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29-페이스 북에 관해서


#좋아요

 1.
예를 들어서 내가 글을 삭제하면 지인님이 글을 삭제했다고 뜨거나
좋아요를 취소하면 지인님이 좋아요를 취소했습니다-의 메시지는 알림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변화이되 업데이트는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마이너스 변화 - 비긍정 활동 - 밝고 명랑한 소셜네트에 어울리지 않음

...업데이트를 알림으로 받게되면,
업데이트 외의 것을 능동적으로 찾기 더 어려워진다.
편리한 시대엔, 제공된 편리함을 벗어난 활동은 적어질 수 밖에 없다.

사실 우리 모두 글을 삭제하고 좋아요를 취소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활동이 알림되지 않는 이 구조를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묵인되는 활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고,
그것을 느끼기가 조금씩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내 경우 그러한 감은 불안과 함께 오는데,
어쩌면 다들 비슷한지 모른다.
우리는 좋아요로 대표되는 긍정활동과 그것에 반대되는 교감 역시 필요로 한다.
그것이 없는 이 공간이 불안하다.


2.
-님이 내 상태를 좋아합니다
-> 이런 걸로 얻는 위안이 안타깝다.


3.
좋아요 누르면 후원된다는 부류의 게시물을 보면
...
되게 복잡한 모르겠는 기분이 든다.

1 like is 1$ 같은 것.

넷상에서 달성되는 과업이란 이런 것이기 쉽다.
클릭하면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글을 볼 때마다
복잡해지는 마음을 어떻게 다룰 수가 없다.
이를테면,
생존장치를 매달고 온전치 못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타인의 사진.
사진은 어떤 상황을 따로 떼어 그 것 하나로 존재하게 한다.
전후 문맥 없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이 어떻게 얼마나 아픈지,
어떻게 이 사람이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상황에 오게 되었는지,
이 후원이 이 사람을 위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 수 없고,
그저 '좋아요'를 클릭하기만 유도 받는다.

그런 게시물이 불편한 이유
이미지를 통한 즉각적인 반응만을 자극받는 데서 오는 불쾌함이다.
그런 이미지는 우리 시각의 통점을 자극하는데
할 수 있는 것은 클릭을 하냐 마냐밖에 없다.

...
글을 쓰면서 뭔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든다.




당신은 살짝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 했고,
고개를 살짝 틀었기 때문에
눈도 코도 입술도 조금 더,
나는 그 너머를 그리고.



이 오르막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뭔가를 웅얼대다 천장을 보면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말도 잇지 못하고
상대는 가만히





척추 휨 보정기를 한 사람

20120710-받침에 관해서

엉망이다. 뭐가 엉망이냐면,
''''이만나 완벽하게
연달은 'ㅇㅇ'받침을 발음 하며 표정이 멍청(연달은 'ㅇㅇ'의 또다른 멍청한 예)해져선
호소적 성격을 띈다는 건데, (이건 성급한 일반화임, 그러나 호소하고 싶다고 치자. 지금 그러니까.)
정말 끝내주는 말이다.
엉망이야. '진창'까지 붙일 필요도 없어.
징창이라면 모를까.
..엉망징창..중국말같네. '어머진짜' 같기도 하고.
 
생각을 훌쩍 뛰어서- 넘어가자.

받침들은 정말로 사랑스럽다.
예를 들어 치솟다 할때, ''을 보면, 정말. 솟아나오는데 딱인 조합이지?
합하다도 그래, . 하고 나면 입이 딱 닫히잖아. 그렇게, 합해지는거야.
이런 글자들을 찾자면..
수많은 예외들 중 조건에 맞는 녀석들만 떠올라 끼워맞춰지고 마는데
그러나 그 조건에 맞는 예들이 너무 설득력있어서
그 재미에 기뻐져.
많은 혼돈 속에서 뭔가 제대로 들어맞는걸 찾은 듯한 기쁨.
퍼즐 맞추기 같지.
그래, 사는 건 퍼즐 맞추기에 다름없어.
조각이 멀리 있거나, 혹은 비슷한 조각들만 넘쳐나거나하는..
의식하고 조각을 맞추기 시작했을때의 조건이 너무나 달라도
우리는 한 몸으로 하나의 사건을 접하며 그것의 조각을 주워들지.
그렇게 내 세상을 지어가.
어느 곳에 맞출지 헤매면서..


, 그래서 연달은 'ㅇㅇ'받침의 다른말은 양갱정도인가?
좋아. 이렇게 말해보자.
양갱은 멍청하고 싶을 때 먹는 거라고말야. 그 달달함에 뇌가 '리을리을'해지라고.
엉망이지? ^^
난 좋아. 

2012.07.03

정대세선수 결혼 뉴스에 선수복 들고 있는 거 멋있어 보였다.

강백호가 내 최고의 순간은 지금입니다 했을때와

인문수업듣던 친구에게 대학강사님이
자기 최고의 순간이 언젠진 모르겠는데 이미 지난 것은 확실하댔던 얘기가 생각난다.


백호의 경우 멋있기도 했지만 겁나기도 했다. '불나방'성을 더 강하게 읽어서.
그런데 불나방도 탈피를 걸쳐 성충이 된 거잖아?
그러면 이 대학강사님은
탈피를 안했거나 탈피를 했더니 꿀벌이 아니라 꽃등에여서
끝까지 꿀벌은 되지 않은거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꽃등에를 보는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사를 식물이나 벌레에 비유해놓고 혼자 씁쓸해 하는 거 그만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 사실 그만하고 싶지도 않다. 혜안을 얻을 것 같아서. 근데 혜안보다 먼저 우울의 늪에 늡같이 빠지는게 문제,

생각은 파고 들때 우울해지고, 펼쳐나갈때 긍정적이게 된다는 점이 좀 재밌다.
이 경우에 펼쳐나가려면 잠을 많이 자두었어야 함.

아무튼 정대세 선수 부럽다. 슬램덩크 다시 볼까보다. 산왕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