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와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한동안 업데이트는 없을 것 같습니다.

월간이리 11월호는 그레고리 콜버트입니다.


심신이 약해져 콸콸 흐르는 물을 보면 귓속부터 괴롭습니다.
시간도 콸콸 흘러 11월이 되었네요.
그레고리 콜버트는 사진을 보면 다 아실만한 유명하고 인상깊은 사진작품을 여럿 남겼으며
지금도 활동중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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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콜버트 (Gregory Colbert)

세상사에 초월한 사람, 몹시 순수한 사람, 이해의 범주에 들지 않는 기인을 표현할 때 동물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그리곤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어린 시절 일화 중에 아무도 타지 못하던 사나운 말을 일순 진정시켜 보인 것, 깨달음의 순간에 새가 찾아와 어깨에 앉는다는 류의 이야기도 그런 것들이고요. 동물을 통해 신의 메시지를 받거나 자신의 권위를 입증합니다. 특히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동물들과 가까운 모습은 그 사람의 어떤 뛰어남을 입증해주고 누구보다 신성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그것은 낙원에 대한 동경과 맞닿아 있을 겁니다. 성경에 보면 이사야의 예언 중 그리스도의 때에는 표범과 새끼 염소가 함께 눕고,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어울리는 사이에 어린아이가 그들을 이끌고, 간난 아이가 뱀의 굴에 손을 넣으며 놀아도 물리지 않을 것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그렇게 야생동물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에는 그러한 것이 낙원이며, 그러한 모습으로 사는 사람은 누구보다 낙원과 가까운 사람이라는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그레고리 콜버트의 사진에서 우리는 그런 낙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코끼리에게 가만히 책을 읽어주고 있는 아이. 치타와 함께 바위에 앉아있는 아이. 하늘에 천을 펄럭이는 사람의 뒤로 독수리가 날고, 고래와 사람이 함께 헤엄을 치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무척 아름답고 볼 때마다 경이롭습니다. 사진의 순간은 찰나라도 화면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영원한 뭔가에 대해 보여주는 듯합니다.

동물과 사람의 어우러짐이라는 요소도 그렇지만 동적인 순간의 포착이든 멈춰있는 순간이든 화면 자체가 무척 아름답습니다. 심도가 깊지 않은 배경처리로 동물과 인간 상호에 집중되어 있는 사진은 몇 가지 요소로 전체를 그려내는 무대와 같고 그 속에 놓인 사람과 동물은 함께 춤을 추거나 대화하거나 생각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용하는 순간 중에서도 가장 극적일 때를 포착해 기록한 듯 리듬이 공유되며, 이질적이지 않고 조화롭게 보입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들이 직설적으로 담겨있죠. 그리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척 동양적이라는 것입니다. 작가는 유색인 모델을 세웠고 그들의 복장은 수도승을 연상시킵니다. 야생동물과 인간, 자연, 동양적인 것들이 어우러진 이미지. 정신적, 영적인 동양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서구식 삶이 놓친 정신적인 낙원을 동양에서 찾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러한 동경과 그리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그러한 야생동물과의 어우러진 모습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고양감을 주고, 그가 보는 것을 나도 보고 싶고, 내게도 동물이 저렇게 다가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 그런데 이 것은 따져보자면 어쩌면 좋게 생각해버리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자연은 우리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울타리를 치지 않으면 금새 잡초와 야생동물이 밭을 헤쳐 놓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과 얼마만큼 먼 것은 우리 삶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야생을 맨살로 대하는 것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초월하기란 삶에서 초월하기와 같습니다. 그러한 삶은 우리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먹고사는 삶을 악다구니로 칭하고 그러한 악다구니에서 벗어난 느낌. 안 먹어도 배부른 기분의 먹지 않아도 더 이상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열릴 것 같은 그러한 기분은 낭만적으로 상상하는 낙원으로만 존재합니다. 그레고리 콜버트의 사진의 그 순간들을 자연스러움으로, 자연스러운 조화로 느끼는 것은 그래서 일종의 착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의 사진들을 볼 때마다 저는 마음이 복잡합니다. 하지만 역시 이따금 찾아 보게 되는 것은. 삶에서는 사자를 목 졸라 죽이는 삼손과 같은 힘을 필요로 하지만, 굶주린 사자굴에 갇혀서도 사자가 헤치지 않는 다니엘과 같은 인물을 더 높은 경이로움으로 대하는 것과 같겠죠.
뭐, 현실에선 삼손과 다니엘 둘 다 보기 힘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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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메인을 맡으렴
내가 좋아하는 얼굴, 여섯_린넨 텍스쳐 종이에 아크릴릭_각 33*41cm_2013

