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의 감

먹으면 싸지만 싸려고 먹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똥만을 소화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인류를 일컬어 자신들을 위해 먹고 싸는 존재로 칭하지 않을까. 물론 그런 존재는 없지만 우리가 그런 식으로 존재의 이름을 붙인 많은 것들이 얽혀있는 세계가 있지. (갑자기 박테리아가 떠오른다.)
그 무엇도 무언가의 목적이지 않는 삶으로. 무엇도 무엇으로 분리되지 않는 삶으로 살 수 있는 건가. 아니, 그런 것이 추구할 만한 상태일까? 아니면 염두하는 것으로 족한 건가, 혹은 추구하는 것을 통해 겨우 염두하는 것뿐일까.

잘 익은 감은 감나무의 추구할 바라고 가정했을 때,
감이 초록색인 채 땅에 떨어져있었다. 나는 초록색 감을 보고 울었다.
0 감이 나무를 놓친거냐 나무가 감을 놓친거냐 하면서.. 큰 슬픔.. 큐
그러다가
1 감이 땅으로 자리를 옮긴 건가. 아니면 감을 땅으로 옮겨준 건가?
하면 이제 울음을 그치고 헷갈리면서
2 아, 그냥 감이 땅에 있는 것인가.
그리고 나서는
3 감은 감이 아니고, 감나무도 감나무가 아니고 땅도 땅이 아니라서 덜 익었다는 말은 엄밀하게는 생명의 차원에서는 잠시 현신한 존재외에는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딴 식이 되고 그러면 이제 나는 왜때메 운거지?하고 거지가 된다.

덜익음을 0적인 상태^^에서 말해 쓸모없는 상태라고 해보자. 맛이 있길 하냐, 씨라고 여물었길 하냐. 완전 딴딴해서 감나무 아래 있다가 정통으로 맞고 골로 가는 거지. 사인 땡감..
자기의식을 가진 한 인생이 생명 대순환의 틀로 자기를 보면서. 자신의 쓸모와 쓸모없음에 대한 괴로움을 1-2자기가 지금만 존재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3무갈등의 상태로 접어든다면
그것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인가, 자기 만족으로 족해서 외부의 어떤 판단도 필요치 않은 상태인가, 그 상태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의 자기 만족도 자기 만족 외의 어떤 가치를 갖지 못하나?

그가 그렇게 족했다면 외부가 그를 강제할 것은 뭐냐 싶지만. 그렇지만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인간'인 채로 '혼자 온전해버린 개인'이 도대체 뭐냔 말야. 그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관계들에 기생해서 살게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게 아닌가. 그 사람이 사회, 사람들의 곁을 떠나지 않는 한 말이다. '나는 한시적으로만 나다. 오 우주적 생명 졸쩔'이라는 결론을 얻은 자로써 치여 사는 사람들의 어떤 '인정'을 받으며 그 인정으로 인해 자기의 비생산을 그들의 여분으로 채워가며 기생하듯 살게 될 수도 있다는 거다.
잉여의 존재에게 실제적인 후원을 하거나, 기부를 하거나 하는 식으로 그를 계속해서 존재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어떠함인가.
결국엔 이 소리다. 나는 아직 고급예술이라 칭해지는 것들이 잉여를 바라봄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사회에 잉여가 넘치는 반면에 결핍도 넘치지만, 수요와 공급의 일치는 환상에 불과할 뿐임을 알면서도 내 앞가림도 차발차발하고 있다. 심지어 결핍은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차원적인 것으로 타도의 대상. 모든 결핍이 충족되는 것이 가능치도 않지만 결핍이 충족된 상태가 계속 될 수 또한 없는데. 내가 뭐라고. ㅋㅋ
감나무가 땡감을 떨어트리면서도 감 내기를 멈추지 않는다. 모든 감이 잘 익고 소화되는 채로 감의 형상을 잃는 것이 아니더라도 감나무는 감 내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아아아 내가 아무리 배고파도 감을 소화시키지 못한다. 
이쯤 쓰다보니까 내 문제는 그거 같다. 내가 감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

스스로를 넓은 의미의 순교자로 여긴 채 살아남는 삶이 기생의 모습이지 않으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자기의 노력으로 가능한가? 물론 작업하는 인간을 작품나무-예술나무로써 바라보는 건 너무 짧다. 심지어 예술가를 순교자로 칭하는 것은 낭만적이고.
게다가 순교자가 있다고 그 종교의 정당함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종교가 정당하지 않다면 순교는 헛된가? 신이시여..

보상, 혹은 목적이라면 무엇인가. 감나무의 감인가, 감나무의 익은 감인가, 감나무의 익은 감을 누군가에게 먹임인가, 감나무의 감나무인가..

