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8월호 가브리엘 뱅상입니다.


8월호가 좀 일찍 나왔죠. 뱅상은 몹시 고운 분인데 그래서 곱게 그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는데 이것도 좋죠. 참 다행입니다. 닮게 그리지 않는다고 이분들중 아무도 제게 클레임을 걸지 않죠.
만사에 체념이 넘실대는 7월이었습니다.
그래도 방정리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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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뱅상 (Gabrielle Vincent)

피카소의 일화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제 부족한 글의 도입으로 삼겠습니다.

한 부인이 카페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피카소를 보고 자신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피카소는 몇 분간 여인의 모습을 그려서는 그림값을 묻는 부인에게 5000프랑을 요구했다. 부인은 놀라 항의했다.
"아니, 그림을 그리는데 몇 분 걸리지도 않았잖아요?"
그러자 피카소가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40년이 걸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각기 다른 매체에서 한 너 댓 번 접했더랬는데 몇 번인가는 화가가 달랐고. 또는 그림의 대상이 달랐고, 카페가 아닌 미용실이 되기도 하고 뭐 그림의 액수가 바뀌기도 하고 했기 때문에 파블로 피카소 내지 실존 화가의 이야기라고 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이야기의 성분이 바뀌어도 전달하고자 하는 맥락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무리가 없겠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 한 친구가 제 그림에 대해 평하며 했던 말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당시 저는 솟은 파도와 타일이 깔린 바닥을 그렸었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차치하고, 그 바닥타일 한 장이 그림상에서 대략 5mm정도의 크기였죠. 타일이 쫙 깔린 풍경이라고 고지식하게 타일을 한 장씩 그렸더랬죠...^^.
그 친구는 제가 타일을 일일이 그린 것과 같은 노동집약적인 면을 그림에서 보여줘야 사람들이 그림을 쉽게 받아들인다고 했어요. 그렇다고 동의했었죠. 일학년 때엔 과제로 레이스천이 깔린 정물화 그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 레이스를 또 일일이 그리고 앉았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 세밀한 부분을 하나하나 그리고 있노라면 내가 레이스를 그리는 이 노력이면 레이스를 하나 뜨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또 한번은 어시스던트 일을 할 때인데, 지붕이 많이 보이는 위치의 기와집을 그릴 일이 있었어요. 그 지붕의 기왓장을 하나하나 그리고 있는 제게 작가님은 회화적이지 못하니 다른 표현법을 써보라고 권유하셨었는데 제가 그런 식으로 좀 단순한 면이 있네요.
여하튼 그런 때에는 그림 속 타일을 팠다-레이스를 팠다-기와를 팠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죠. 팠다는 말은 곡괭이를 들어 땅을 팠다-우물을 팠다-수로를 팠다하는 것처럼 결실을 위해 노동이 필요함을 분명하게 의미하는데 그림을 그림에도 이 표현을 붙임이 자연스러운 겁니다. 노동이란 무엇입니까. 땀 흘려 수고하여 땅의 소출을 받는 것으로 태초에 받은 형벌이자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의 의무죠. 그래서 사람들은 으레 농부는 땅을 파길 바라고 학생은 공부를 파길 바라고 화가는 그림을 파길 바라죠. 따라서 앞서 말한 일화에서 부인이 그림 그리는데 몇 분 안 걸렸는데, 그렇게 큰 돈을 요구하냐고 물은 것은 부인의 입장에서 합당한 이의제기입니다. 화가는 거기에 대해서 40년이 그렸다고 응수함으로써 자신이 그은 그 획 획들은 자신의 평생을 쌓아서 이룬 경지이므로 노동량과 투입시간을 따지자면 보이지 않는 시간과 보이지 않는 노동이 담겨있음을 알려준 것이죠.
가브리엘 뱅상은 벨기에 브뤼셀 태생의 동화작가로 저는 ‘그 어느날 한 마리 개는’(또는 ‘어느 개 이야기’)이라는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스마트 폰을 들어 검색해보시면 그녀의 뛰어난 드로잉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동화책하면 떠오르는 다채로운 색이나 과장된 그림체, 혹은 의인화된 동물들은 없고 대신 부드러운 검정 목탄으로 때로는 휘갈기고 때로는 가만히 그려낸 형태들이 있습니다. 그 단순함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작가의 역량 때문입니다. 얇아지고 굵어지는 선의 쓰임이 그리고자하는 바에 정확히 닿아있죠. 그래서 제가 앞에서 말한 보이지 않는, 축적된 노동량 운운한 것은 그녀의 그림에서 그러한 기운생동을 느껴달라는 말씀으로 덧붙인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피인 그림은 뛰어나다치고 내용은 어떤가. 저는 그녀의 다른 작품 ‘거대한 알’에 대해서 조금 알쏭달쏭한 느낌을 갖습니다. 일단은 동화책의 형식을 빌어 나왔으나 그것은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내용이라기엔 비유하는 바가 큽니다.
내용을 잠깐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거대한 알’은 어느 날 거대한 새가 거대한 알을 낳고 떠나면서 시작되는데, 그 거대한 알을 발견한 사람들은 알 주변에 모여들어 살기 시작해서 어느새 도시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알을 중심으로 유원지를 짓기도 하고 신이 나있죠. 그런데 그 알에 금이 가며 새끼 새가 태어나게 되고...
나머지는 책을 통해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
사실 제가 동화책에 대해 갖는 의문은 어른이 제시하는 아이들을 위한 무언가가 과연 얼마만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혹은 어른인 작가가 자신의 수준을 얼마만큼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낮추어 제시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새삼 깨달은 것은 누구를 대상으로 삼았건 딱 그 대상의 시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를 담을 것은 아니라는 것. ‘거대한 알’은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보다 더 큰 것을 담고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작가가 의인화시킨 동물들을 내세워 이야기를 한 동화집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드리는 ‘거대한 알’은 어린아이의 순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 접하여 평생 이따금 떠올리며 새로운 감상과 함께 자라날 각자의 이야기를 심어주는 것으로 그래서 작가의 모순을 깨닫기도 하고, 어릴 적과 다른 결론을 내기도 하며 함께 성장할 만한 이야기인 거죠. 그렇게 주인공들은 행복하게 살게 되었답니다-내지 그래서 주인공은 나쁜 버릇을 고쳤답니다-의 개과천선이나 권선징악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접한 뒤에 이따금 떠올릴때마다 새로이 질문을 던져줄만한 풍부함을 품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것은 이 작가가 하나의 경지를 이룬 것을 말하겠죠.


