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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함에 대해 말하려다 길을 잃은 글

무언가 쓰거나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다행이라는 마음도 함께 든다. 내가 뱉어놓은 것들이 산발적으로 쌓인 모양을 바라보며 답답한 와중에 글이든 그림이든 새로운 것이 나오면 그 것을 다듬는 동안 나는 내 시간을 잘 채워나가고 있구나-하면서.

[그림여행을 권함]이라는 책의 프롤로그에 이런 글이 있다.
-가장 기본적인 물음에서 시작해 보자. 그림이란 뭘까? 그림은 명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동사이기도 한 말이다. 나는 이런 구조의 말들이 좋다. 꿈을 꿈. 삶을 삶. 그림을 그림. 이런 말들에는 결과와 과정을 동등하게 중시하는 뜻이 읽힌다. 이런 의미에서, 그림이라고 하면 대개 종이에 남는 결과물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나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행동, 더 자세히 말해 그리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변화이다. ...-
김한민 저_그림여행을 권함_민음사_11p

그림이란 뭘까?-하며 저자는 그림의 정의 대신 그림을 그리는 행위. 그림 그리는 중이라는 상태에로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무척 아름다운 인도라고 생각한다. 그가 주목하는 ‘시간의 변화’를 수양에 붙여서 말하려고 한다.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고 다 마쳤다-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 해서 재차 반복하는 것을 갈고 다듬는다 하고 그것은 일종의 수양이다. 수양이라 하면 편안함을 배제하고, 편리함 또한 지양하면서 몸을 닦고 마음을 닦고 도를 닦는 일이니까. 편리하고 편안한 방법으로 갈 수 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몸을 쓰기를 선택하는 일 또한 수양하길-수도하길 택하는 거라고 할 수 있다. 쉽게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택한다거나 우유팩을 버릴 때 물에 행구고 펼쳐 버리는 것 같은 식으로 좋아, 불편을 감수해보자- 하는 건데 그러기를 택할 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게는 크게 두 가지로, 첫째는 편리하고 편안하려고 건너뛴 것이 지속해서 뭔가를 상실시킴과, 편리하고 편안한 것으로 아낀 시간을 내가 제대로 채우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과정을 건너뛴 결과물들을 늘 손에 쥐고 있다. 돈 주고 사는 것은 다 그러하니 그중서 고기의 예를 들어본다. 오늘날 고기는 가공된 상태로 깨끗하게 포장되어있다. 가공육을 사다가 요리하는 것은 손쉽고 빠르다. 생명을 잡아 거두고, 다듬는 길고 복잡한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그 시간과 노력을 우리는 값을 지불하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맡긴다.

질문한다. 만약 고기를 먹기 위해서 동물을 잡아와 목을 따고 털과 내장을 제거하고 부위별로 나누기를 무조건 해야 한다면 고기를 지금처럼 자주 먹을 수 있겠는지? 기꺼운 마음으로 동물의 목숨을 거둘지. 살을 나누는 일에서 어떤 의미를 찾게 될지. 차라리 채식주의자이기를 택할지. 무척 번거롭고 까다로운, 그리고 비위를 상하게 하는, 힘에 벅찬 일을 고기를 먹기 위해 하게 된다면 고기를 먹는 일은 우리에게 좀 더 다른 무언가가 되지 않겠나?

고기를 잡는 일만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들의 보이지 않던 과정을 체험하는 일과 같은 것들은 우리에게 능동적임에 속한 귀찮음을 선사한다. 조금 능동적인 태도로 우리는 익숙했던 것의 낯선 면을 보게 되고 낯선 앞뒤로 전후 관계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들 중 일부는 우리가 다른 모양으로 살기를 결심하도록 이끌 수도 있다. 우리가 생략하고 있는 경험들에 다른 삶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거다. 그런 하에서 비약하자면 편리함은 우리에게 기회박탈을 선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와 삶의 다양한 모양을 선택하기 위해 백정의 일을 만민에게 돌리겠나. 어떤 시대의 만민이 백정의 일을 기쁘게 자기 일상에 포함시키겠나. 어떤 문명이 자기의 만민에게 백정 일을 고루 돌리는 시스템을 만들겠나. 그러면 이제 만민은 어떻게 사서 수고로움을 겪어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갈 것인가.

수고로움에 드는 시간. 어떤 수고로움으로 우리의 시간을 들일까. 시간을 들임은 시간을 채움이기도 하다. 편리함속에서 우리를 환기시키는 것은 어떤 값을 들여도 빠르거나 느리지 않는 시간을 그 자체로 진실하게 보내는 것. 그 것은 몸과 정신이 같은 속도로 차오르는 일.

휴..

내가 암만 글쓰기를 발휘하여 다듬어봐야 사상이 누각하다. 소로가 월든을 썼을 당시 내 또래였는데 말이다. 나는 경험이 짧은 탓에 낭만적인 상상에만 의존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도축이 일상이 되면 도축은 신비롭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도축해본 일이 없다. 닭 잡는 것을 구경하거나 사슴 뿔을 자르면 피가 솟는데 그것을 받아 마시는 것이나, 개를 잡아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것에 참여해본 따위가 그나마 경험일 것이다.

문명이 가져다준 편리와 편안을 거부하는 것이 모두에게 권할 선한 것은 아니다. 실상은 쉬기도 바쁜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시간을 흘려보내지 마세요. 수양하세요!라고 말한다면 그런 나의 말을 듣는 것 자체로 짜증을 참느라 이미 충분한 수양이 되겠지. 그러나 판 벌린 김에 계속 글을 잇는다,

편리함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지만 우리는 익숙한 만큼 편리함을 잘 다루진 못하고 있다. 축지법 같은 거다, 땅을 주름 잡아 걷는 도술도 좋지만 빨리 도착한 곳에서 무엇을 할지가 중요한 거다. 땅을 주름 잡을 만큼 도를 닦은 이라면 도착한 곳에서도 도를 펼치겠지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우리가 축지법을 돈 주고 산다는 것에 있다. 빨리 도착한 곳에서 사람들이 헤매고 있다. 빠른 걸음으로 도착한 곳이 암만 높아봐야 아무것도 없으니 사방을 둘러보는데 무엇이 보이나. 여기 저기 급한 발자국들만 가득 남은 땅에서.
황폐하다.

나는 애초에 뭘 적으리라 기대했던 걸까? 황폐한 와중에.

감나무의 감

먹으면 싸지만 싸려고 먹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똥만을 소화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인류를 일컬어 자신들을 위해 먹고 싸는 존재로 칭하지 않을까. 물론 그런 존재는 없지만 우리가 그런 식으로 존재의 이름을 붙인 많은 것들이 얽혀있는 세계가 있지. (갑자기 박테리아가 떠오른다.)
그 무엇도 무언가의 목적이지 않는 삶으로. 무엇도 무엇으로 분리되지 않는 삶으로 살 수 있는 건가. 아니, 그런 것이 추구할 만한 상태일까? 아니면 염두하는 것으로 족한 건가, 혹은 추구하는 것을 통해 겨우 염두하는 것뿐일까.

잘 익은 감은 감나무의 추구할 바라고 가정했을 때,
감이 초록색인 채 땅에 떨어져있었다. 나는 초록색 감을 보고 울었다.
0 감이 나무를 놓친거냐 나무가 감을 놓친거냐 하면서.. 큰 슬픔.. 큐
그러다가
1 감이 땅으로 자리를 옮긴 건가. 아니면 감을 땅으로 옮겨준 건가?
하면 이제 울음을 그치고 헷갈리면서
2 아, 그냥 감이 땅에 있는 것인가.
그리고 나서는
3 감은 감이 아니고, 감나무도 감나무가 아니고 땅도 땅이 아니라서 덜 익었다는 말은 엄밀하게는 생명의 차원에서는 잠시 현신한 존재외에는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딴 식이 되고 그러면 이제 나는 왜때메 운거지?하고 거지가 된다.

덜익음을 0적인 상태^^에서 말해 쓸모없는 상태라고 해보자. 맛이 있길 하냐, 씨라고 여물었길 하냐. 완전 딴딴해서 감나무 아래 있다가 정통으로 맞고 골로 가는 거지. 사인 땡감..
자기의식을 가진 한 인생이 생명 대순환의 틀로 자기를 보면서. 자신의 쓸모와 쓸모없음에 대한 괴로움을 1-2자기가 지금만 존재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3무갈등의 상태로 접어든다면
그것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인가, 자기 만족으로 족해서 외부의 어떤 판단도 필요치 않은 상태인가, 그 상태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의 자기 만족도 자기 만족 외의 어떤 가치를 갖지 못하나?