월간이리 10월호는 데이비드 호크니 입니다.


현재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 그림이 와있는 데이비드 호크니가 이번 달의 뒷표지입니다.
별로 안 닮게 그려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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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

우리는 태양빛을 소화하지 못합니다. 비타민 D를 만들어내긴 하지만요. 햇빛을 받아서 단백질을 합성해 내거나 하진 않죠. 식물은 다릅니다. 태양빛을 받아 그들 방식의 소화를 해냅니다. 그리고 우린 그 식물을 먹거나 또 그 식물을 먹은 동물을 먹어 소화할 수 있습니다. 먹이 사슬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고요. 남이 소화한 것을 먹는 것에 대해 말해보자는 건데요. 때로 남의 그림을 보는 것으로 실제를 더 잘 보게 되는 때에 대한 겁니다. 남의 그림을 보는 것으로, 그가 소화해낸 것을 통해 실제를 더 잘 받아들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그린 걸까, 무얼 그린 걸까. 왜 그린 걸까? 하며 나라면 어떻게 표현했을지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려보기도 하구요. 그런 과정에서 표면적으로는 형태를 표현하는 법, 기법에 대한 이해가 높아집니다. 기법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작가에게 온전히 속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표현이란 것이 사실은 재료와 그 기법의 한계에 의한 것일 수도 있음과, 그 한계에 대한 적응 내지 극복의 과정을 깨닫기도 합니다.
본 것을 평면으로 옮김에 있어서의 많은 우여곡절은 그림 그리는 이들에게 지금도 계속 되는 것입니다만, 사진이 넘쳐나고, 인쇄가 손쉽고, 직접 투사가 가능하며, 컴퓨터상에서의 이미지 복제와 수정이 간편해진 지금은 우리는 다른 것을 걱정해야합니다.

‘이미지들은 우리가 과거에 생각했던 현실의 정직한 묘사일까,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미치지 못할 만큼 생생하고 사실적이라고 여겨왔던 사진이 실은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하고 세계를 선명하게 바라보는 우리의 능력을 감퇴시킨 것은 아닐까?’
데이비드 호크니 저 ‘명화의 비밀’ 196p