글·그림 지인 freshdrawing.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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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


발 아님

곡해와 신파

나는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 중에서도 만화책을 최고로 즐겨서 어릴 적엔 만화책이라면 일단 집어 들고 내용이 재미없어도 재밌게 읽었다. 그러니 만화책을 통해 배운 단어들도 참 많을 테다. 물론 요새도 만화책을 좋아하지만 학생 때만큼 읽지는 못하는데 특히 중, 고등학교 다닐 적엔 참새 방앗간 격으로 학교 끝나면 만화대여점을 들렸었다. 사실 그 나이 때라면 가지고 있는 경험과 함께 국어사전 또한 빼곡하다고 스스로 자신할 테고, 어디서든 낯선 단어를 접하면 이 단어가 잘못 사용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 오타인지. 내가 모르는 단어인지 파악할 수 있다. 몰랐던 단어라면 문맥상 어떤 뜻인지 가늠하고 금방 다시 적용할 수도 있다. 그 활동은 매우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일상에서 배운 단어들 대부분을 언제 익혔는지 기억하지 않는다. 내가 만화를 통해 많은 단어를 배웠을 것이지만 대부분 생각나지 않는 것이 그 자연스러움 때문이고 기억하는 두 개는 머릿속에 남는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지 않게 기억에 남은 두 단어는 곡해신파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이렇다. 곡해는 일단 오해의 잘못된 표기라고 생각하며 시작되는데, 그리 비슷하지도 않은데 왜 오타라고 생각했냐하면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언어 성적도 좋았던 터라 만화책에서 내가 모르는 단어를 접하리라고 생각지 못했기 때문. 앞뒤 문맥을 보면 오해라는 뜻 같은데, 곡해라고 적다니 오타다! 하면서 의도적으로 무시했던 것이다. 무시는 마음속에 뭔가 찝찝하니 잘못된 판단으로 계속 남아 있다가 친구와의 대화 중에 만화책에는 오타가 너무 많다는 이야기로 튀어나왔는데, 그때 그 친구가 곡해라는 단어는 있는 단어라고 말했고 나는 그제야 사전을 찾아 곡해를 발견했다. 나는 내가 모르는 단어가 만화에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곡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곡해했던 것이다. ^^;; 그 만화는 야자와 아이 작가의 나나’. 어쩌면 곡해하지 마.” 라고 말한 작중인물이 변호사 출신이라는 설정이었기에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일본에선 곡해를 자주 쓸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곡해를 늦게 접한 것이 맞겠지만 그런 식으로 언어 자신감에 찼던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이제 언어 자신감은 우물 개구리로 사라졌으니 곡해는 이제 그만하곡:> 신파를 얘기해보겠다.
나는 최경아 작가의 순정 만화 스노우드롭1권에서 신파라는 단어를 접했다. 작중 상황은 이랬다. 남자주인공은 고등학생으로,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아버지와 형은 죽었고, 막내 동생은 사고만 치고 돌아다닌다. 남자주인공은 어머니의 병원비를 벌기위해 학교를 자퇴하기로 한다. 남자주인공과 친한 여자아이 하나가 남자주인공이 자퇴한다는 것을 듣고 그런 남주의 배경 상황을 읊으며 왜 오빠만 희생해야하냐고 엉엉 우는 장면을 여자주인공이 자신의 보디가드와 함께 목격한다. 그때 보디가드는 남자주인공이 기구하다며 손수건을 물고 우는데, 여자주인공이 되레 정색을 하면서 말한다. ‘누구야, 저 신파는!’ 이라고.