그가 그렇게 족했다면 외부가 그를 강제할 것은 뭐냐 싶지만. 그렇지만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인간'인 채로 '혼자 온전해버린 개인'이 도대체 뭐냔 말야. 그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관계들에 기생해서 살게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게 아닌가. 그 사람이 사회, 사람들의 곁을 떠나지 않는 한 말이다. '나는 한시적으로만 나다. 오 우주적 생명 졸쩔'이라는 결론을 얻은 자로써 치여 사는 사람들의 어떤 '인정'을 받으며 그 인정으로 인해 자기의 비생산을 그들의 여분으로 채워가며 기생하듯 살게 될 수도 있다는 거다.
잉여의 존재에게 실제적인 후원을 하거나, 기부를 하거나 하는 식으로 그를 계속해서 존재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어떠함인가.
결국엔 이 소리다. 나는 아직 고급예술이라 칭해지는 것들이 잉여를 바라봄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사회에 잉여가 넘치는 반면에 결핍도 넘치지만, 수요와 공급의 일치는 환상에 불과할 뿐임을 알면서도 내 앞가림도 차발차발하고 있다. 심지어 결핍은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차원적인 것으로 타도의 대상. 모든 결핍이 충족되는 것이 가능치도 않지만 결핍이 충족된 상태가 계속 될 수 또한 없는데. 내가 뭐라고. ㅋㅋ
감나무가 땡감을 떨어트리면서도 감 내기를 멈추지 않는다. 모든 감이 잘 익고 소화되는 채로 감의 형상을 잃는 것이 아니더라도 감나무는 감 내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아아아 내가 아무리 배고파도 감을 소화시키지 못한다. 
이쯤 쓰다보니까 내 문제는 그거 같다. 내가 감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

스스로를 넓은 의미의 순교자로 여긴 채 살아남는 삶이 기생의 모습이지 않으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자기의 노력으로 가능한가? 물론 작업하는 인간을 작품나무-예술나무로써 바라보는 건 너무 짧다. 심지어 예술가를 순교자로 칭하는 것은 낭만적이고.
게다가 순교자가 있다고 그 종교의 정당함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종교가 정당하지 않다면 순교는 헛된가? 신이시여..

보상, 혹은 목적이라면 무엇인가. 감나무의 감인가, 감나무의 익은 감인가, 감나무의 익은 감을 누군가에게 먹임인가, 감나무의 감나무인가..

달을 가르키는 손끝을 본다고

달을 가르키는 손끝을 본다고 뭐라고 했겠다,
네가 달을 가르키니 달 보기는 커녕, 손끝을 쫓아 흘러내려와 너를 빤히 보는 사람.
달을 가르키는 손끝을 쫓아내려와 너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네가 온전히 달을 가르키는 물음일 수 없음을 깨달아라.
너는 달의 온갖 반영이며 너일뿐임을 지각한다.
질문과 대답이 각각으로 감지되지 않고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자아만이 유효할 때.
옥죄이며 다가오는 유효한 자아에 대한 발견을 확장된 의미라할까 압축된 의미라할까 정수로써의 의미라고 할까.
정작은 나를 보는 시선으로 스스로를 감지하는 것에 어쩔줄모를 따름으로 큰 오류인가.
아 식물이 되어간다. 작은 멸종과 작은 멸망의 먼 세대를 거쳐 여기에 심겨도 자라고 저기에 심겨도 자라는 식물로, 나의 건강함이 세상의 무엇이냐 묻는.

이 작품은 허구입니다.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소설이나 웹툰 등을 보다보면 창작물이 허구임을 알리기 위해 '이 작품은 허구입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라고 명시해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 문장을 명시한다고 그것이 작품과 실제간의 선긋기가 되지는 못한다.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실제하는, 실제했던 이야기냐고 물을까봐 작가가 이와 같은 의미에서 사족을 달았다면 정확하게는 '이 작품은 허구입니다.'의 표현에서 끝나면 된다. 혹은 '인물 및 단체는 실제가 아닙니다.'까지 표현하면 된다. 도대체 '실제와 연관이 없다.'는 무슨 소리인가.

나는 이와 같은 표현이 공적인 작문 특유의 성질 -공중에게 예의바르게 말하려다보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음-이거나, 작품이 갖는 공적위치에 대한 작가의 방어적 태도의 발현-나는 소송걸리기 시름시름-이라고 생각한다.어떤 허구도 실제와 온전히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연관이 없습니다'이지 못한다. 작품의 요소와 사회 요소를 하나 하나 대응시키며 창작한 것이 아닐지라도 작품은 실제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실제를 기반으로 창작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다.

그래서 작품과 현실사이에 선을 그으며 개인의 창작물일 따름이라 하는 것은 결국 방어적 태도이다. 작가가 방어를 선수치는 것은 특정 작품이 특정 실제의 반영이냐가 문제시 될 때, 이를테면 특정 종교를 비판하거나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하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에 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논란이 될 상황이라면 작품이 다루는 시대상황이 사회문제로 떠오를 때일 것인데, 작가가 자신의 작품은 실제와 연관이 없다는 태도를 포석으로 깔아두었다면 그것은 책임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작가는 창작자라는 존재로써의 사회적 위치에 무책임한 것이 된다. 작가는 발언권을 가지고 연단 위에 선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연단 위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작가가 창작해 낸 이야기는 사회에 대한 비유이며 그 자체로 사회상에 대한 증언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허구입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연관이 없습니다.' 이 문장에 담긴 태도를 경계한다.

그런데 사실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내놓으면서 이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의 분위기에 대한 증언일 수 있다.. 창작의 자유가 위협받고 그보다 더 강력하게는 토대 자체가 털려버리는 것이 가능한 사회. 사회에 대한 은유가 사회에 대한 증언이 되어버리는데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미치는 영향력에 비해 자신을 지킬 수단은 갖지 못한다. 언제든 발언권을 박탈당하고 연단에서 밀려나버린다. 

작가에게 스스로 살아남기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사회적 책임 마저 요구하는 것은 웃긴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작가의 방어적 태도를 극복할 책임감 운운하려다 길을 잃은 것은 주제파악을 하느라 그런 것이다. 그런가?

알고 싶은 것

가게 오픈 준비중에 온 손님이 사장님과 몇마디 나누더니 날 보고선 대뜸 얼굴이 안 좋아 뵌다고 했다. 나는 당황하며 립밤을 발랐는데, 알고보니 그분은 직업으로 신점과 관상을 보는 사람으로 얼굴이 안좋다고 한 것은 몸이 안좋아 보인다는 소리였다. 사장님이 내가 호주 갈거란 이야기를 했더니 외국에 나가면 몸 상해서 돌아올거라고까지... 게다가 덧붙이길 성향자체가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라 후회가 많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였다.

여러분이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다. 내가 알기로 나는 일을 저지르는 편이 아니다. 그로인한 후회도 없다. 나는 몹시 얌전하여 차라리 내가 뭐든 저질렀으면 하는 사람이뮤다!!!..
휴..
그리하여 건강에 대한 얘기도 딱히 과녘에 꽂히지 않는데다가 요청도 안한 생애 최초의 관상인데 부정적인 말만 들은 나는 몹시 불쾌해져서 '조용히 귤머겅ㅋ' 하는 마음으로 귤을 드렸다. #농담

자기자신과 자기의 미래를 알고자하는 바람은 늘상의 것. 자기의 이야기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무척 재밌는 이야기이다.특히 게중에서도 손금과 관상은 초면에 말트는 방법으로도 쓰일만큼 일반다수에게 재밌는 꺼리이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먹고 살 자리가 있는 거다. 
(커밍아웃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식팔자에 이성이 없다는 점괘가 나오는 것으로 점쟁이를 신뢰하기도 한다고.)

대다수가 알길 원하는 알 수 없는 미래. 당장 보지 못하는 것을 당장에 가늠하게 하는 것. 사람들은 자신이 경청할 자리를 그것을 위해 비워두고 그리하여 미래를 내다본 다는 이들이 사람들의 그 빈틈에 자리를 잡고 육체를 보존한다.
(최근에 용한 친구가 봐준 손금에 의하면 나는 이 시기를 지나면 트인다 했으니 그것을 기억해둠. 흥하면 복채 ㄱㄱ)

다루기도 벅찬 과학의 시대임에도 동시에 서양의학에서 취할 바는 외과뿐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팔 떨어지면 한의학으론 못 붙이닝겐. 그 외엔 많은 비과학적인 것에 마음이 가는 그런 사람들은 인간생명의 것은 과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영혼, 신, 운명, 사후세계등의 얽히고 섥힌 무언가로 채운 사람들로써 세상에 인간이 모를 신비한 구석을 남겨둔 것일테지. (그 구석을 신전이라 할 수 있을 거다.)
아아 컴컴한 구석이 필요한 사람들. 온갖 이성적 지혜를 다해 사업을 벌여놓고 고사를 지낸다. 
베일에 쌓인 구석 마저 보고싶어함.

