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뒷 표지 담당의 썰 (2) -10/9에 수정

월간이리 13년 1월호:마리나 아브라모비치, 2012




우헤헤 월간 이리 1월호가 나왔습니다.
월간이리 2013년 1월호(클릭)http://postyri.blogspot.kr/2013/01/2013-1.html
위 링크를 통해 웹에서도 월간이리를 읽으실 수 있어요.

그럼 1월호도 나왔겠다. 썰을 풉니다.

(2)
두루 두루 크게 말해 예술가는 콘텐츠 제공자입니다. 예술작품이라는 콘텐츠를 내놓는 이로써, 작품의 질은 예술이라고 칭해질 때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놓는 사람 개인의 수준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의 수준은 그가 타고난 바와 그것을 연마한 정도입니다. 모두의 출발선이 다르고 삶 중에 터지는 아이템 운도 다르고 하여, 목적지까지의 도달한 시간이라든가 따낸 점수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결국 눈에 볼 수 있는 척도로 우열을 가립니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부당함은 어쩔 수 없으나 사람들은 자기의 잣대가 가장 합당하다고 여기지만 가장 덜 부당한 것 뿐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금 제 잣대를 내미는 겁니다. 제가 뽑은 예술가는 제 잣대로 볼 때, ‘타고나고 연마되었다.’ 싶은 사람들(이자 제가 알만큼 유명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진 편향됨을 건강하게 키웠다고 봅니다사람들을 나무라고 치면 그 줄기나 가지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다는 겁니다. 나무의 유전인자는 둘째 치고 늘상 그늘져있는 곳엔 가지가 잘 가지 않고, 땅속에 바위가 있다면 뿌리가 구부러지겠죠. 그런 식의 편향 가능성이 사람에게 있는데, 예술가는 그중에서도 특히 굽어자라기 쉬운 인간유형이고 이제는 편향을 권장받기도 합니다. 편향권장에 대해서 제 짧은 생각은 사람들은 번뜩임의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건데요.

영국의 부유하고 명예로운 가문 출신으로 풍요로움에 익숙했던 작가는 아버지의 인도 발령으로
인도에서 살며 마주한 식민지의 삶을 통해 겪은 고뇌를 그림을 통해 드러냈다.*

예처럼 뚜렷한 인과관계를 출처로 그림을 이해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삶의 고통을 마주할때마다 자극되는 창조성이 그를 몰아갔다. 그는 피를 뿌릴 수 없어 대신 물감을 뿌렸고,
그 위에 굴렀고, 핥았고 신음했다. 마침내 만들어진 화면은 그 영혼의 울부짖음 그 자체였다.*

식으로 예술가의 광기, 기이함의 소산으로 말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두 예시 다 있을 법하게 지어낸 겁니다.

아마 그 편이 더 신비롭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은 신비의 자리를 너무 많이 잃었고 예술에게 잃은 신비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예술가가 품은 창조적인 무엇을 인위이나 인위를 넘은 것이라고 평가하고, 그 활동을 하는 예술가를 그림자가 없는 인간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의 광기가 그 예술의 진실함을 담보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워져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예술가의 광기는 공유되지는 말았어야 했습니다. 공유는 반복 노출의 가능성을 높이고 반복 노출은 곧 학습이죠. 광기를 학습할 수 있다는 말은 광기의 태도만을 배운다는 소리에요. 광기가 예술의 척도라고 여기는 것은 결국 예술가를 지망하거나 그 태도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광기의 태도를 권장하는 것입니다. 예술가의 기이한 태도는 수급에 맞춰 소비되고 있어서 연출과 진짜사이에 헤매기가 피곤합니다. 학습된 광기가 대중에게 다시 한 번 먹거리로 제공되는 것도 막을 순 없지만 막고 싶은 일입니다.

물론, 편향됨=치우침은 중립의 자세로는 균형이 맞을 수 없을 때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변화가 필요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그렇지만 권장될 바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테트리스 게임에서 작대기는 길이방향으로 자란 편향의 결정체이지만 그게 아주 절실할 때가 있죠. 한방에 4, 5줄을 소멸시켜 노력대비 큰 쾌감을 주고요. 하지만 그것만을 기대하는 테트리스는 조화가 깨져 산으로 가기 쉽습니다.

제 잣대에 대해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저는 타고난 것에 덧입어 풍부한 혹은 설득력 있는 = 내실 있는 계속해서 제공할 수 있으려면 제대로 된 인간이길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라는 말은 매우 깊이 있는 말입니다. 삶에 적용하자면 '제멋대로'와 혼동되는데 '제대로'는 훨씬 어렵죠. '제대로' 가고자하는 그들은 다분히 인간적인 자기 기준에서 인간이고자, 혹은 인간이길 초월하고자 하면서 주변 환경을 극복하고 자기를 형성합니다. 물론 어떤 계층이라도 사람은 자기의 환경을 극복해야합니다배고픈 사람은 배고픔을배부른 사람은 배부름을 말이죠그렇게 자기극복과 자기형성의 진실함에 목마른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은 훌륭한 태도를 지닌 것입니다. 예술가 뿐 아니라 어떤 삶의 모습에서도 제대로를 추구하며 살 수 있을 것인 그러한 성질입니다.

'자기극복'은 '자기형성' 내지는 '자아실현'을 배척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둘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줄 수 있는 태도입니다. 제대로와 제멋대로의 차이인 것인데요. 나무는 자라는 것이 본성이지만 자라기 쉬운 쪽으로 치우쳐 자라는 것을 극복해야 건강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며, 건강하게 유지된 생명이 결국 건강한 열매를 줄 것이라는 간단한 사고방식이죠. 제대로 먹는 것과 제멋대로 먹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보시면 이해하기 쉽겠습니다. 제대로 먹으면 좋은 똥을 쌉니다.

똥이 흙으로 돌아가 거름이 되는 세상의 환원을 저는 정말 사랑합니다.
사람 또한 그런 환원의 일부임을 볼 때, 정말로 사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