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21-내가 오늘 카페에 앉아있던 11시에서 4시사이

내 자식과 같은 반의, 라는 공통점으로 뭉친 아줌마 일단이 들어왔다가 나간뒤에
바깥으로 여자를 보며 품평을 하는 남자 둘이 나간뒤에
두 시간 공부하고 징징대는 여자와 달래다 지친 남자라는 커플이 나간 뒤에
자기가 나쁜 남자라고 하는 수탉같은 남자와 선배 소리가 푹익은 공대출신 여자의 조합이 도합 세 커플이던 무리가 나간뒤에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으니 나와 연락이 되지않았다고 하란 당부의 전화를 네번째 반복하는 뒷자리 남자와 나만 남았다.
내가 오늘 카페에 앉아있던 11시에서 4시사이

사실 사람은 11시에서 4시사이의 일면으로 이렇다 저렇다 할만큼 단순하거나 뻔하지 않지만, 또 보게 될 지 다신 안 볼지 모르고 다시 봐도 모를 사람들을 나는 그런 전형적인, 내가 파악할 수 있는 100명의 캐릭터 중 한 사람으로 분류한다. 이건 노력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 나또한 남에 의해 쉽게 분류되곤하고, 그래서 첫 만남에 그림그리는 사람답네요 하는 소리를 듣고 나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그림그리는 사람의 캐릭터에서 나를 독립시키고 싶어진다.
초교 운동회 중에, 100미터 달리기를 해서 6명 중의 1등이 되었다고 하자. 1등 도장을 받고 자랑스러웠는데 곧바로 다른 1등들과 합쳐져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1등 뭉치가 된 것과 같다.  달리기 1등들. 이렇게 되고나면 도장찍힌 위치가 손목인가 팔꿈친가 비교하며 다른점을 찾아야한다. 그러다가 깨닫는 것은 1등 참 많고 별거 아니구나 하는 그런.
하지만, 내가 수많은 1등 중의 하나이든, 수많은 러너중의 하나이든 그것 별 것 아니구나 했을때.  1등은 뻔할지언정, 사람은 뻔하지 않다는 걸 다시 생각한다.


 타인을 내가 가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분류한 뒤 '뻔하다'고 느끼는 것은 만나는 모두를 개별자-개별관계-나 너로 받아들이기엔 우리가 너무나 많은 인간들에 둘러쌓였기 때문이 아닌가. 확실히 우리는 서로를 인간으로 대하고 관계맺기보다 너무 많은 서로에게 잠겨 숨막히기 쉽다. 빨리 내 눈 앞의 당신을 정의내리고 분류해서 내가 아는 인간의 범위에 위치시킨다.
10분 아니면 1분의 일들로 전형적인 공대남 내지는 전형적인 학부형, 징징대는 여친 등으로 그 사람을 분류하는 것.
그리고 내가 분류하여 파악한 세계를 희화시켜 말하는 것, 그것은 놀이다.
내가 사람에 대해 갖는 이해를 공감하며 함께 즐거워하길 바라는-대상을 파악하고 분류하고 다음 대상으로 나가며 분류와 파악을 멈추지않는 태도를 가진 때문이다.
'놀이'에서 멈춰서, 마치 그렇다. 세계는 우리에게 그 거대함 자체가 아닌, 조그만한 구슬에 비춰보이는 세계. 손안에 담긴듯한. 비유의 언어는 잠시 맺히는 비눗방울로 세계를 둥글게 투영하고 잠시보인 세계의 전면을 일렁거리며 우리는 이 곳을 유희한다.

그렇기에
카페에 앉았던 내가 창밖의 롱샴가방을 든 남자를 보며 조금 놀랐다가 곧이어 그가 여자와 팔짱 낀 것을 보고 '아, 여친가방을 들어줬군.'하고 납득한 뒤에 '그런데 남자가 롱샴매면 또 어때' 까지 생각했다고 치자. 하지만 조금 뒤에 나를 만나러 카페에 온 친구가 자리에 앉자마자는, '나 방금 롱샴 맨 남자를 봤어. 이상하지 않냐' 하며  웃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내 말을 홀로 있고 싶은 뒷자리 남자가 듣고선 남자가 롱샴들면 뭐가 어떻다고 웃음꺼리 삼는지 하며 나를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전통적 굴레에 매인 배타적 인간으로 여기는 그런 상황이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그런 사람만은 아니다.
당신도 역시 그런 사람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