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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음이 너무 가난합니다.
당신이 저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주저치말고 다가와주세요.

의지와 의사와 뭐 먹을까.


여럿이 밥 때를 맞이하면 서로 너 뭐 먹고 싶어, 너 어디가고 싶어? 하고 물으며 또, 서로 글쎄 딱히...하고 어물거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두고 사람이 우유부단하다 뭐 분명하게 바라는 바가 없냐고 한다면 정확한 지적이 아닌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고파서 먹고자하는 욕구가 무얼 먹을지까지 분명하게 향할 리가 없잖아? 게다가 타인이 뭘 먹고싶어할지의 의사를 배려한다면서 흐무흐무하는 사람들은 우유부단하다고만 할 순 없지 않나. 선택을 별로 안 해보기도 했고.

무리에서 메뉴를 주로 정하는 사람의 몇가지 사고방식이 있다. 항상 욕구가 분명한 의사형태를 띄는 경우, 모두가 맛있게 먹어야한다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 메뉴가 반드시 맛있으리란 확신이 있는 경우. 고르라 해도 고르지 않을 것이기에 하나를 정하는게 낫다는 경우 등등. 그런 분들에 붙여 잠시 말하건데, 이 글은 다수가 원하는 무언가를 고르자며 흐리멍텅하게 되기 쉬운 사람인 나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쓰였다.

사실 어디가서 무얼 먹고자 할 때 타인이 먹고싶은 것을 묻는 일은 '없는 것을 찾는 일'일 공산이 크다. 위에 적었다시피 항상 '먹고자하는 의지'가 '무얼먹을지의 의사'로 연결되진 않으며 무리속에서 사람은 '내 의지는 다수가 좋아하는 것을 먹는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기에 그렇다. '다수가 좋아하는 것을 먹자'고 대다수가 말하고 있는 무리속에서 그들은 당췌 원하는게 없음인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그들은 뭘 먹게 될까?
의지와 의사를 동시에 가진 이가 원하는 냉면을 먹게 된다.
본인의 의사가 분명해 의지로 이루는 경우. 냉면먹자! 외친뒤 몇가지 행동을 보일 수 있는데,
'오늘은 더우니까', '면이 땡기니까', '새로 생긴 냉면집이 있던데'의 이유를 붙이는 경우.
'냉면이 싫으면 너희가 먹고싶은 걸 말해'하며 대안을 요구하는 경우.
'배고프다, 빨리 가자'하며 욕구를 우선하거나 하는 식.
이제 딱히 냉면이 당기는 경우는 아니더라도 쫓아가게 되기 때문에 냉면식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냉면을 다수의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합리화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예를 들어 '그래, 오늘같이 더운 날은 냉면이지,' '속이 타는게 시원한 국물이 먹고 싶었어,' '밥보단 면이 낫지'. '새로 생겼다니 가볼까?' 등등이다. 이런 합리화를 거쳐 냉면은 공고한 다수의 의사가 된다. 게중 몇몇이 속쓰려서 냉면은 싫은데라고 속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그거 아는가? 선택지가 다양한 평등사회만이 고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회사 밀집지역이나 대학교 앞 번화가같이 사방에 음식점이 있는 공간에서, 우두머리가 메뉴를 정하지 않는 상황에 있다면 말이다.

현재 다수가 원하는 공통의 무언가는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무언가를 콕찝어 호불호를 나누는 식으로 의사를 깨우는 편이 낫다. 사람이 다수일때는 자기 뇌를 잠시 잠재우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 개개인의 뇌를 깨우는 질문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냉면먹자의 사람과 약간 다른 분위기로 무리를 이끌게된다. 합의점을 내는 사람인 것. 합의점이 나지 않은 상태로 메뉴를 정하면 구성원들은 냉면을 먹는 것이 이래이래서 좋다고 합리화하는 의식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합리화에 익숙져서 뭐 먹을까?, 뭐 먹고 싶어라는 질문에는 들어도 들어도 뇌가 활성화되지 않는 것이다.
비단 뭘 먹을지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러하니 사는데는 어떻겠나.

정리하자면 이렇다. 보통 의사는 혼자서 하는 일에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지만 이게 나 혼자 있지 않게되면 쉽게 무언가를 원함을 드러내지도 그런 맘이 생기지도 않지 않나? 누군가의 강한 의지로 끌려가는 것이 더 낫겠다 싶게 되는데, 여럿 있을때도 자기의지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사람 즉, 목적한 바로 남을 끌어들이는 것에 스스럼 없는 이가 주동하지 않는다면 다들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의지에 비해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의사가 없으므로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다는 상태에서 머릿속에 공란이 생기게 된다.
그런 경우에, 모두의 의지를 종합해서 합의된 메뉴를 정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본인의 분명한 의사와 강한 의지로 메뉴를 통일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무리는 메뉴에 대한 합리화를 자동적으로 수행한다. 선택이 다양한 사회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바에 대한 생각이 없다면 결국 그 다양한 선택지가 무용한 것이 되는 거다. 그리고 그 다양한 선택지 중에 고르지 못했다는 열패감에 이어 주동자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합리화과정이 익숙해지는 것.
으레 이끄는 대로 냉면을 먹는 사람에게 합의점을 내보는 노력을 해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기운이 꽤나 필요한, 그래서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뭐 먹는지 고민하는 노력을 하느니 빨리 먹고 쉬겠다며 불편한 기색을 받기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고민하다보면 무언가를 고르고,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며 좀더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어떤가. 고민하고 선택하는 힘이 필요한 것은 비단 식사 메뉴에만 적용되는 일은 아니다.

뭐 먹을까는 선택의 연습이며, 합리화보다는 합의점 추구하겠다는 의지일수 있다. 그래서 뭐 먹고싶은지를 생각해내는 것은 개인으로썬 주관을 키우는 것이며, 개인의 주관이 성장하는 것은 무리가 건전하게 의사를 표현하고 이룰 수 있는 동력이다.
나는 냉면이 좋지만, 갈비탕에 들은 당면이라면 합의할 수 있다.
뭐 먹을까?

월간이리 4,5월호는 바스티앙 비베스와 양영순작가입니다.



왜 이제 올리나 하신 분이 있다면 감사합니다.

월간이리 링크입니다. http://postyri.blogspot.kr/

두분모두 제가 좋아하는 만화작가입니다. 왼편이 [염소의 맛], [그녀들], [폴리나]의 작가 바스티앙 비베스. 오른편이 [아색기가], [천일야화], [덴마]의 작가 양영순입니다.
만화는 정말 대단합니다만 폄하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수준차가 심해서라고 생각하는데요. 심지어 그 수준차가 심한 것들을 함께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화는 글(스토리), 그림, 연출이 종합되어 있기에 수준이 골고루 높거나 골고루 낮거나 어느 한 곳에 편중되어있거나 어쨌든 만화의 모양새로 나오고 같은 매대에 놓이고 같은 포털에 연재가 된다는 거죠.
제가 꼽은 이 두분은 글과 그림과 연출 모두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감에 있어 뛰어난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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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4월호에 글을 펑크내서 5월호에 바스티앙 비베스와 양영순 작가에 대한 글을 함께 썻으나 생략합니다.

양작가님은 작가님의 그림체를 참고하여 그려보았는데 팬심에서 우러난 행동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