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앞 관극세모

대학 다닐 때 종종 받았던 나 개인에 대한 질문 중 곤란했던 것을 꼽아보자면
너는 남자친구 안 사귀니?(ㅋx100)와,
너는 너희 학교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니? 였다. 

홍대앞, 모두 알다시피 홍대앞은 홍익대학교앞을 지칭하지만 단지 홍익대학이라는 건물 앞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교 앞이 얼마나 번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그리고 그 번화함이 얼마나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름으로. 전자의 의미로 홍대앞을 물으면 얼마든지 알지만 후자의 의미로 홍대앞을 묻는다면 나와는 먼, 내가 알 수 없는 어떠함을 대표하는 이름이 된다.

나에게 홍대앞의 어떠함 : 풍부함과 과잉을 오가는 번화함은 내게서 등 돌린 무엇이었다. 내가 영영 알지 못할 어떤 열심들이 잘나간다는 모양새로 있었고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몹시 힘이 드는-피곤한-여건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저 곳은 뭐하는 곳일까 궁금하다가도 막상 비용을 들여 알긴 벅찼다는 것이다. 일단은 돈. 많이들 그렇듯이 한정된 수입아래서 줄일 수 있는 지출은 식비와 여가비니까 값이 싼 학교 안에서 해결하게 된다. 돈만 비용이 아니다. 돌아다니자면 시간, 감정은 물론이거니와 때론 용기까지 필요하다. 싸이월드에 누군가 올린 맛있어보이는 음식사진이나 멋있어보이는 어딘가를 보면 부러워는 잘했으면서도 막상 가보자는 안 되는 것이 후자의 비용도 한 이유인데 아무튼 그런 고비용을 부담하기에 나는 대부분 부족하였던 거고 그러니 홍대앞에 놀러갈건데 좋은데를 알려달라면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해 장난섞인 핀잔을 받았던거다. 느이 학교앞도 모르냐는 거지. 조금 주눅들기도 했었는데 이제와 보면 학교안에만 있었어도 답답한 걸 몰랐던 것이라 어쩌면 형편은 차치하고 나는 그냥 번화함을 즐길 기질이 아니었지 싶다.

그럼에도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소(와, 있어 보이네, 나 연구원이었음 ㅇㅇ)도 그만둔 뒤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홍대 앞에서 일을 찾았던 것은 왜일까. 하필 밥집일 것은 무엇이며 하필 서빙일 것은 무엇일까. 집 가까운 일산에도 가게는 많은데 영 내키지가 않았던 것은 무엇일까. 

홍대앞이 이 문화 저 문화 돈으로 짜깁기된 가장행렬 놀이동산이라 빈정댔으면서도 내게 등 돌린 풍경이라 여겼으면서도 내 자리를 갖고 싶을만큼 나는 이 별스러운 번화함이 좋았나. 번화함에서 헛헛함을 느끼고 그럼에도 그 번화함의 주변에 박혀있고자 하는 태도를 가졌다. 이를 뭐라해야 좋을까.

가게의 잠긴 문을 열고 오픈 준비를 할 때, 마감을 마치고 불 꺼진 가게 앞에 느긋하게 앉아있을 때, 일하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먹고 마시고 대화하며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몹시 좋다. 내가 일하는 일했던 곳들이 나는 좋고 남이 놀러오는 곳에 일하는 사람으로 있는 것도 좋다.

나는 RPG(롤플레잉게임)의 유저가 되어 게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게임의 NPC(논플레이어캐릭터)이길 바라며 NPC중에서도 상점 직원으로 사람들이 포션를 사거나 장비를 갖추는 모습을 보는 셈이다. 나는 포션도 장비도 갖추지 않지만 그 곳에 있을 수 있다. 포션도 장비도 필요없는 채로 게임의 번화함에 위치하고자 하는 태도. 어쩌면 결핍을 자조 내지 자족하려는 태도에 의해 왜곡된 행태가 아닐까.

결핍에 의한 태도도 태도이고 왜곡되서 자라는 것도 성장이라면 성장인가. 나는 이것이 좋은데 좋아서 좋은가 좋아해야해서 좋은가. 뭣하러 따질까면 그냥 누구나 익히 그렇듯 제대로 못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번화함을 징그럽게 여긴다면서 자처해 번화함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느끼는 만족감에 대해 불안했다. 가장행렬같은 번화함 중에 내가 일하는 곳의 진정함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되는 일은 내게 비약하자면 꽉막힌 중에 구멍을 뚫음과 같다.

가슴이 답답하다 바늘구멍이라도 뚫어 놔야 내 생명이 숨을 게 아니냐
(조지훈/관극세모觀劇歲暮)

이거다.
내가 다닌 학교 앞이 국가적으로 손꼽히는 번화가더라. 끝-의 마인드맵이면 좋았을까. 아니다. 번화함의 구석구석 번뇌거리로 찾는 글썽맞은 인간형일지라도 그러니 더욱 좋아할 구멍을 찾는 것은 필요한 잘하는 일이다.

다만 내가 해결해야할 것은 일을 마친 뒤 절인 부추 같은 채로 집에 와 남겨온 부추무침을 집의 식탁에 올려놓으며 느끼는 심정이다. 음식의 유용함을 유지하는 보람과 유용한 음식을 가족에게 전달하는 보람에도 내가 가족에게 주는 유용함이 이것임에 대한 절여지는 심정.
아, 절인 부추처럼 고단하고 절인 부추처럼 맛있고 그럼에도 절인 부추일 뿐인 삶을 계속 사랑하려고 구멍을 뚫는다. 생명이 와서 쉬었다가 그림을 뱉고 곧바로 번화함에 묻힌다.

언제쯤 제대로 감당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