거울이 한창 고급 기술을 요하며 개발되던 시기에 거울은 무척 사치품이었다. 예배중에 거울보지 말라고 주의시켰다고 한다. 마치 지금의 스마트폰처럼. 비단 예배에서뿐 아니라 거울을 보는 행위자체까지도 사람의 영혼을 망친다며 경계를 했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보길 원하는 것, 우리가 원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한채 볼수 있게된 많은 것에 태연하게 둘러쌓인 시대.
궁극적으로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빈대떡의 더러움과 두려움

가끔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의 일이다. 시간은 밤이었고 평소보다 늦게 귀가하여 일탈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몇몇의 친구들과 함께 버스정거장으로 가다가 건너편 음식점 앞에서 두 성인이 키스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아주 강렬했다. 그때 나는 어렸다-가 아니라 두 성인이 다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그 키스가 많이 길었던가? 음식점 아줌마가 바가지로 그 둘에게 물을 뿌려버렸을때 그들이 계속 부둥켜 안고 있었던가? 아줌마가 그들에게 꺼지라 했던가?
친구들 중 그 장면을 본 것이 나뿐이어서 나는 친구들에게 남자 둘이 키스하는데 아줌마가 물을 뿌렸다고 말했다. 친구 중 하나가 더럽다고 했다. 내가 더럽다고 하자고 얘기를 꺼냈던가? 그냥 그랬다는 것이었던가? 더럽다고 하니까 얼떨떨해서 더러운 건가보다 생각했나? 아니면 동조했나?
아줌마가 물을 뿌린 게 가게 앞에서 키스를 해서인지, 가게 앞에서 키스를 한 것이 두 남성이여서인지 잘 인지되지 않는 판에 뭐가 더럽다는 건지도 덩달아 인지가 안 되어 이따금 나는 이 일을 곱씹었다.

가게 앞에서의 두 남성의 키스는 어떤 면이 더러운가.

더러움.
바닥에 토악질을 해놓은 것을 보면 더럽다고 한다.
그 것을 순화하면 빈대떡을 부쳤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빈대떡은 더럽지 않다.
바닥에 빈대떡을 두면 구토자국으로 보여서 더럽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빈대떡을 바닥에 두면 더러워진다.
빈대떡을 먹고 토악질을 한 것이라면 더 더러운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어느 순간 더러워 진 것인가.
빈대떡을 부칠 때, 조금 식었을 때, 입에 넣고 씹을 때,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 소화액과 섞일 때, 영양소와 찌꺼기로 분리될 때, 배출될 때.
그 어느 순간에도 빈대떡은 더럽지 않다.
다만, 빈대떡이 그 과정에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게 되면 더러운 취급을 받게 된다. 접시에 있어야하는데 마루바닥에 있거나, 위장에 있어야하는데 길바닥에 있다면 말이다.
그러니 더러움은 일종의 제 위치에 있지 않음으로 받는 취급이다.

즉 두 남성의 키스는 공공장소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더러운 취급을 받은 것이다. 사적공간에서 키스를 하는데 순간이동을 시켜 더러워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것뿐인가?
두 남성은 부적절한 장소에서 키스를 했기 때문에 물을 맞고 꺼지란 소리를 듣고 그 장면을 목격한 청소년들의 입방아에 오른 뒤 15년 동안 잊히지 않은 것인가.
아줌마는 왜 하필 물을 뿌렸는가.

물이란 것이 몹시 의미심장하여 여러 경우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 째, 아줌마는 강렬한 더러움을 느끼곤 자신과 가게를 씻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더러움제거의 상징인 물을 뿌렸다. 덧) 소금물이었을 수도 있다.
둘 째, 물은 신의 가호를 비는 행위이다. 집안에 해를 입일지도 모를 악귀를 쫓아낼 때처럼. 오 주여, 두려움이 나를 잡아먹사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아멘.

(조악해서 지운 부분)

두려움.
빈대떡을 두려워해보자. 어떤 빈대떡이 두려울까? 빈대떡을 모르는 사람이 부쳐준 경우, 낯선 사람이 친절하게 건넨 에너지 드링크를 먹고 정신을 잃은 채 인신매매단에 팔렸다가 기적적으로 가족에게 돌아온 기구함의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면 도대체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는 빈대떡을 먹기보단 거절할 예의바른 핑계를 찾기가 쉬울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나는 모른다-에서 온다. 그 것이 주효한 것인지와는 별개로.
모른다.
나는 빈대를 잘 모른다-겪지 않았다. 나는 빈대를 소설 속에서 접했다. 소설이 내게 선지한 빈대는 궁핍하여 위생시설을 누릴 수 없는 인간이 전유하는 상상의 벌레로. 물리면 몹시 가렵다는데 그게 그러니까 아토피만큼 가려운 걸까? 빈대는 옮는다는데 서울역 노숙자들 사이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괜찮은 걸까? 하는 것이다.

사실 빈대는 더럽지 않다. 빈대가 있는 인간이 더러운 거지 빈대는 더럽지 않다. 고로 더 생각해보면 이 모른다는 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모르지만 알지 않겠다는 태도. 내가 아는 데로 알겠다는 태도이다.
빈대떡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길 원하지 않는다. 빈대떡에 나쁜 것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면. 빈대떡에 무엇이 들었는지에 대한 자신의 들음을 안다. 빈대떡이 두렵고 무엇이 들었는지 알길 원하지 않는다.
두려움의 정체를 알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빈대떡은 아무도 잡아먹지 않기에 몹시 억울할 것이다.

두 남성은 계속 부둥켜안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홍대앞 관극세모

대학 다닐 때 종종 받았던 나 개인에 대한 질문 중 곤란했던 것을 꼽아보자면
너는 남자친구 안 사귀니?(ㅋx100)와,
너는 너희 학교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니? 였다. 

홍대앞, 모두 알다시피 홍대앞은 홍익대학교앞을 지칭하지만 단지 홍익대학이라는 건물 앞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교 앞이 얼마나 번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그리고 그 번화함이 얼마나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름으로. 전자의 의미로 홍대앞을 물으면 얼마든지 알지만 후자의 의미로 홍대앞을 묻는다면 나와는 먼, 내가 알 수 없는 어떠함을 대표하는 이름이 된다.

나에게 홍대앞의 어떠함 : 풍부함과 과잉을 오가는 번화함은 내게서 등 돌린 무엇이었다. 내가 영영 알지 못할 어떤 열심들이 잘나간다는 모양새로 있었고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몹시 힘이 드는-피곤한-여건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저 곳은 뭐하는 곳일까 궁금하다가도 막상 비용을 들여 알긴 벅찼다는 것이다. 일단은 돈. 많이들 그렇듯이 한정된 수입아래서 줄일 수 있는 지출은 식비와 여가비니까 값이 싼 학교 안에서 해결하게 된다. 돈만 비용이 아니다. 돌아다니자면 시간, 감정은 물론이거니와 때론 용기까지 필요하다. 싸이월드에 누군가 올린 맛있어보이는 음식사진이나 멋있어보이는 어딘가를 보면 부러워는 잘했으면서도 막상 가보자는 안 되는 것이 후자의 비용도 한 이유인데 아무튼 그런 고비용을 부담하기에 나는 대부분 부족하였던 거고 그러니 홍대앞에 놀러갈건데 좋은데를 알려달라면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해 장난섞인 핀잔을 받았던거다. 느이 학교앞도 모르냐는 거지. 조금 주눅들기도 했었는데 이제와 보면 학교안에만 있었어도 답답한 걸 몰랐던 것이라 어쩌면 형편은 차치하고 나는 그냥 번화함을 즐길 기질이 아니었지 싶다.

그럼에도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소(와, 있어 보이네, 나 연구원이었음 ㅇㅇ)도 그만둔 뒤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홍대 앞에서 일을 찾았던 것은 왜일까. 하필 밥집일 것은 무엇이며 하필 서빙일 것은 무엇일까. 집 가까운 일산에도 가게는 많은데 영 내키지가 않았던 것은 무엇일까. 

홍대앞이 이 문화 저 문화 돈으로 짜깁기된 가장행렬 놀이동산이라 빈정댔으면서도 내게 등 돌린 풍경이라 여겼으면서도 내 자리를 갖고 싶을만큼 나는 이 별스러운 번화함이 좋았나. 번화함에서 헛헛함을 느끼고 그럼에도 그 번화함의 주변에 박혀있고자 하는 태도를 가졌다. 이를 뭐라해야 좋을까.

가게의 잠긴 문을 열고 오픈 준비를 할 때, 마감을 마치고 불 꺼진 가게 앞에 느긋하게 앉아있을 때, 일하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먹고 마시고 대화하며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몹시 좋다. 내가 일하는 일했던 곳들이 나는 좋고 남이 놀러오는 곳에 일하는 사람으로 있는 것도 좋다.

나는 RPG(롤플레잉게임)의 유저가 되어 게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게임의 NPC(논플레이어캐릭터)이길 바라며 NPC중에서도 상점 직원으로 사람들이 포션를 사거나 장비를 갖추는 모습을 보는 셈이다. 나는 포션도 장비도 갖추지 않지만 그 곳에 있을 수 있다. 포션도 장비도 필요없는 채로 게임의 번화함에 위치하고자 하는 태도. 어쩌면 결핍을 자조 내지 자족하려는 태도에 의해 왜곡된 행태가 아닐까.

결핍에 의한 태도도 태도이고 왜곡되서 자라는 것도 성장이라면 성장인가. 나는 이것이 좋은데 좋아서 좋은가 좋아해야해서 좋은가. 뭣하러 따질까면 그냥 누구나 익히 그렇듯 제대로 못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번화함을 징그럽게 여긴다면서 자처해 번화함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느끼는 만족감에 대해 불안했다. 가장행렬같은 번화함 중에 내가 일하는 곳의 진정함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되는 일은 내게 비약하자면 꽉막힌 중에 구멍을 뚫음과 같다.

