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12월호는 루시안 프로이드입니다.



이로써 12개월간의 뒷표지 작업을 마쳤습니다. 그 말인즉 한해가 갔고 끝이 났다는 것이죠. ^^
2014년부턴 자유주제로 글은 쓰지 않고 표지작업만 할겁니다. 봐주셔서 감사했고, 앞으로도 즐겁게 봐주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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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안 프로이드 (Lucian Freud)

빵덩어리, 살덩어리, 물감덩어리.
덩어리라는 말엔 특별한 응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덩어리 안에, 덩어리의 핵이라고 할 만한 자리에 혹은 덩어리진 더기더기 사이에 덩어리는 뭔가를 숨겨놓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작위로 써놓은 것이긴 하지만 빵덩어리, 살덩어리는 예수께서 자신의 살을 빵에 비유한 바도 있고, 멍하니 생각해도 빵을 먹으면 살이 되니 어느 만큼의 유사함에 가 닿습니다. 빵덩어리, 살덩어리, 물감덩어리. 잘 해보면 물감덩어리도 낄 수 있을 것 같네요.
사람-살덩어리를 가장 생생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그림의 수단은 유화일겁니다. 효과로도 상징적으로도요. 효과면에서, 유화는 물감을 기름에 녹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굳은 뒤엔 기름으로도 다시 녹지 않습니다. 물감은 안료와 접착제를 섞은 것으로 유화물감은 기름으로 농도 조절된 뒤 화면에 접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접착력이 약해져 떨어져버리기도 하는 겁니다. 그림 표면의 번들거림은 사용하는 기름의 성질에 따라 더욱 번들거리게도, 혹은 전혀 번들거리지 않게도 만들 수 있는데 보통 천천히 마르는 성질의 기름이라면 광택이 나고, 빨리 마르는 속건성-휘발성 기름이라면 광택이 없게 됩니다. 기름을 많이 섞어 캔버스 천에 얇게 스며들도록 그릴 수도 있고, 기름을 거의 섞지 않다시피 하여 물감 자체를 두껍게 쌓아가며 그릴 수도 있습니다. 덩어리를 두껍게 쌓아가며 그릴 때 그림은 그 자체로 덩어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법으로 사람을 그리면 그 두툼한 물감은 살덩어리로 보입니다. 변사또의 부정을 낱낱이 살핀 이몽룡의 시의 ‘금동이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사람의 피요, 옥쟁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하는 구절에서 보듯 사람의 진은 피와 기름의 비유로 담깁니다. 피부의 덩어리감, 피부결의 반짝임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유화는 그뿐만 아니라 기름에 녹여 그리는 그 성질로써 살덩어리가 될 수 있습니다. 기름에 엉겨붙은 안료의 덩이 덩이들 그 색들 하나하나가 사람의 뼈와 근육과 피와 살의 빛을 내며 덩어리가 되죠.
루시안 프로이드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물론 엄밀하게는 그림 사진을 본 것이지만. 대학교에 방문 판매를 오는 화집아저씨의 매대였습니다. 화집아저씨는 책을 뒤적이는 내게 프로이드의 화집을 본다면 누드화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을 장담하셨죠. 그리고 덩달아 잘 나가는 화집 몇 권을 추천해주셨는데 호크니와 베이컨의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회화과 출신들에게 데이비드 호크니, 프란시스 베이컨, 그리고 루시안 프로이드는 조용한 경외의 대상일겁니다. 회화는 죽었다고 선언되던 시절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없을 화면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인정받았죠. 그 중에서도 프로이드는 전통적인 주제인 인물을 모델과 대면한 상태로 그리는 방식을 꾸준히 지속했습니다. 그의 그림의 단골요소인 회반죽 벽, 오래된 나무 마루, 낡은 철제 침대와 매트리스, 그리고 뒹굴고 난 듯한 이불 같은 것은 실제 그의 작업실 정경이며 그는 모델이 되어줬으면 하는 이들에게 요청을 하고 그들이 수락하면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정기적으로 함께 작업합니다. 전문 모델이 아니라 작업을 하며 모델로 인해 엎어지는 작업도 꽤 많다고 합니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귀가 튀어나왔다면 더욱 도드라지게, 피부가 붉다면 더욱 붉게, 추하다면 추할 특징. 살이 늘어졌거나 턱이 접혔다거나 하는 정작 모델들은 자신의 모습에서 빼고 싶을 특징들에 매달려 꼭 그려내고야 맙니다. 그러한 그림은 모델을 닮기도 하고 왜곡하기도 하여 묘하게 닮은, 묘하게 다른 인물이 됩니다. 모델을 얼마만큼 충실하게 그리냐에 대해서는 모델마다, 또 작가마다 견해가 다를 겁니다. 프로이드의 경우엔 다음 문장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자연을 섬기고자 노력하는 미술가는 그저 수행적인 미술가일 뿐이다. 그가 그토록 충실히 복제한 모델이 그림 옆에 함께 걸리지는 않을 것이고, 그림은 단독으로 그곳에 있을 것이므로 작품이 모델을 정확하게 복제했는지 여부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한 그림은 그저 단순히 우리에게 삶을 상기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확히 삶을 반영하기 위해 그 자체 고유의 삶을 획득해야만 한다.”
마틴 게이퍼드 저 [내가, 그림이 되다]에서 인용된 1954년의 프로이드 글 48p, 108p

그가 의뢰받은 그림을 그린 일은 적다는 점, 그리고 신분이 널리 알려진 모델을 제외하곤 담배를 피우는 사람, 한 남자와 그의 딸, 파란 스카프를 맨 남자 등으로 그림의 제목을 삼은 점과 함께 위의 글들을 참고해 말해보자면 프로이드는 자신이 매력을 느껴 모델로 삼은 개인의 고유함을 인간 자체의 어떠함으로 그려내려 한 것일 겁니다. 참. 그림 잘 그리면서 글도 잘 쓰네요.
프로이드의 살덩어리 가득한 그림을 보며 받는 많은 좋은 것들 중 하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고민할 바는 더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에 있음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겁니다. 물론 사람이 더 좋은 그림에만 고민할 수 있는 것은 무척 사치스러운 일이지만, 갈팡질팡하는 때에 내가 바라볼 큰 덩어리를 다시금 발견하는 것은 무척 소중한 일이죠.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화 모델이었던 마틴 게이퍼드가 프로이드와 나눈 대화를 책으로 냈는데 그 책이 최근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었습니다. [내가, 그림이 되다]라는 제목입니다. 저자는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인터뷰집을 내기도 했죠. 둘 다 무척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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