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싶은 것

가게 오픈 준비중에 온 손님이 사장님과 몇마디 나누더니 날 보고선 대뜸 얼굴이 안 좋아 뵌다고 했다. 나는 당황하며 립밤을 발랐는데, 알고보니 그분은 직업으로 신점과 관상을 보는 사람으로 얼굴이 안좋다고 한 것은 몸이 안좋아 보인다는 소리였다. 사장님이 내가 호주 갈거란 이야기를 했더니 외국에 나가면 몸 상해서 돌아올거라고까지... 게다가 덧붙이길 성향자체가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라 후회가 많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였다.

여러분이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다. 내가 알기로 나는 일을 저지르는 편이 아니다. 그로인한 후회도 없다. 나는 몹시 얌전하여 차라리 내가 뭐든 저질렀으면 하는 사람이뮤다!!!..
휴..
그리하여 건강에 대한 얘기도 딱히 과녘에 꽂히지 않는데다가 요청도 안한 생애 최초의 관상인데 부정적인 말만 들은 나는 몹시 불쾌해져서 '조용히 귤머겅ㅋ' 하는 마음으로 귤을 드렸다. #농담

자기자신과 자기의 미래를 알고자하는 바람은 늘상의 것. 자기의 이야기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무척 재밌는 이야기이다.특히 게중에서도 손금과 관상은 초면에 말트는 방법으로도 쓰일만큼 일반다수에게 재밌는 꺼리이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먹고 살 자리가 있는 거다. 
(커밍아웃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식팔자에 이성이 없다는 점괘가 나오는 것으로 점쟁이를 신뢰하기도 한다고.)

대다수가 알길 원하는 알 수 없는 미래. 당장 보지 못하는 것을 당장에 가늠하게 하는 것. 사람들은 자신이 경청할 자리를 그것을 위해 비워두고 그리하여 미래를 내다본 다는 이들이 사람들의 그 빈틈에 자리를 잡고 육체를 보존한다.
(최근에 용한 친구가 봐준 손금에 의하면 나는 이 시기를 지나면 트인다 했으니 그것을 기억해둠. 흥하면 복채 ㄱㄱ)

다루기도 벅찬 과학의 시대임에도 동시에 서양의학에서 취할 바는 외과뿐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팔 떨어지면 한의학으론 못 붙이닝겐. 그 외엔 많은 비과학적인 것에 마음이 가는 그런 사람들은 인간생명의 것은 과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영혼, 신, 운명, 사후세계등의 얽히고 섥힌 무언가로 채운 사람들로써 세상에 인간이 모를 신비한 구석을 남겨둔 것일테지. (그 구석을 신전이라 할 수 있을 거다.)
아아 컴컴한 구석이 필요한 사람들. 온갖 이성적 지혜를 다해 사업을 벌여놓고 고사를 지낸다. 
베일에 쌓인 구석 마저 보고싶어함.

거울이 한창 고급 기술을 요하며 개발되던 시기에 거울은 무척 사치품이었다. 예배중에 거울보지 말라고 주의시켰다고 한다. 마치 지금의 스마트폰처럼. 비단 예배에서뿐 아니라 거울을 보는 행위자체까지도 사람의 영혼을 망친다며 경계를 했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보길 원하는 것, 우리가 원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한채 볼수 있게된 많은 것에 태연하게 둘러쌓인 시대.
궁극적으로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내위의 행동 테제

지금 나는 내 위한테 너무 서운하다.

내 위는 내가 누군가한테 열받아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등의 싸울 태세를 보이면 그때부터 위산을 과다 분비하기 시작해 내게 불안함의 징후를 보이고 나는 결국 내 위의 속쓰림으로 인한 심리적불안감에 빠져 내 행동을 후회, 반성하며 상대에게 사과를 하거나 태도를 정정하는 식으로 평화로운 상태를 보아야한다.

도대체 내 선대들은 어떤 위 속 깊은 후회로 평화를 잃고 생명보전에 차질을 겪었기에 내 유전자에 이런 태도를 남긴 것일까.

방금은 몹시 무례한 사람이야기를 접해 열받아 온라인에서 쌍욕을 했는데 오프라인에서 속이 쓰리고 있다. 나는 정말내 위에게 너무 서운하다.

사실 내 신체기관인 위에게 서운하다는 것은 위가 타자가 될 수 없으니 나 자신을 서글프게 여긴단 소리인데 위를 따로 떼어 나와 분리시켜 비난하고 나의 의식은 면죄되고 싶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위산과다 심리적 불안감을 한단어로 줄이면 겁먹었다는 거니까. 내가 겁쟁이라는 것은 언제나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겁쟁이로써의 부끄러움을 솔직하게 고백함으로써 이 위산과다 상황을 극복하려 한다.