많은 시각예술가들이 그렇지만 데이비드 호크니를 이야기 할 때엔 특히나 더욱 바라보는 방식, 그려진 방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작업요소로 삼는 작가임을 말해야합니다. 호크니는 1999년부터 서양미술사에 있어 광학기술이 그림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여 2001년 자신의 저서 ‘명화의 비밀 Secret Knowledge : Rediscobering the lost techniques of the Old Masters’에서 밝혔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것으로 앵그르, 카라바조, 벨라스케스 등의 대가들이. 그리고 많은 다른 화가들이 15세기 초부터 광학을 이용하여 그들의 그림에서 인물과 사물의 형태와 양감, 색채의 표현의 정확성을 높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무엇을 그렸느냐, 그들이 본 것을 그렸다. 그러면 그 어떻게 보았는지, 보는 방법에 대해 묻게 되죠. 신고전주의의 대가 앵그르가 그린 인물 드로잉이 무척 작은데도 완벽하리만치 정교한 것을 본 호크니는 어떻게 이렇게 그렸을까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는 결국 많은 화가들이 거울과 렌즈, 강한 조명과 암막을 이용하여 대상을 평면에 투영했고 그것을 손으로 복사했다는 것을 밝힙니다.
사진기술이 없던 시절 실제 같은 그림을 그토록 놀랍게 그려낸 화가들에 대한 경이로 꽉 차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광학을 이용했다는 것에서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일종의 꼼수를 부렸으니까요. 그렇다더라도 광학기술을 도입하여 그린 화가들의 그림이라고 평준화를 이루지는 않습니다, 그림은 여전히 본 바를 손으로 그리는 것이라 잘 보고 잘 그리는 화가만이 뛰어난 화면을 만들어냈습니다.
광학기술에 의존해 가능했던 실제 같은 그림은 그 기법에 의한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카메라의 눈은 하나, 인간의 눈은 둘’입니다.
호크니의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그림은 그의 1960년대와 1970년 초반대의 것으로 주로 로스엔젤레스의 수영장의 풍경과 인물을 찍은 사진을 기반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크니와의 대화를 기록한 마틴 게이퍼드의 저술 ‘다시, 그림이다 Conversations with David Hockney by Martin Gayford’에 의하면 호크니 역시 자신의 당시 그림들을 좋아하지만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방식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것은 카메라 렌즈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사진이 궁극적으로는 실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카메라는 기하학적으로 대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기하학적으로 보지만 또한 심리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내가 저 벽에 걸린 요하네스 브람스의 사진을 본다면, 그 순간 브람스는 문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일 겁니다. (중략)’
마틴 게이퍼드 저 ‘다시, 그림이다’에서 호크니의 발언 중 53p

호크니는 보는 방식을 연구하며 새롭게 그리기 위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으며 그에 기반하여 작업도 계속해서 바뀌고 있습니다. 최근의 실험으론 야외에서 그린 대규모 풍경작업을 들 수 있으며, 현재 한국에 그 작품이 와있는 상태인데요.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Bigger Trees Near Warter’가 전시중입니다. 그림은 12.19m × 4.57m 사이즈의 대작으로, 대략 50호 크기의 캔버스 50점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과천 미술관의 넓은 공간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워낙 큰지라 양팔을 벌린 디귿자 형태로 설치되었습니다. 전시장에는 그림과 함께 A Bigger Picutre라는 60분짜리 영상을 볼 수 있어 영상을 통해 지금 전시중인 그 거대한 회화작품이 영국의 테이트 모던에 기증되었으며, 야외에서 제작된 가장 큰 그림으로 꼽을 수 있다는 것과, 호크니의 작업 방식, 작업에 대한 생각, 생활과 같은 것 볼 수 있습니다. 호크니가 그 작업을 위해 그린 다양한 드로잉을 함께 볼 수 있었더라면 무척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아 아쉬움이 큽니다만, 뛰어난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소화시키고 더 잘-새롭게 보게 되는 면에서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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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9~9/30 동안 이리카페에 그림을 걸어두었었습니다.


지난 9월 9일부터 9월30일의 약 3주간 이리카페에 제 얼굴 드로잉을 걸어두었습니다.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고 작가가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은 채 그림만 붙여두었기때문에 쌀쌀맞다-내지는 무책임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는데, 거기에 대해 말을 붙이자면, 제가 과해지지 않고, 회의감 또한 갖지 않고 그림을 보일 수 있는 방식이라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공간을 빌려준 분에게도 그림을 건 내게도 건강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는 보는 이의 입장을 더 고려하겠습니다.

이리카페는 마포구 상수동에 있는 여러모로 멋진 카페입니다.
각종 문화공연과 전시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며, 흥미로운 서적도 많이 있습니다. 월간이리라는 무가지를 발행하고 있고요.
커피를 기본으로 생과일쉐이크, 차 종류와 기본 칵테일, 병맥주와 생맥주가 구비되있고, 간단 식사, 안주 메뉴도 있습니다. 11시부터 1시까지 영업하며, 올해(2013년)까지는 실내흡연이 가능합니다. 금연구역도 있습니다.

저는 월간이리에 뒷표지를 연재하는 인연으로 비교적 쉽게 그림을 걸어두게 되었습니다. 전시나 대관 문의를 항시 받는 것으로 압니다.

방문하셨던 분들께는 모쪼록 눈과 정신이 즐거우셨길 바랍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