가슴이 답답하다 바늘구멍이라도 뚫어 놔야 내 생명이 숨을 게 아니냐
(조지훈/관극세모觀劇歲暮)

이거다.
내가 다닌 학교 앞이 국가적으로 손꼽히는 번화가더라. 끝-의 마인드맵이면 좋았을까. 아니다. 번화함의 구석구석 번뇌거리로 찾는 글썽맞은 인간형일지라도 그러니 더욱 좋아할 구멍을 찾는 것은 필요한 잘하는 일이다.

다만 내가 해결해야할 것은 일을 마친 뒤 절인 부추 같은 채로 집에 와 남겨온 부추무침을 집의 식탁에 올려놓으며 느끼는 심정이다. 음식의 유용함을 유지하는 보람과 유용한 음식을 가족에게 전달하는 보람에도 내가 가족에게 주는 유용함이 이것임에 대한 절여지는 심정.
아, 절인 부추처럼 고단하고 절인 부추처럼 맛있고 그럼에도 절인 부추일 뿐인 삶을 계속 사랑하려고 구멍을 뚫는다. 생명이 와서 쉬었다가 그림을 뱉고 곧바로 번화함에 묻힌다.

언제쯤 제대로 감당할까.

9월입니다.

집에 들어가는 문을 열면 쾌쾌한 습한 냄새가 찡합니다. 실제의 우리집에 도착하기엔 두 개의 문이 더 있는데, 하나는 늘상 열려 있다가 가끔 주변의 불길한 소식에 잠기는 문, 또하나는  집의 사각형을 지켜주는 문으로 역시 늘상 열려있는 문입니다. 어쨌든 두 문을 더 지나서 집에 도달하면 사실 아까만치 쾌쾌하지 않습니다. 쾌적해진달까?
오늘은 얻어마신 맥주가 꽉 차 집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향합니다. 화장실로 가기 위해 사각형의 다른 쪽 문을 열고, 슬리퍼를 발끝에 걸고 부랴부랴 뛰었죠.
사실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저는 쾌쾌한 냄새를 맡음과 동시에 이 글을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이런 상황을 적을 자격이 내게 있는양 생각했습니다.
어떤 상황을 맞이했을때 내게 거기에 대한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서 말을 하고 있다면 나는 이미 하나의 기단 위에 서있습니다. 남들은 기단 아래의 평소에 서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곳은 보다 양지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제가 서있는 저의 기단, 그것은 적당한 궁상으로 정말의 궁상은 정말로 고난인데, 제게 있는 적당한 궁상은 그것으로 시비를 가리거나, 푸념거리거나. 여유시간을 소일할 건덕지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진정으로 극복할 실제의 무엇을 가지려하지 않고, 계속해서 주억거리며 퉁기고. 퉁긴것에 자빠지고, 자빠진 것을 끌어안고 왜인지 글썽글썽 울기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적당한 궁상의 끝에 그림을 그린 뒤에, 모든 것이 그림을 그리는 동력이 되어주었다 하면. 와, 진정성이 획득되고 있습니까?

언제까지 어린 심성이 솔직함을 무기로 든 채 자기의 삶에 삐져있을까요.



다른 것을 기대하고 방문하신 분들께 이것마저 봐달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반응이 무엇이든 제게 그 이후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월간이리 8월호 가브리엘 뱅상입니다.


8월호가 좀 일찍 나왔죠. 뱅상은 몹시 고운 분인데 그래서 곱게 그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는데 이것도 좋죠. 참 다행입니다. 닮게 그리지 않는다고 이분들중 아무도 제게 클레임을 걸지 않죠.
만사에 체념이 넘실대는 7월이었습니다.
그래도 방정리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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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뱅상 (Gabrielle Vincent)

피카소의 일화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제 부족한 글의 도입으로 삼겠습니다.

한 부인이 카페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피카소를 보고 자신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피카소는 몇 분간 여인의 모습을 그려서는 그림값을 묻는 부인에게 5000프랑을 요구했다. 부인은 놀라 항의했다.
"아니, 그림을 그리는데 몇 분 걸리지도 않았잖아요?"
그러자 피카소가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40년이 걸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각기 다른 매체에서 한 너 댓 번 접했더랬는데 몇 번인가는 화가가 달랐고. 또는 그림의 대상이 달랐고, 카페가 아닌 미용실이 되기도 하고 뭐 그림의 액수가 바뀌기도 하고 했기 때문에 파블로 피카소 내지 실존 화가의 이야기라고 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이야기의 성분이 바뀌어도 전달하고자 하는 맥락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무리가 없겠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 한 친구가 제 그림에 대해 평하며 했던 말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당시 저는 솟은 파도와 타일이 깔린 바닥을 그렸었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차치하고, 그 바닥타일 한 장이 그림상에서 대략 5mm정도의 크기였죠. 타일이 쫙 깔린 풍경이라고 고지식하게 타일을 한 장씩 그렸더랬죠...^^.
그 친구는 제가 타일을 일일이 그린 것과 같은 노동집약적인 면을 그림에서 보여줘야 사람들이 그림을 쉽게 받아들인다고 했어요. 그렇다고 동의했었죠. 일학년 때엔 과제로 레이스천이 깔린 정물화 그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 레이스를 또 일일이 그리고 앉았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 세밀한 부분을 하나하나 그리고 있노라면 내가 레이스를 그리는 이 노력이면 레이스를 하나 뜨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또 한번은 어시스던트 일을 할 때인데, 지붕이 많이 보이는 위치의 기와집을 그릴 일이 있었어요. 그 지붕의 기왓장을 하나하나 그리고 있는 제게 작가님은 회화적이지 못하니 다른 표현법을 써보라고 권유하셨었는데 제가 그런 식으로 좀 단순한 면이 있네요.
여하튼 그런 때에는 그림 속 타일을 팠다-레이스를 팠다-기와를 팠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죠. 팠다는 말은 곡괭이를 들어 땅을 팠다-우물을 팠다-수로를 팠다하는 것처럼 결실을 위해 노동이 필요함을 분명하게 의미하는데 그림을 그림에도 이 표현을 붙임이 자연스러운 겁니다. 노동이란 무엇입니까. 땀 흘려 수고하여 땅의 소출을 받는 것으로 태초에 받은 형벌이자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의 의무죠. 그래서 사람들은 으레 농부는 땅을 파길 바라고 학생은 공부를 파길 바라고 화가는 그림을 파길 바라죠. 따라서 앞서 말한 일화에서 부인이 그림 그리는데 몇 분 안 걸렸는데, 그렇게 큰 돈을 요구하냐고 물은 것은 부인의 입장에서 합당한 이의제기입니다. 화가는 거기에 대해서 40년이 그렸다고 응수함으로써 자신이 그은 그 획 획들은 자신의 평생을 쌓아서 이룬 경지이므로 노동량과 투입시간을 따지자면 보이지 않는 시간과 보이지 않는 노동이 담겨있음을 알려준 것이죠.
가브리엘 뱅상은 벨기에 브뤼셀 태생의 동화작가로 저는 ‘그 어느날 한 마리 개는’(또는 ‘어느 개 이야기’)이라는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스마트 폰을 들어 검색해보시면 그녀의 뛰어난 드로잉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동화책하면 떠오르는 다채로운 색이나 과장된 그림체, 혹은 의인화된 동물들은 없고 대신 부드러운 검정 목탄으로 때로는 휘갈기고 때로는 가만히 그려낸 형태들이 있습니다. 그 단순함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작가의 역량 때문입니다. 얇아지고 굵어지는 선의 쓰임이 그리고자하는 바에 정확히 닿아있죠. 그래서 제가 앞에서 말한 보이지 않는, 축적된 노동량 운운한 것은 그녀의 그림에서 그러한 기운생동을 느껴달라는 말씀으로 덧붙인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피인 그림은 뛰어나다치고 내용은 어떤가. 저는 그녀의 다른 작품 ‘거대한 알’에 대해서 조금 알쏭달쏭한 느낌을 갖습니다. 일단은 동화책의 형식을 빌어 나왔으나 그것은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내용이라기엔 비유하는 바가 큽니다.
내용을 잠깐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거대한 알’은 어느 날 거대한 새가 거대한 알을 낳고 떠나면서 시작되는데, 그 거대한 알을 발견한 사람들은 알 주변에 모여들어 살기 시작해서 어느새 도시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알을 중심으로 유원지를 짓기도 하고 신이 나있죠. 그런데 그 알에 금이 가며 새끼 새가 태어나게 되고...
나머지는 책을 통해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
사실 제가 동화책에 대해 갖는 의문은 어른이 제시하는 아이들을 위한 무언가가 과연 얼마만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혹은 어른인 작가가 자신의 수준을 얼마만큼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낮추어 제시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새삼 깨달은 것은 누구를 대상으로 삼았건 딱 그 대상의 시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를 담을 것은 아니라는 것. ‘거대한 알’은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보다 더 큰 것을 담고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작가가 의인화시킨 동물들을 내세워 이야기를 한 동화집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드리는 ‘거대한 알’은 어린아이의 순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 접하여 평생 이따금 떠올리며 새로운 감상과 함께 자라날 각자의 이야기를 심어주는 것으로 그래서 작가의 모순을 깨닫기도 하고, 어릴 적과 다른 결론을 내기도 하며 함께 성장할 만한 이야기인 거죠. 그렇게 주인공들은 행복하게 살게 되었답니다-내지 그래서 주인공은 나쁜 버릇을 고쳤답니다-의 개과천선이나 권선징악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접한 뒤에 이따금 떠올릴때마다 새로이 질문을 던져줄만한 풍부함을 품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것은 이 작가가 하나의 경지를 이룬 것을 말하겠죠.