나 같은 애는 싸움을 회피하고 비폭력이라면서 방에 누워있기 십상이지만 그걸 이겨내고 부당한 상황에서 옆에서 같이 욕하고 싸울 줄 알았으면 좋겠다. 

정말 짜증나는 건 내가 아무한테도 미움받고 싶지 않아한다는 거라, 내게 혹은 내 주위에게 무례한 사람에게도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쌍욕을 하는데에 두려움을 겪는다는 건데 여기서는 글을 하나로 모아야 끝마치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마실 수 있으니까 패스한다.

읽고계시는 이 일련의 활동으로 지금은 위가 좀 괜찮아졌다.

테제를 세워 태세를 정비한다. 
필요한 즉시 속편함을 포기할 수 있을까.

빈대떡의 더러움과 두려움

가끔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의 일이다. 시간은 밤이었고 평소보다 늦게 귀가하여 일탈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몇몇의 친구들과 함께 버스정거장으로 가다가 건너편 음식점 앞에서 두 성인이 키스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아주 강렬했다. 그때 나는 어렸다-가 아니라 두 성인이 다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그 키스가 많이 길었던가? 음식점 아줌마가 바가지로 그 둘에게 물을 뿌려버렸을때 그들이 계속 부둥켜 안고 있었던가? 아줌마가 그들에게 꺼지라 했던가?
친구들 중 그 장면을 본 것이 나뿐이어서 나는 친구들에게 남자 둘이 키스하는데 아줌마가 물을 뿌렸다고 말했다. 친구 중 하나가 더럽다고 했다. 내가 더럽다고 하자고 얘기를 꺼냈던가? 그냥 그랬다는 것이었던가? 더럽다고 하니까 얼떨떨해서 더러운 건가보다 생각했나? 아니면 동조했나?
아줌마가 물을 뿌린 게 가게 앞에서 키스를 해서인지, 가게 앞에서 키스를 한 것이 두 남성이여서인지 잘 인지되지 않는 판에 뭐가 더럽다는 건지도 덩달아 인지가 안 되어 이따금 나는 이 일을 곱씹었다.

가게 앞에서의 두 남성의 키스는 어떤 면이 더러운가.

더러움.
바닥에 토악질을 해놓은 것을 보면 더럽다고 한다.
그 것을 순화하면 빈대떡을 부쳤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빈대떡은 더럽지 않다.
바닥에 빈대떡을 두면 구토자국으로 보여서 더럽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빈대떡을 바닥에 두면 더러워진다.
빈대떡을 먹고 토악질을 한 것이라면 더 더러운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어느 순간 더러워 진 것인가.
빈대떡을 부칠 때, 조금 식었을 때, 입에 넣고 씹을 때,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 소화액과 섞일 때, 영양소와 찌꺼기로 분리될 때, 배출될 때.
그 어느 순간에도 빈대떡은 더럽지 않다.
다만, 빈대떡이 그 과정에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게 되면 더러운 취급을 받게 된다. 접시에 있어야하는데 마루바닥에 있거나, 위장에 있어야하는데 길바닥에 있다면 말이다.
그러니 더러움은 일종의 제 위치에 있지 않음으로 받는 취급이다.

즉 두 남성의 키스는 공공장소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더러운 취급을 받은 것이다. 사적공간에서 키스를 하는데 순간이동을 시켜 더러워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것뿐인가?
두 남성은 부적절한 장소에서 키스를 했기 때문에 물을 맞고 꺼지란 소리를 듣고 그 장면을 목격한 청소년들의 입방아에 오른 뒤 15년 동안 잊히지 않은 것인가.
아줌마는 왜 하필 물을 뿌렸는가.

물이란 것이 몹시 의미심장하여 여러 경우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 째, 아줌마는 강렬한 더러움을 느끼곤 자신과 가게를 씻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더러움제거의 상징인 물을 뿌렸다. 덧) 소금물이었을 수도 있다.
둘 째, 물은 신의 가호를 비는 행위이다. 집안에 해를 입일지도 모를 악귀를 쫓아낼 때처럼. 오 주여, 두려움이 나를 잡아먹사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아멘.