신파, 신파라. 몹시 어렴풋했다. 신파적이다라는 용례를 떠올렸으나 신파적 또한 이해 못했긴 매한가지. 머릿속 사전의 다른 단어 중 하나로 파로 끝나는 노파가 있었고 당시엔 노파심도 흐릿하였던 초등학생 시절, 일단 노파와는 거리가 먼 것 같고 나는 신파=new() 새로운 등장인물, 그래서 누구야 저 새로운 캐릭터는? 정도로 곡해한 채 넘어갔다. 문제는 내가 이 만화책을 구입해서 보았다는 것으로, 만화를 다시 읽을 때마다 이 ‘New에서 뺑뺑 돌며 신파라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결론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거진 십년이 더 지난 지금 내게 신파란 비극에 취한정도의 의미로 새겨져있고 그래서 작중인물이 말한 신파는 스스로의 또는 주변인물의 비극에 취한 인물로 신파적인 인물은 기승전결의 승에 해당하는 강한 비극을 자신, 혹은 타인의 삶에 부여하는 그런 인물이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말한 신파란 비극양산자로써 비아냥의 대상이었던 것. 나중에 그 여주인공은 남주인공 못지않게 신파의 지위에 오르지만.
여하튼 내가 신파를 제대로 깨닫기까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다만, 과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과함이 비웃음꺼리로 칭해지는 것은 절제가 미덕일 때 가능한 것이며 신파란 본래 연극에서 출발한 것임을 보면 연극 요소로써의 신파의 과함을 비웃는 것이 과연 쿨한 행동이라 할 수 있을까? 연극에서의 큰 동작과 과장된 어조는 물리적 거리를 극복해야하는 것으로 그만의 매력이 있으며 그 맥락으로 신파도 이해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촬영기술로 거리를 극복하는 드라마의, 영화의 연기를 보는 것을 통해, 큰 착각에 빠져있다. 아무도 드라마처럼 살지 않는다. 누구도. 나를 관람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한 아무도 드라마로 살지 못한다.
왜 비극에 취한 인물을 위로하지 못하고 비아냥하는가. 자기의 슬픔이나 징징대고 싶은 부분을 맘껏 풀어버리지 못한 채 애매한 어른의 태도를 흉내내며 자란 탓은 아닌가. 신파라는 비아냥을 피하기 위해 쿨함을 가장하게 되고 그렇게 자기가 맘껏 울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울 때 어린애취급을 하는 동시에 다시 한번 자기의 어린아이부분을 묵살하는 것이 아닌지. 남의 신파를 받아줄 만큼의 여유가 성장하는 모두에게 있길 바란다. 그리고 모두 건강하게 성장합시다.
 
. 그러고 보니 만화 상에서 주인공의 상황에 대해 열을 올리는 것에 신파적이라는 대사를 했다는 것은 작가 자신이 자신의 설정이 신파적임을 자조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
 

월간이리 7월호 김범작가입니다.



이번호는 김범작가입니다.

http://postyri.blogspot.kr/2013/07/2013-6.html
월간이리 링크입니다.

http://issuu.com/postyri/docs/postyri1307web/41?e=5641367/3844431
이 링크를 통해 7월호를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웹상에서 보시는 페이지의 하이퍼링크가 살려져있습니다. 따라서 클릭하시면 해당 작가의 블로그나 트위터 등으로 연결이 된다고 합니다.
편집장님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6월에 한발짝도 못 움직였고 그에 덩달아 형편없는 기분입니다.
기분만 그렇고 형편없이 살진 않았지만 어쨌든 매한가집니다.
기운 빠지는 근황을 전하게 되어 면구스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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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 (Kim Beom)

