딸들은 그때까지도 아버지의 음악적 성공에 대해 확신할 수 없던 나머지 자기들끼리의 대화로 공연장에 20명만 있으면 다행이겠다고 했다 합니다. 그러나 축구장만한 공연장에 심지어 가득 차기까지 한 관중은 로드리게즈가 무대에 등장하자 열광을 멈추지 않아 10분간 곡은 시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로드리게즈와 무대에 선 밴드멤버들은 그가 너무 많은 관객 때문에 주눅이 들면 어떡할까 걱정했지만 음악이 시작되자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고, 로드리게즈는 완전히 준비되어있었으며 무대에 선 그는 완벽히 그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이 너무 멋졌습니다. 그 자신으로 완전히 준비되어있음이 말이죠. 그가 갈고 닦여있음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던 것이고 외부의 요인은 기회가 오느냐 마느냐인 것인데, 그가 갈고 닦여있지 않았다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겠죠
로드리게즈는 정말 그야말로 군자입니다. 공자 말하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다른 이가 알아주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음(혹은 역성내지 않음)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했으니 말입니다. 많은 분들에게 그렇듯 저 또한 이 구절이 좋아 종종 떠올리게 되는데요. 능력을 가졌음을 인정받아 합당한 자리 앉아서 뜻을 펼치고 길이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바람은 천하통일의 영웅이 필요했던 시대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으며 사는, 자기가 평가하는 자기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외부에 성내지 않고 삶은 자기가 추구하는 바를 향한 이러한 사람을 만나면 기쁩니다. 자신의 절대값으로 산다는 것은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최고로 건강한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모두 다른 역량과 조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남과의 비교를 통한 것이 아닌 자기다움을 제시할 수 있는 것 아닌가하는 마음으로 그러니까 진정 자기되기를 추구하는 과정에 자신을 두는 것. 너는 어떠한 뭔가가 되기보다 너 자신이 되라고 말하는, 그래서 전 너 자신을 알라가 그런 시작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관객의 열광이 멈추지 않았던 10분간, 그 순간을 그가 삶의 보상으로 여길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 기뻐했음은 분명합니다. 그 열광 뒤에 그는 관객에게 ‘Thanks for Keeping me alive.’라고 말했으니까요. 음악적 삶에서 보상을. , 보상이란 말은 그간의 무명이 마치 인정을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므로 선물이라고 고치겠습니다. 음악을 통해 예기치 못한 선물을 받은 이의 감사함이죠.
사람들은 예술을 하는 이에게 창작을 한다는 그 신비로움으로 인해 주목을 하고 영향을 받습니다. 물론 유명세에 따라 다르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미칠 영향력이라면 건강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삶을 사는 예술가이기를 바랍니다.
로드리게즈를 찾는데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시거맨은 로드리게즈를 찾은 뒤로 자신은 음반가게를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함께 로드리게즈를 찾아낸 다른 사람들의 삶은 크게 바뀌었으나 정작 로드리게즈 자신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딸도 아버지는 콘서트 수익금을 주변에 다 나누어주고 여전히 그전처럼 살고 있다고 하고요. 그는 본디부터 자기로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현림 시인의 시 '지금 필요한 것' 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 시의 일부만 발췌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며 부디 꼭 찾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완벽한 생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묵묵히
두더지처럼 깊이로 사는 당신 얘길 듣고 싶다
당신 손에서 목수의 손을 본다
나무와 톱 망치와 못을 다스리는 손
사려 깊은 손, 뭐든 일으켜 세우는 손, 그 진지함을
일용직 노동 중에서도 남들이 피하는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로드리게즈는 제게 그러한 손을 가진 목수로, 완벽한 삶을 요구하지 않고 자신으로 산 개인입니다. 자기 자신이 되기에 힘쓰며 자기를 세우는 삶을 살고 그를 통해 타인 또한 세우는 사람인 개인을 존경을 담아 사랑 할 수밖에 없습니다.
 





3월 맞이 text



3월이 되었다. 금요일을 삼일절로 쉬고 주말 쉬고 해서 월요일인 34일이 학교 오프닝이었다. 그에 발맞춘 시즌 뉴스로 새학기 증후군 기사가 몇 개 나왔는데, 모 취업 포털의 설문에 응한 대학생 60.7%정도가 새학기 증후군을 겪었다는 거다. 새로운 인간관계에 대한 걱정이 제일 큰 이유라고 한다.
매해 낯선 동년배들로 물갈이되어 생활하는 것은 도시학교에서만 가능한 체험이지 싶다.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해 초등학교로 졸업할 때까지의 6년간 1반만 해봤는데, 그것 참 신기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적당한 시골에 있어 반이 하나였던 작은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선 교회도 하나, 학교도 하나, 슈퍼도 하나, 시장은 멀고.
인구 밀집의 도시만이 공동체 내에 수많은 동년배들을 데리고 있다. 사람이 많아야 서로 모르는 것도 가능하다. 관계의 낯설음은 새학기를 맞은 학생에게 크게 다가오더라도, 사회구성원 대다수또한 겪기는 마찬가지다. 도시 인구과잉은 3월만의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학기 증후군이라는 뉴스는 학생들의 힘듦을 존재하는 실체로 대해줬다는 면에서 공감이나, 위안일까? 그래도 학생 때가 좋다는 일축을 하게 할까어떠한 반응이든 도시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끊이지 않다는 증거로, 도시는 계속해서 바이탈을 체크 받고 결과는 언제나 길게 출력되어 나와 기사화 된다. 그런 기사는 뉴스라고 하지만 질병 목록과 같다. 질병 목록이라.. 비약이 심했다. 앓는 소리에만 집중하면 사는 곳은 병원과 같겠지만사실 우린 대체로 건강하지 않나.
시즌마다 나오는 이 같은 뉴스는 가볍게 읽거나 제끼는 것이 맞는데 어쩌자고 글을 써가지고.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병든 도시라는 이미지에 집착하고 말았다. 회색빛 도시가 진부한 표현이라면 병든 도시 또한 마찬가진데, 그런 진부한 느낌을 받는 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새로운 태도를 가질 때가 되었다는 것이겠다

르동의 여인 Redon's woman

르동의,










르동의 아이와 여인, 업로드를 위해 쌍방 배치했다.







그림을 바로 볼 때 글이 방해되는 것 같아 많이 띄어서 쓰겠습니다.
아마 르동의 이 두 사람은 르동이 그렸다 외에 교차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린 마당엔 둘을 마주보게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눈이 몹시 피로하다.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가 부럽구나.
아이의 코와 눈의 굴곡을 따라 그린 획이 강해서 치타처럼 보인다.
여인이라고 그렸지만 머리만 묶었지 섬세하게 생긴 남자같다.

반쯤 엎어져서



내가 새라면 둥지를 짓고 내가 곰이면 동굴을 찾을텐데 인간은 왜 이렇게 복잡하게만 느껴지나. 내가 새라면 부리가 약하고 곰이면 텃세가 약할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