(조악해서 지운 부분)

두려움.
빈대떡을 두려워해보자. 어떤 빈대떡이 두려울까? 빈대떡을 모르는 사람이 부쳐준 경우, 낯선 사람이 친절하게 건넨 에너지 드링크를 먹고 정신을 잃은 채 인신매매단에 팔렸다가 기적적으로 가족에게 돌아온 기구함의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면 도대체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는 빈대떡을 먹기보단 거절할 예의바른 핑계를 찾기가 쉬울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나는 모른다-에서 온다. 그 것이 주효한 것인지와는 별개로.
모른다.
나는 빈대를 잘 모른다-겪지 않았다. 나는 빈대를 소설 속에서 접했다. 소설이 내게 선지한 빈대는 궁핍하여 위생시설을 누릴 수 없는 인간이 전유하는 상상의 벌레로. 물리면 몹시 가렵다는데 그게 그러니까 아토피만큼 가려운 걸까? 빈대는 옮는다는데 서울역 노숙자들 사이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괜찮은 걸까? 하는 것이다.

사실 빈대는 더럽지 않다. 빈대가 있는 인간이 더러운 거지 빈대는 더럽지 않다. 고로 더 생각해보면 이 모른다는 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모르지만 알지 않겠다는 태도. 내가 아는 데로 알겠다는 태도이다.
빈대떡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길 원하지 않는다. 빈대떡에 나쁜 것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면. 빈대떡에 무엇이 들었는지에 대한 자신의 들음을 안다. 빈대떡이 두렵고 무엇이 들었는지 알길 원하지 않는다.
두려움의 정체를 알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빈대떡은 아무도 잡아먹지 않기에 몹시 억울할 것이다.

두 남성은 계속 부둥켜안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피카소와 말띠를 기념함.

이 그림도 월간이리 1월호 뒷표지였습니다. 편집이 달랐지만,
1월호 뒷표지에 대한 글은 2월호에 함께 실었습니다.


월간이리 링크 postyri.blogspot.kr/

Bull - plate 11'
January 17 1946 (lithograph)
지난 1월호의 뒷표지는 피카소의 석판화 연작 'Bull' 의 패러디였습니다
'Bull'은 피카소가 60대 중반이던 즈음 작업한 석판화 연작입니다. 첫번째 황소 1부터 마지막 황소 11 까지 약 1달에 걸쳐 작업되었으며. 제시한 도판은 마지막 11번째 작업입니다. 최종적으로 황소는 상징만 남아 기호처럼 되었고 그자체로 몹시 유려하고 완벽해보입니다.
http://bit.ly/1fvECdv 본 페이지의 정보를 참조했습니다. 도판이 작업 순으로 실려있어 보시기 좋습니다

월간이리 12월호는 루시안 프로이드입니다.



이로써 12개월간의 뒷표지 작업을 마쳤습니다. 그 말인즉 한해가 갔고 끝이 났다는 것이죠. ^^
2014년부턴 자유주제로 글은 쓰지 않고 표지작업만 할겁니다. 봐주셔서 감사했고, 앞으로도 즐겁게 봐주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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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안 프로이드 (Lucian Freud)