글·그림 지인 freshdrawing.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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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해와 신파

나는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 중에서도 만화책을 최고로 즐겨서 어릴 적엔 만화책이라면 일단 집어 들고 내용이 재미없어도 재밌게 읽었다. 그러니 만화책을 통해 배운 단어들도 참 많을 테다. 물론 요새도 만화책을 좋아하지만 학생 때만큼 읽지는 못하는데 특히 중, 고등학교 다닐 적엔 참새 방앗간 격으로 학교 끝나면 만화대여점을 들렸었다. 사실 그 나이 때라면 가지고 있는 경험과 함께 국어사전 또한 빼곡하다고 스스로 자신할 테고, 어디서든 낯선 단어를 접하면 이 단어가 잘못 사용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 오타인지. 내가 모르는 단어인지 파악할 수 있다. 몰랐던 단어라면 문맥상 어떤 뜻인지 가늠하고 금방 다시 적용할 수도 있다. 그 활동은 매우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일상에서 배운 단어들 대부분을 언제 익혔는지 기억하지 않는다. 내가 만화를 통해 많은 단어를 배웠을 것이지만 대부분 생각나지 않는 것이 그 자연스러움 때문이고 기억하는 두 개는 머릿속에 남는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지 않게 기억에 남은 두 단어는 곡해신파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이렇다. 곡해는 일단 오해의 잘못된 표기라고 생각하며 시작되는데, 그리 비슷하지도 않은데 왜 오타라고 생각했냐하면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언어 성적도 좋았던 터라 만화책에서 내가 모르는 단어를 접하리라고 생각지 못했기 때문. 앞뒤 문맥을 보면 오해라는 뜻 같은데, 곡해라고 적다니 오타다! 하면서 의도적으로 무시했던 것이다. 무시는 마음속에 뭔가 찝찝하니 잘못된 판단으로 계속 남아 있다가 친구와의 대화 중에 만화책에는 오타가 너무 많다는 이야기로 튀어나왔는데, 그때 그 친구가 곡해라는 단어는 있는 단어라고 말했고 나는 그제야 사전을 찾아 곡해를 발견했다. 나는 내가 모르는 단어가 만화에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곡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곡해했던 것이다. ^^;; 그 만화는 야자와 아이 작가의 나나’. 어쩌면 곡해하지 마.” 라고 말한 작중인물이 변호사 출신이라는 설정이었기에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일본에선 곡해를 자주 쓸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곡해를 늦게 접한 것이 맞겠지만 그런 식으로 언어 자신감에 찼던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이제 언어 자신감은 우물 개구리로 사라졌으니 곡해는 이제 그만하곡:> 신파를 얘기해보겠다.
나는 최경아 작가의 순정 만화 스노우드롭1권에서 신파라는 단어를 접했다. 작중 상황은 이랬다. 남자주인공은 고등학생으로,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아버지와 형은 죽었고, 막내 동생은 사고만 치고 돌아다닌다. 남자주인공은 어머니의 병원비를 벌기위해 학교를 자퇴하기로 한다. 남자주인공과 친한 여자아이 하나가 남자주인공이 자퇴한다는 것을 듣고 그런 남주의 배경 상황을 읊으며 왜 오빠만 희생해야하냐고 엉엉 우는 장면을 여자주인공이 자신의 보디가드와 함께 목격한다. 그때 보디가드는 남자주인공이 기구하다며 손수건을 물고 우는데, 여자주인공이 되레 정색을 하면서 말한다. ‘누구야, 저 신파는!’ 이라고.
신파, 신파라. 몹시 어렴풋했다. 신파적이다라는 용례를 떠올렸으나 신파적 또한 이해 못했긴 매한가지. 머릿속 사전의 다른 단어 중 하나로 파로 끝나는 노파가 있었고 당시엔 노파심도 흐릿하였던 초등학생 시절, 일단 노파와는 거리가 먼 것 같고 나는 신파=new() 새로운 등장인물, 그래서 누구야 저 새로운 캐릭터는? 정도로 곡해한 채 넘어갔다. 문제는 내가 이 만화책을 구입해서 보았다는 것으로, 만화를 다시 읽을 때마다 이 ‘New에서 뺑뺑 돌며 신파라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결론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거진 십년이 더 지난 지금 내게 신파란 비극에 취한정도의 의미로 새겨져있고 그래서 작중인물이 말한 신파는 스스로의 또는 주변인물의 비극에 취한 인물로 신파적인 인물은 기승전결의 승에 해당하는 강한 비극을 자신, 혹은 타인의 삶에 부여하는 그런 인물이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말한 신파란 비극양산자로써 비아냥의 대상이었던 것. 나중에 그 여주인공은 남주인공 못지않게 신파의 지위에 오르지만.
여하튼 내가 신파를 제대로 깨닫기까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다만, 과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과함이 비웃음꺼리로 칭해지는 것은 절제가 미덕일 때 가능한 것이며 신파란 본래 연극에서 출발한 것임을 보면 연극 요소로써의 신파의 과함을 비웃는 것이 과연 쿨한 행동이라 할 수 있을까? 연극에서의 큰 동작과 과장된 어조는 물리적 거리를 극복해야하는 것으로 그만의 매력이 있으며 그 맥락으로 신파도 이해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촬영기술로 거리를 극복하는 드라마의, 영화의 연기를 보는 것을 통해, 큰 착각에 빠져있다. 아무도 드라마처럼 살지 않는다. 누구도. 나를 관람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한 아무도 드라마로 살지 못한다.
왜 비극에 취한 인물을 위로하지 못하고 비아냥하는가. 자기의 슬픔이나 징징대고 싶은 부분을 맘껏 풀어버리지 못한 채 애매한 어른의 태도를 흉내내며 자란 탓은 아닌가. 신파라는 비아냥을 피하기 위해 쿨함을 가장하게 되고 그렇게 자기가 맘껏 울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울 때 어린애취급을 하는 동시에 다시 한번 자기의 어린아이부분을 묵살하는 것이 아닌지. 남의 신파를 받아줄 만큼의 여유가 성장하는 모두에게 있길 바란다. 그리고 모두 건강하게 성장합시다.
 
. 그러고 보니 만화 상에서 주인공의 상황에 대해 열을 올리는 것에 신파적이라는 대사를 했다는 것은 작가 자신이 자신의 설정이 신파적임을 자조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
 

월간이리 7월호 김범작가입니다.



이번호는 김범작가입니다.

http://postyri.blogspot.kr/2013/07/2013-6.html
월간이리 링크입니다.

http://issuu.com/postyri/docs/postyri1307web/41?e=5641367/3844431
이 링크를 통해 7월호를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웹상에서 보시는 페이지의 하이퍼링크가 살려져있습니다. 따라서 클릭하시면 해당 작가의 블로그나 트위터 등으로 연결이 된다고 합니다.
편집장님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6월에 한발짝도 못 움직였고 그에 덩달아 형편없는 기분입니다.
기분만 그렇고 형편없이 살진 않았지만 어쨌든 매한가집니다.
기운 빠지는 근황을 전하게 되어 면구스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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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 (Kim Beom)