‘왜 좋아?’ ‘그냥’
‘왜 좋아?’ ‘잘해서’
의 차이는 뭘까요?
‘좋다’와 ‘잘한다’는 틀립니다. 라는 말은 틀린 말이죠. 아시다시피 ‘좋다’와 ‘잘한다’는 다릅니다가 맞습니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분명히 다른 말이지만 혼용됩니다. 그리고 그 다르다-틀리다의 혼용이 문제되는 것은 저변에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는 차별정신이 깔려있기에 그렇고요. 좋다-잘한다도 마찬가지로 혼용되는 말사이인데, 이 경운 ‘좋다’의 의미가 워낙 넓게 쓰여 ‘잘한다’를 부분 포함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잘한 것이 좋다’라는 표현은 ‘좋은 것이 좋다’는 표현이상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의미의 겹침은 다르다-틀리다와의 관계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분명히 해야 할 것임엔 마찬가지인데요.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리기 쉽기 때문이에요. 뭔 소리냐면 잘한다-좋다-착하다/옳다로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게 좋은 것이 옳다로 스물스물 넘어가는 정신작용을 경계해야하는 거죠. 취미활동을 건강하게 발전시켜나가는 데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잘한다-좋다가 동어반복이 되는 중복 부분을 빼고 ‘잘한 것이 좋다’ 했을 때 잘한다-좋다는 좋다-잘하니까라는 판단과 근거의 관계인거죠.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 일컬어 ‘절대미’에 더 가까운 것은 내 기준에서 볼 때 잘한 것이고 그렇기에 좋은 것이지만, 좋다에 옳고 그름을 포함해버리는 실수를 한다면 그것이 사회의 도덕기준이나 가치평가의 영역으로 비어지는 거죠. 나에게는 좋은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옳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을 일단 못 박아야 해요. 이것이 당연한 것인데 때때로 의식하지 않으면 의식 사이에 교묘하게 감춰진 채 나도 모르게 작동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잘한 것이고 옳은 것이야. 너가 나와 다른 것을 좋아한다면 네 취향은 틀린 것이야.- 이렇게 자연스럽게요. 취미활동은 이런 태도를 경계하는 고도의 판단을 겸해야 하며 결국 취미활동으로 정신은 더 자랄 수 있게 됩니다.
잠시. 개인의 취향을 절대미로 말해서 싫으실지 모르겠는데요. 집단의식이 공유하는 미가 어떻든 제겐 절대라는 개념은 절대적으로 개개인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대를 추구하는 개인들끼리는 절대를 추구한다는 것만 공유될 뿐, 그 ‘절대’는 같지 않은 것이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절때리세요. 제 생각엔 절대가 절대인 것은 절대라는 개념 하에서만 절대인 것이고 개개인에게 절대는 다르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고, 내게 좋은 것이 옳은 것은 아닌 하에서 그리고 우리서로는 진짜 많은 부분이 같은데 개성인 부분만 다른 하에서만큼 ^^ 우리의 절대는 다릅니다-라는 것.
김범 작가의 작업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게시판의 포스터. 아마 2010년 아트선재에서의 개인전 알림 포스터였던 것 같습니다. 치타가 영양을 쫓는 영상을 영양이 치타를 쫓는 것으로 보이게끔 편집한 비디오 작업의 캡처가 그 포스터에 있었고요. 작품 제목 및 연도는 [볼거리(spectacle) 2010]입니다. 와, 좋다. 라고 생각했죠. 사실은 사진 작업인 줄 알았다가 후에야 비디오인 것을 알았지만.
이 경우에 ‘잘해서 좋다’를 적용하려면 무엇을 잘했다고 해야 할까요. 일단 예술작품이니까 미적인 의미에서 접근해야할까요? 아니면 비디오 작업이니 기술인 영상편집을? 이런 경우엔 발상을?
이렇게 그냥 좋다에서 멈추지 않고 왜 좋은가를 찾는 일. 즉각적으로 느낀 ‘좋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을 하도록 만드는 작품은 성공한 것일 겁니다. 어떤 것이든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은 결국 내가 본 작업을 마지막 도미노로 삼아 넘어진 도미노의 과정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도착한 첫 번째 도미노에는 어떤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세계관이 되었든 미적 기준이 되었든 간에요. 그 것은 절대미와 닮아있고, 내지는 닿아있고요. 사람들은 절대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작업이 되었든 삶의 다른 것에 있든 본인의 여정이나 결과물이 절대를 암시하거나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접했을 때 때로 그냥 좋다는 말로 두루뭉술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말로 표현이 안 되거나 말로 표현을 할 필요가 없거나인데 가끔은 말로 표현할 테면 말로 하지 뭣 하러 작업을 하나 싶기도 하니까. 좋아서 좋음을 내세우죠. 저는 김범 작가의 작업의 방향이 가르키는 절대에 공감을 하며 그것들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것은 즉 그냥 좋습니다. 그리고 그냥 좋기에 왜 좋은 가를 찾도록 시작하게 하는 것이고요. 그러니 ‘잘해서 좋다’보다 때로 ‘그냥 좋아’가 더 가능성을 품은 말일 겁니다.


글·그림 지인 freshdrawing.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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