빵덩어리, 살덩어리, 물감덩어리.
덩어리라는 말엔 특별한 응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덩어리 안에, 덩어리의 핵이라고 할 만한 자리에 혹은 덩어리진 더기더기 사이에 덩어리는 뭔가를 숨겨놓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작위로 써놓은 것이긴 하지만 빵덩어리, 살덩어리는 예수께서 자신의 살을 빵에 비유한 바도 있고, 멍하니 생각해도 빵을 먹으면 살이 되니 어느 만큼의 유사함에 가 닿습니다. 빵덩어리, 살덩어리, 물감덩어리. 잘 해보면 물감덩어리도 낄 수 있을 것 같네요.
사람-살덩어리를 가장 생생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그림의 수단은 유화일겁니다. 효과로도 상징적으로도요. 효과면에서, 유화는 물감을 기름에 녹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굳은 뒤엔 기름으로도 다시 녹지 않습니다. 물감은 안료와 접착제를 섞은 것으로 유화물감은 기름으로 농도 조절된 뒤 화면에 접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접착력이 약해져 떨어져버리기도 하는 겁니다. 그림 표면의 번들거림은 사용하는 기름의 성질에 따라 더욱 번들거리게도, 혹은 전혀 번들거리지 않게도 만들 수 있는데 보통 천천히 마르는 성질의 기름이라면 광택이 나고, 빨리 마르는 속건성-휘발성 기름이라면 광택이 없게 됩니다. 기름을 많이 섞어 캔버스 천에 얇게 스며들도록 그릴 수도 있고, 기름을 거의 섞지 않다시피 하여 물감 자체를 두껍게 쌓아가며 그릴 수도 있습니다. 덩어리를 두껍게 쌓아가며 그릴 때 그림은 그 자체로 덩어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법으로 사람을 그리면 그 두툼한 물감은 살덩어리로 보입니다. 변사또의 부정을 낱낱이 살핀 이몽룡의 시의 ‘금동이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사람의 피요, 옥쟁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하는 구절에서 보듯 사람의 진은 피와 기름의 비유로 담깁니다. 피부의 덩어리감, 피부결의 반짝임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유화는 그뿐만 아니라 기름에 녹여 그리는 그 성질로써 살덩어리가 될 수 있습니다. 기름에 엉겨붙은 안료의 덩이 덩이들 그 색들 하나하나가 사람의 뼈와 근육과 피와 살의 빛을 내며 덩어리가 되죠.
루시안 프로이드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물론 엄밀하게는 그림 사진을 본 것이지만. 대학교에 방문 판매를 오는 화집아저씨의 매대였습니다. 화집아저씨는 책을 뒤적이는 내게 프로이드의 화집을 본다면 누드화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을 장담하셨죠. 그리고 덩달아 잘 나가는 화집 몇 권을 추천해주셨는데 호크니와 베이컨의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회화과 출신들에게 데이비드 호크니, 프란시스 베이컨, 그리고 루시안 프로이드는 조용한 경외의 대상일겁니다. 회화는 죽었다고 선언되던 시절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없을 화면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인정받았죠. 그 중에서도 프로이드는 전통적인 주제인 인물을 모델과 대면한 상태로 그리는 방식을 꾸준히 지속했습니다. 그의 그림의 단골요소인 회반죽 벽, 오래된 나무 마루, 낡은 철제 침대와 매트리스, 그리고 뒹굴고 난 듯한 이불 같은 것은 실제 그의 작업실 정경이며 그는 모델이 되어줬으면 하는 이들에게 요청을 하고 그들이 수락하면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정기적으로 함께 작업합니다. 전문 모델이 아니라 작업을 하며 모델로 인해 엎어지는 작업도 꽤 많다고 합니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귀가 튀어나왔다면 더욱 도드라지게, 피부가 붉다면 더욱 붉게, 추하다면 추할 특징. 살이 늘어졌거나 턱이 접혔다거나 하는 정작 모델들은 자신의 모습에서 빼고 싶을 특징들에 매달려 꼭 그려내고야 맙니다. 그러한 그림은 모델을 닮기도 하고 왜곡하기도 하여 묘하게 닮은, 묘하게 다른 인물이 됩니다. 모델을 얼마만큼 충실하게 그리냐에 대해서는 모델마다, 또 작가마다 견해가 다를 겁니다. 프로이드의 경우엔 다음 문장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자연을 섬기고자 노력하는 미술가는 그저 수행적인 미술가일 뿐이다. 그가 그토록 충실히 복제한 모델이 그림 옆에 함께 걸리지는 않을 것이고, 그림은 단독으로 그곳에 있을 것이므로 작품이 모델을 정확하게 복제했는지 여부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한 그림은 그저 단순히 우리에게 삶을 상기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확히 삶을 반영하기 위해 그 자체 고유의 삶을 획득해야만 한다.”
마틴 게이퍼드 저 [내가, 그림이 되다]에서 인용된 1954년의 프로이드 글 48p, 108p

그가 의뢰받은 그림을 그린 일은 적다는 점, 그리고 신분이 널리 알려진 모델을 제외하곤 담배를 피우는 사람, 한 남자와 그의 딸, 파란 스카프를 맨 남자 등으로 그림의 제목을 삼은 점과 함께 위의 글들을 참고해 말해보자면 프로이드는 자신이 매력을 느껴 모델로 삼은 개인의 고유함을 인간 자체의 어떠함으로 그려내려 한 것일 겁니다. 참. 그림 잘 그리면서 글도 잘 쓰네요.
프로이드의 살덩어리 가득한 그림을 보며 받는 많은 좋은 것들 중 하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고민할 바는 더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에 있음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겁니다. 물론 사람이 더 좋은 그림에만 고민할 수 있는 것은 무척 사치스러운 일이지만, 갈팡질팡하는 때에 내가 바라볼 큰 덩어리를 다시금 발견하는 것은 무척 소중한 일이죠.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화 모델이었던 마틴 게이퍼드가 프로이드와 나눈 대화를 책으로 냈는데 그 책이 최근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었습니다. [내가, 그림이 되다]라는 제목입니다. 저자는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인터뷰집을 내기도 했죠. 둘 다 무척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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