‘왜 좋아?’ ‘그냥’
‘왜 좋아?’ ‘잘해서’
의 차이는 뭘까요?
‘좋다’와 ‘잘한다’는 틀립니다. 라는 말은 틀린 말이죠. 아시다시피 ‘좋다’와 ‘잘한다’는 다릅니다가 맞습니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분명히 다른 말이지만 혼용됩니다. 그리고 그 다르다-틀리다의 혼용이 문제되는 것은 저변에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는 차별정신이 깔려있기에 그렇고요. 좋다-잘한다도 마찬가지로 혼용되는 말사이인데, 이 경운 ‘좋다’의 의미가 워낙 넓게 쓰여 ‘잘한다’를 부분 포함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잘한 것이 좋다’라는 표현은 ‘좋은 것이 좋다’는 표현이상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의미의 겹침은 다르다-틀리다와의 관계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분명히 해야 할 것임엔 마찬가지인데요.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리기 쉽기 때문이에요. 뭔 소리냐면 잘한다-좋다-착하다/옳다로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게 좋은 것이 옳다로 스물스물 넘어가는 정신작용을 경계해야하는 거죠. 취미활동을 건강하게 발전시켜나가는 데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잘한다-좋다가 동어반복이 되는 중복 부분을 빼고 ‘잘한 것이 좋다’ 했을 때 잘한다-좋다는 좋다-잘하니까라는 판단과 근거의 관계인거죠.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 일컬어 ‘절대미’에 더 가까운 것은 내 기준에서 볼 때 잘한 것이고 그렇기에 좋은 것이지만, 좋다에 옳고 그름을 포함해버리는 실수를 한다면 그것이 사회의 도덕기준이나 가치평가의 영역으로 비어지는 거죠. 나에게는 좋은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옳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을 일단 못 박아야 해요. 이것이 당연한 것인데 때때로 의식하지 않으면 의식 사이에 교묘하게 감춰진 채 나도 모르게 작동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잘한 것이고 옳은 것이야. 너가 나와 다른 것을 좋아한다면 네 취향은 틀린 것이야.- 이렇게 자연스럽게요. 취미활동은 이런 태도를 경계하는 고도의 판단을 겸해야 하며 결국 취미활동으로 정신은 더 자랄 수 있게 됩니다.
잠시. 개인의 취향을 절대미로 말해서 싫으실지 모르겠는데요. 집단의식이 공유하는 미가 어떻든 제겐 절대라는 개념은 절대적으로 개개인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대를 추구하는 개인들끼리는 절대를 추구한다는 것만 공유될 뿐, 그 ‘절대’는 같지 않은 것이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절때리세요. 제 생각엔 절대가 절대인 것은 절대라는 개념 하에서만 절대인 것이고 개개인에게 절대는 다르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고, 내게 좋은 것이 옳은 것은 아닌 하에서 그리고 우리서로는 진짜 많은 부분이 같은데 개성인 부분만 다른 하에서만큼 ^^ 우리의 절대는 다릅니다-라는 것.
김범 작가의 작업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게시판의 포스터. 아마 2010년 아트선재에서의 개인전 알림 포스터였던 것 같습니다. 치타가 영양을 쫓는 영상을 영양이 치타를 쫓는 것으로 보이게끔 편집한 비디오 작업의 캡처가 그 포스터에 있었고요. 작품 제목 및 연도는 [볼거리(spectacle) 2010]입니다. 와, 좋다. 라고 생각했죠. 사실은 사진 작업인 줄 알았다가 후에야 비디오인 것을 알았지만.
이 경우에 ‘잘해서 좋다’를 적용하려면 무엇을 잘했다고 해야 할까요. 일단 예술작품이니까 미적인 의미에서 접근해야할까요? 아니면 비디오 작업이니 기술인 영상편집을? 이런 경우엔 발상을?
이렇게 그냥 좋다에서 멈추지 않고 왜 좋은가를 찾는 일. 즉각적으로 느낀 ‘좋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을 하도록 만드는 작품은 성공한 것일 겁니다. 어떤 것이든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은 결국 내가 본 작업을 마지막 도미노로 삼아 넘어진 도미노의 과정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도착한 첫 번째 도미노에는 어떤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세계관이 되었든 미적 기준이 되었든 간에요. 그 것은 절대미와 닮아있고, 내지는 닿아있고요. 사람들은 절대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작업이 되었든 삶의 다른 것에 있든 본인의 여정이나 결과물이 절대를 암시하거나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접했을 때 때로 그냥 좋다는 말로 두루뭉술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말로 표현이 안 되거나 말로 표현을 할 필요가 없거나인데 가끔은 말로 표현할 테면 말로 하지 뭣 하러 작업을 하나 싶기도 하니까. 좋아서 좋음을 내세우죠. 저는 김범 작가의 작업의 방향이 가르키는 절대에 공감을 하며 그것들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것은 즉 그냥 좋습니다. 그리고 그냥 좋기에 왜 좋은 가를 찾도록 시작하게 하는 것이고요. 그러니 ‘잘해서 좋다’보다 때로 ‘그냥 좋아’가 더 가능성을 품은 말일 겁니다.


글·그림 지인 freshdrawing.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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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이리 6월호 장 뒤뷔페 입니다


이번호 드로잉은 특히 맘에 듭니다. 음.. 네, 그렇습니다.
http://postyri.blogspot.kr/2013/06/2013-6.html
월간이리 블로그 링크입니다.

http://issuu.com/postyri/docs/postyri1306web/1?e=5641367/2856679
이 링크를 통해 월간이리 6월호를 보실 수 있습니다.

요근래 드로잉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딱히 업로드할 만한 그림이 없었기도 했고. 쳐지네요.
올해도 벌써 여름이라 자칫하면 말라죽은듯 보내게 될테니 고삐를 잡아야죠.
모두 필요한 의식주가 풍요로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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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뒤뷔페 (Jean Dubuffet)
‘나는 무엇을 잘 못해.’
이 말을 하긴 쉽습니다.
‘나는 무엇을 잘 해.’
이게 어렵죠. 왜 어려울까요?
겸손이 미덕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가장 크게는 잘한다고 자평할 ‘자격’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객관적으로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분야, 예를 들어 달리기 같은 경우, 국민 대다수가 자신의 100m내지 50m달리기 기록을 알기에 평균내기도 쉽죠. 프로선수와 비교하면 잘하지 못하지만 대중과 비교하면 잘하는 것일 때 편하게 ‘나 잘해’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수치화가 가능하지 않은 것 중, 감상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무언가를 감상하고 잘한다, 나쁘다 얘기할 수 있으려면 우선 그 무언가를 많이 접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접해도 영 감이 안 오는 분야가 있지만 접하다보면 적어도 취향은 생기니까요. 그런 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의 구분을 하는 것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접해가며 취향을 넓히거나 깊이 파고드는 것을 취미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 취미 하나는 피아노를 치는 것입니다. 잘 치냐고 물어보시면 멜로디를 왼손 코드에 맞춰 연주할 정도이지만, 꽤 좋아합니다. 집에 피아노가 있기도 하고요. 만약 집에 피아노가 없다면 저는 피아노를 치는 생활을 할 수 없겠죠. 우리 집에선 오로지 저만이 피아노를 칩니다. 다행히 소음문제로 이웃에게 헤를 끼친 적은 없었으나 각자 방에 있는 가족에게 폐가 되지 않는가하고 신경이 쓰이곤 해요. 그래서 가끔 엄마에게 여쭤봅니다. 너무 시끄럽지 않느냐고요. 그러면 엄마는 ‘엄마는 음악은 잘 모르지만 딸내미가 피아노 앞에 앉으면 좋아.’ 라고 말하십니다. 네, 저 사랑 많이 받고 자랍니...가 아니라, 그러니까 엄마의 말씀에는 ‘엄마는 좋긴 한데 음악을 잘 모르는 내가 좋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하는 태도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겁니다.
잘 모른다는 것은 많이 접하지 않았다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나 피아노를 치고 도서관에서 책빌리는 것처럼 흔히 연주할 공간이 있다면 아마 다른 생활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면 하는 것이다가 자연스러워지는 것을요.
무언가를 좋아한다-싫어한다 구분하고 좋은 것을 취하며 탐구하는 것은 개인 취향을 공고하게 하거나 혹은 다른 차원으로 높여줍니다. 그것은 삶의 질을 높이는 활동인 것이며, 건전한 취미생활 환경이 조성되어있는 것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크게는 사회의 문화융성과 함께 가는 말로 아마추어 감상자가 늘어나는 것은 잠재적으로 아마추어 생산자도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생산, 감상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거죠. 결국 풍부한 아마추어 대중은 그 문화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것. 따라서 무언가에 대한 이론을 깊이 알 때만이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풍토는 사회적 결핍을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에 대한 결핍이냐. 예술이 소수의 엘리트화 된 것에 비해 중간층이 즐길만한 여유와 환경이 없다는 것의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예술향유가 생활이 아니라 교양인 삶을 산다는 거죠. 이론은 잘 몰라도 좋다, 싫다를 말하는 것에 스스럼없는 층이 넓다면, 그것의 저변이 넓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그 무언가를 접하고 누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기 때문에요. 따라서 예술작품이 좋다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면, 그 판단의 수준을 차치하고 대중도 예술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인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흔히 듣게 되는 말이 ‘내가 잘 몰라서...’이고요. 그리하여 무엇이 왜 좋은가를 말할 때 엘리트의 말에 기대게 되는 것이죠. 예술에 잣대를 댈 수 없겠으나, 그 잣대가 있다면 엘리트가 알리라는 겁니다.
하지만 장 뒤뷔페는 콧방귀를 뀌죠.

뒤뷔페는 ‘예술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만든 작품’을 연구하면서 전통적이고 진부한 창작의 원칙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이러한 ‘전통적’ 예술이야말로 문화적 예술보다 선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순한 만남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후 그의 창작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진정한 발견이었다. 뒤뷔페는 ‘예술은 한 사람(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며, 타자로부터의 어떤 가르침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장 뒤뷔페 [우를루프 정원]도록의 서문 18p

잣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장 뒤뷔페를 이번호 예술가로 꼽은 것은 순전히 그의 사상 때문이에요. 그는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대중을 따돌린 채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는 엘리트 문화를 비판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림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해내는 그림, 정신병원에 갇혀있거나 그림을 업으로 삼지 않은 이들의 그림을 수집하고 컬렉션 시켰습니다. 그렇게 그가 주창한 아웃사이더 아트를 살펴보면 대중보다는 미술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광인의 광기에 의한 예술을 선호하는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를 넘사벽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돼서 부분적으로만 동의하지만요. 예술에서 순수함과 광기를 드러내는 것. 정신을 번뜩 뜨이도록 낯설게 만드는 힘. 새삼 번뜩 뜨인 정신이 새로운 것들을 깨닫는 것, 잊었던 것들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니까요.
우선은 단순 유희로써 좋다-싫다를 밝혀보는 것이 분명히 도움될 겁니다.