달을 가르키는 손끝을 본다고

달을 가르키는 손끝을 본다고 뭐라고 했겠다,
네가 달을 가르키니 달 보기는 커녕, 손끝을 쫓아 흘러내려와 너를 빤히 보는 사람.
달을 가르키는 손끝을 쫓아내려와 너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네가 온전히 달을 가르키는 물음일 수 없음을 깨달아라.
너는 달의 온갖 반영이며 너일뿐임을 지각한다.
질문과 대답이 각각으로 감지되지 않고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자아만이 유효할 때.
옥죄이며 다가오는 유효한 자아에 대한 발견을 확장된 의미라할까 압축된 의미라할까 정수로써의 의미라고 할까.
정작은 나를 보는 시선으로 스스로를 감지하는 것에 어쩔줄모를 따름으로 큰 오류인가.
아 식물이 되어간다. 작은 멸종과 작은 멸망의 먼 세대를 거쳐 여기에 심겨도 자라고 저기에 심겨도 자라는 식물로, 나의 건강함이 세상의 무엇이냐 묻는.

-

어떤 얼굴



월간이리 2월호 뒷표지로 사용된 그림입니다.
뒷표지와 그에 대한 짧은 글을 함께합니다.
월간이리 링크 postyri.blogspot.kr/


‘Woman Suffering from Obsessive Envy’
1822 (Oil painting)
이번호 뒷표지는 테오도르 제리코의 광인 연작에서 주제를 따왔습니다
제리코는 정신과 의사인 친구의 권유로 실제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의 초상을 여럿 그렸으며 제시한 도판은 그 중 손꼽히는 작품으로 프랑스의 리옹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제리코의 서른 살 무렵 작업입니다.
제리코는 실제 광인을 대하며 작업을 했지만 저는 다만 정신이상자의 인상이 필요했으며 google을 통해 많은 단어로 찾아보았습니다.
광기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으로 선택한 최종 검색어는 'murderer' 였습니다. 뒷 표지의 소년은 19세의 살인용의자입니다

-



이 작품은 허구입니다.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소설이나 웹툰 등을 보다보면 창작물이 허구임을 알리기 위해 '이 작품은 허구입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라고 명시해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 문장을 명시한다고 그것이 작품과 실제간의 선긋기가 되지는 못한다.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실제하는, 실제했던 이야기냐고 물을까봐 작가가 이와 같은 의미에서 사족을 달았다면 정확하게는 '이 작품은 허구입니다.'의 표현에서 끝나면 된다. 혹은 '인물 및 단체는 실제가 아닙니다.'까지 표현하면 된다. 도대체 '실제와 연관이 없다.'는 무슨 소리인가.

나는 이와 같은 표현이 공적인 작문 특유의 성질 -공중에게 예의바르게 말하려다보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음-이거나, 작품이 갖는 공적위치에 대한 작가의 방어적 태도의 발현-나는 소송걸리기 시름시름-이라고 생각한다.어떤 허구도 실제와 온전히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연관이 없습니다'이지 못한다. 작품의 요소와 사회 요소를 하나 하나 대응시키며 창작한 것이 아닐지라도 작품은 실제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실제를 기반으로 창작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다.

그래서 작품과 현실사이에 선을 그으며 개인의 창작물일 따름이라 하는 것은 결국 방어적 태도이다. 작가가 방어를 선수치는 것은 특정 작품이 특정 실제의 반영이냐가 문제시 될 때, 이를테면 특정 종교를 비판하거나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하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에 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논란이 될 상황이라면 작품이 다루는 시대상황이 사회문제로 떠오를 때일 것인데, 작가가 자신의 작품은 실제와 연관이 없다는 태도를 포석으로 깔아두었다면 그것은 책임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작가는 창작자라는 존재로써의 사회적 위치에 무책임한 것이 된다. 작가는 발언권을 가지고 연단 위에 선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연단 위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작가가 창작해 낸 이야기는 사회에 대한 비유이며 그 자체로 사회상에 대한 증언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허구입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이 문장에 담긴 태도를 경계한다.

그런데 사실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내놓으면서 이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의 분위기에 대한 증언일 수 있다.. 창작의 자유가 위협받고 그보다 더 강력하게는 토대 자체가 털려버리는 것이 가능한 사회. 사회에 대한 은유가 사회에 대한 증언이 되어버리는데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미치는 영향력에 비해 자신을 지킬 수단은 갖지 못한다. 언제든 발언권을 박탈당하고 연단에서 밀려나버린다. 

작가에게 스스로 살아남기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사회적 책임 마저 요구하는 것은 웃긴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작가의 방어적 태도를 극복할 책임감 운운하려다 길을 잃은 것은 주제파악을 하느라 그런 것이다.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