‘예술은 놀이, 즉 정신의 놀이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주된 놀이인 것이다. 여기 순간적으로 헝겊뭉치를 쳐다보는 아이가 있다. 어떤 생각이 아이의 머릿속을 스친다. 아이에게 헝겊뭉치는 이제 인디언이다. 그리고 진짜 인디언들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헝겊인형을 두려워하기로 결심한다. 실제로 아이는 헝겊인형이 무섭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가 이것이 단순한 헝겊뭉치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어차피 애초에 인형을 인디언이라고 결정하는 것 자체가 다분히 장난끼의 발동이다. 아이는 헝겊인형을 인디언이라고 믿기로 결심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믿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아이는 바로 이런 식으로 정신이 작동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매혹시키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정신적 과정의 실험과 검증이다. 아이는 마치 아기가 작은 발을 움직이면서 노는 것처럼 이렇게 자신의 정신을 움직이면서 논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같은 도록 233p

글·그림 지인 freshdrawing.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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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의사와 뭐 먹을까.


여럿이 밥 때를 맞이하면 서로 너 뭐 먹고 싶어, 너 어디가고 싶어? 하고 물으며 또, 서로 글쎄 딱히...하고 어물거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두고 사람이 우유부단하다 뭐 분명하게 바라는 바가 없냐고 한다면 정확한 지적이 아닌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고파서 먹고자하는 욕구가 무얼 먹을지까지 분명하게 향할 리가 없잖아? 게다가 타인이 뭘 먹고싶어할지의 의사를 배려한다면서 흐무흐무하는 사람들은 우유부단하다고만 할 순 없지 않나. 선택을 별로 안 해보기도 했고.

무리에서 메뉴를 주로 정하는 사람의 몇가지 사고방식이 있다. 항상 욕구가 분명한 의사형태를 띄는 경우, 모두가 맛있게 먹어야한다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 메뉴가 반드시 맛있으리란 확신이 있는 경우. 고르라 해도 고르지 않을 것이기에 하나를 정하는게 낫다는 경우 등등. 그런 분들에 붙여 잠시 말하건데, 이 글은 다수가 원하는 무언가를 고르자며 흐리멍텅하게 되기 쉬운 사람인 나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쓰였다.

사실 어디가서 무얼 먹고자 할 때 타인이 먹고싶은 것을 묻는 일은 '없는 것을 찾는 일'일 공산이 크다. 위에 적었다시피 항상 '먹고자하는 의지'가 '무얼먹을지의 의사'로 연결되진 않으며 무리속에서 사람은 '내 의지는 다수가 좋아하는 것을 먹는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기에 그렇다. '다수가 좋아하는 것을 먹자'고 대다수가 말하고 있는 무리속에서 그들은 당췌 원하는게 없음인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그들은 뭘 먹게 될까?
의지와 의사를 동시에 가진 이가 원하는 냉면을 먹게 된다.
본인의 의사가 분명해 의지로 이루는 경우. 냉면먹자! 외친뒤 몇가지 행동을 보일 수 있는데,
'오늘은 더우니까', '면이 땡기니까', '새로 생긴 냉면집이 있던데'의 이유를 붙이는 경우.
'냉면이 싫으면 너희가 먹고싶은 걸 말해'하며 대안을 요구하는 경우.
'배고프다, 빨리 가자'하며 욕구를 우선하거나 하는 식.
이제 딱히 냉면이 당기는 경우는 아니더라도 쫓아가게 되기 때문에 냉면식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냉면을 다수의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합리화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예를 들어 '그래, 오늘같이 더운 날은 냉면이지,' '속이 타는게 시원한 국물이 먹고 싶었어,' '밥보단 면이 낫지'. '새로 생겼다니 가볼까?' 등등이다. 이런 합리화를 거쳐 냉면은 공고한 다수의 의사가 된다. 게중 몇몇이 속쓰려서 냉면은 싫은데라고 속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그거 아는가? 선택지가 다양한 평등사회만이 고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회사 밀집지역이나 대학교 앞 번화가같이 사방에 음식점이 있는 공간에서, 우두머리가 메뉴를 정하지 않는 상황에 있다면 말이다.

현재 다수가 원하는 공통의 무언가는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무언가를 콕찝어 호불호를 나누는 식으로 의사를 깨우는 편이 낫다. 사람이 다수일때는 자기 뇌를 잠시 잠재우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 개개인의 뇌를 깨우는 질문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냉면먹자의 사람과 약간 다른 분위기로 무리를 이끌게된다. 합의점을 내는 사람인 것. 합의점이 나지 않은 상태로 메뉴를 정하면 구성원들은 냉면을 먹는 것이 이래이래서 좋다고 합리화하는 의식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합리화에 익숙져서 뭐 먹을까?, 뭐 먹고 싶어라는 질문에는 들어도 들어도 뇌가 활성화되지 않는 것이다.
비단 뭘 먹을지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러하니 사는데는 어떻겠나.

정리하자면 이렇다. 보통 의사는 혼자서 하는 일에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지만 이게 나 혼자 있지 않게되면 쉽게 무언가를 원함을 드러내지도 그런 맘이 생기지도 않지 않나? 누군가의 강한 의지로 끌려가는 것이 더 낫겠다 싶게 되는데, 여럿 있을때도 자기의지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사람 즉, 목적한 바로 남을 끌어들이는 것에 스스럼 없는 이가 주동하지 않는다면 다들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의지에 비해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의사가 없으므로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다는 상태에서 머릿속에 공란이 생기게 된다.
그런 경우에, 모두의 의지를 종합해서 합의된 메뉴를 정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본인의 분명한 의사와 강한 의지로 메뉴를 통일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무리는 메뉴에 대한 합리화를 자동적으로 수행한다. 선택이 다양한 사회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바에 대한 생각이 없다면 결국 그 다양한 선택지가 무용한 것이 되는 거다. 그리고 그 다양한 선택지 중에 고르지 못했다는 열패감에 이어 주동자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합리화과정이 익숙해지는 것.
으레 이끄는 대로 냉면을 먹는 사람에게 합의점을 내보는 노력을 해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기운이 꽤나 필요한, 그래서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뭐 먹는지 고민하는 노력을 하느니 빨리 먹고 쉬겠다며 불편한 기색을 받기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고민하다보면 무언가를 고르고,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며 좀더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어떤가. 고민하고 선택하는 힘이 필요한 것은 비단 식사 메뉴에만 적용되는 일은 아니다.

뭐 먹을까는 선택의 연습이며, 합리화보다는 합의점 추구하겠다는 의지일수 있다. 그래서 뭐 먹고싶은지를 생각해내는 것은 개인으로썬 주관을 키우는 것이며, 개인의 주관이 성장하는 것은 무리가 건전하게 의사를 표현하고 이룰 수 있는 동력이다.
나는 냉면이 좋지만, 갈비탕에 들은 당면이라면 합의할 수 있다.
뭐 먹을까?

월간이리 4,5월호는 바스티앙 비베스와 양영순작가입니다.



왜 이제 올리나 하신 분이 있다면 감사합니다.

월간이리 링크입니다. http://postyri.blogspot.kr/

두분모두 제가 좋아하는 만화작가입니다. 왼편이 [염소의 맛], [그녀들], [폴리나]의 작가 바스티앙 비베스. 오른편이 [아색기가], [천일야화], [덴마]의 작가 양영순입니다.
만화는 정말 대단합니다만 폄하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수준차가 심해서라고 생각하는데요. 심지어 그 수준차가 심한 것들을 함께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화는 글(스토리), 그림, 연출이 종합되어 있기에 수준이 골고루 높거나 골고루 낮거나 어느 한 곳에 편중되어있거나 어쨌든 만화의 모양새로 나오고 같은 매대에 놓이고 같은 포털에 연재가 된다는 거죠.
제가 꼽은 이 두분은 글과 그림과 연출 모두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감에 있어 뛰어난 작가입니다.
...
이번에 4월호에 글을 펑크내서 5월호에 바스티앙 비베스와 양영순 작가에 대한 글을 함께 썻으나 생략합니다.

양작가님은 작가님의 그림체를 참고하여 그려보았는데 팬심에서 우러난 행동이었습니다. ^^

2013. 3/22_세상은 요지경을 통해

최근 신신애씨가 부른 '세상은 요지경'을 찾아 들었다. 어릴적 텔레비젼을 통해 보던 가요무대류의 방송에서 기억하는 노래 중 하나인데 당시 히트곡이어서 그렇기도 하갰지만 신신애씨의 목소리가 아주 요지경해서 그 목소리로 부르는 짜가 짜가가 몹시 인상깊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사는 이러하다.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산다
야이야이 야들아 내 말 좀 들어라 /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인생 살면 칠팔 십년 화살 같이 속히 간다 / 정신 차려라 요지경에 빠진다
싱글 벙글 싱글 벙글 도련님 세상 / 방실 방실 방실 방실 아가씨 세상
영감 상투 삐뚤어지고 / 할멈신발 도망 갔네 허
요지경은 속에 그림필름이 장착되어 볼록렌즈를 통해 확대해 볼 수 있는 장치를 말한다. 관광지에서 주로 판매하던 플라스틱 카메라모양의, 버튼을 누를때마다 뷰파인더를 통해 사진이 바뀌는 그런 장난감. 그리고 이해불가한 일이 벌어지는 세상을 칭할 때 쓰인다. 이해불가 세상을 말하는 요지경을 생각하면 나는 요지경의 발음을 늘려
요 지경-요런 지경-이러한 지경을 상상하고
그러한 상상에 신신애씨의 노래가 더해져서 내게 세상이라 함은 '짜가가 판치고 있는 지경'의 줄임말이 되곤 했었다. 그러면 이어서 괴로운 기분이 들곤 했는데 세 가지 이유로 요약해 볼 수 있다. 노래 가사에서 세상에 짜가가 판을 친다는 것은
1오리지널을 보기 힘듦에 대한 개탄일까,
2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나와 무얼 해도 짝퉁이 되기 쉬움을 개탄일까,
3아니면 오리지널이 대우받지 못함을, 짜가라도 자본이 있다면 오리지널의 대우를 받음에 대한 개탄일까. 하는 것이다.
 
앞서 글머리에서 최근에 신신애씨의 노래를 찾아 들었다며 얘기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사실 2012년 12월즈음이다. 글을 마무리 짓는 지금이 벌써 2013년 3월로 4개월여의 간극이 생겼다. 그래서 글의 방향도 크게 바뀌었다. 앞서의 괴로운 기분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기 때문.
1, 세상에 판치는 것은 짜가일 수 뿐이 없다. 오리지널은 원천이기에 순수한 드묾 자체이다.
2, 내가 하려는 거 이미 다른 사람이 다 했다라는 탄식인데, 오리지널이기위해 무언가를 하려하는 태도자체의 문제라고 일단락.
3에 대해선 인정했대도 통탄스러운 사실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리지널을 원한다고 하지만 감식안이 부족하거나 시간이 부족하여, 오리지널을 소개 혹은 제시 받는다. 그들이 제시받는 쉬운 통로는 자본이 번쩍번쩍하게 닦아 놓았으므로 자본이 소개하고 제시하는 것을 오리지널로 여길 수 뿐 없다. 그러니 자본이 없는 오리지널의 원천자는 자기만족만이 약속된 대가이며, 고로 자족하는 도를 닦거나 아니면 유유상종무리에게 위로를 받거나 자기가 착각중인가 하며 괴로워하거나. 오리지널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삶에 있어서도 원천자의 태도를 지녀야한다.
애초에 나는 '세상은 요지경'이 오리지널을 그리워하며 짜가를 탄식하는 노래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개탄이라고 여긴 것은 내가 치우친 방향 때문이었고 가사가 말하는 것은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살 뿐이다라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 잘났단 평, 못났단 평 모두가 짜가 속에 있는 태도이다.
 
가사를 맡은 조명암은 시인이자 작사가로 일제강점기 시절의 1913년 출생했다고 한다. 신신애씨의 앨범은 1993년에 나왔지만 작사가가 1948년 월북을 했으므로 35세 전에 쓴 가사일 것이다 라고 추정하며 연보를 더 검색해보았다. 언제 쓴 가사인지는 역시 모르지만 오히려, 신신애씨의 '세상은 요지경'이 1939년 김정구가 부른 '세상은 요지경'에 대한 표절시비에 휘말린 것을 알게 됐는데 1993년 앨범이 발표되고 몇달 뒤의 기사로 그때분들은 꽤 아는 이야기인 것 같다. 신신애씨측은 어릴 적 들은 노래를 기억해가며 새로 쓴 것으로 표절은 아니라고 대응했다고 하며 그 후의 이야기는 알 수 없다. 이렇게 되고 나니 가사를 새로 검색해야했고, (앉은 자리에서 이 모든 정보를 찾을 수 있다는 것에 조금 경악했지만 기쁘다..) 앞서 알던 가사가 너무나 짧아 아포리즘격이라 아쉬웠는데 이번에 알게 된 원곡 즉 오리지널^^의 가사는 길고 기니 좋다. 오리지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요지경 속이다 요지경 속이다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생글 생글 생글 생글 아가씨 세상/벙글 벙글 벙글 벙글 도련님 세상
얘 얘 얘들아 내 말 좀 듣거라/얼굴이 잘나면 잘나서 살고
못난 사람은 제 멋에 산다/얼싸 음마 둥개 둥개 아무렴 그렇지 둥개 둥개
싸구려 판이다 싸구려 판이다/세상은 싸구려 판이다/
찰랑 찰랑 찰랑 찰랑 막걸리 술잔/지글 지글 지글 지글 매운탕 안주
얘 얘 얘들아 내 말 좀 듣거라/곱배기 한 잔에 웃음이 가득
삼팔 수건에 추파가 온다/얼싸 음마 둥개 둥개 아무렴 그렇지 둥개 둥개
물방아 속이다 물방아 속이다/사랑은 물방아 속이다
둥글 둥글 둥글 둥글 뜨내기 사랑/뱅글 뱅글 뱅글 뱅글 뚝배기 사랑
얘 얘 얘들아 내 말 좀 듣거라/홀애비 사정은 과부가 알고
처녀 사정은 총각이 안다/얼싸 음마 둥개 둥개 아무렴 그렇지 둥개 둥개
<세상은 요지경 : 노래 김정구 >
 
-관련링크
경향신문_1993.9.22일자 '세상은 요지경' 표절시비 기사 http://bit.ly/ZDskHw
디씨인사이드_'세상은 요지경, 그래도 원조는 있다.' 이준희 글  http://bit.ly/ZQCP9y
위키피디아_작사가 조명암  http://bit.ly/WYAsoo
남인수 블로그_김정구 노래의 '세상은 요지경' 가사 및 듣기 http://bit.ly/Xudbpu

포켓몬스터 주제가에서 출발



동생과 포켓몬스터 주제가를 부르다가 성장기 넘치는 어린이의 에너지를 건강하게(?) 소모함으로 바른 교육과 사회적 성장을 시키려는 목적의 만화영화를 통해 결국 어른이 제시하는 재미가 가진 필연적인 한계인 '높은 사회 위치에의 욕망'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오프닝 곡인 '모험의 시작'. ', 이제 시작이야'로 더 많이 알려져있다. 그 중 살필 가사는 아래와 같다.
'언제나 어디서나 피카츄가 곁에 있어 약할때나 강할 때나 피카츄가 곁에 있어. 너와 나 함께라면 우린 최고야'
포켓몬스터는 자연의 특정속성을 다루는 능력을 가진 포켓몬스터가 동물처럼 존재하고 그 포켓몬과의 대결을 통해 이기면 몬스터볼에 가둘 수 있어서 그렇게 가둔 몬스터와 주종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부 설정을 살펴보는 것은 이 글에서 의미가 없고, 단순화를 해보면 이렇게 된다.
포켓 몬스터는 자연을 다룬다.
 →인간은 포켓 몬스터를 다룬다.
  인간은 포켓 몬스터를 이용해 자연을 다룬다.
고로 포켓몬스터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포켓몬이라는 매개체를 사용해서 재미를 주며 풀어낸 만화이다. 주인공 한지우가 여행을 통해 만나는 여러 군상을 통해 소개되는 몬스터와 주인의 관계는 인격적이기도 하고 비인격적이기도 하며, 일대일이기도 하고 일대다수이기도 하다. 포켓몬을 획득하고 사육시키는 목적 또한 애완이기도하고 투자, 투기이기도 하다. 인간과 포켓몬 둘 모두 트라우마를 가진 경우도 많아, 서로의 관계가 그것을 해소시키기도 강화시키기도 한다. 지우와 피카츄는 매 회마다 그런 많은 관계들을 만나고 그들과의 만남이 각자에게 변화의 계기가 된다.
인간과 포멧몬의 주종관계는 앞서 말했듯이 대결을 통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주인공인 지우와 피카츄에겐 남다른 스토리가 있는데 지우가 피카츄를 '갖기 위해'에서 지우가 피카츄와 '함께하기 위해'로 변한 과정이 그것이다. 함께하는 것이 이상적인 동료 관계임은 여행을 통해 많은 다른 관계를 접하며 점점 확실해진다. 사실 포켓몬스터의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권리부분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생명과 자유의지를 가진 동물을 몬스터볼이라는 공간에 가두니 말이다. 지우는 피카츄를 몬스터볼에 담지 않고 함께 돌아다니는데, 그것은 개성강한 피카츄를 존중해서이지만 나중에 피카츄가 몬스터볼에 들어가는 것에 순응했음에도 여전히 지우는 피카츄를 풀어둔다. 물론 지우와 다른 사람들만 화면에 줄창 나오다가 싸울 때만 피카츄를 꺼냈다면 애니메이션의 인기는 반 토막 났을 것이란 현실적인 이유가 있지만 차치. 차치한 김에 각설하고. 포켓몬스터는 자연과 인간 공존관계의 이상향을 제시하는 만화인 셈이다.
모양과 성격이 다양한 여러 포켓몬 중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피카츄는 현실세계의 설치류와 비슷한 종류로, 공격형 포켓몬 중 전기속성을 가졌다. 피카츄는 외상으로 드러날 정도의 전기 충격을 가할 수 있는데, 100만 볼트라는 공격명칭은 과한 액션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기는 피카츄의 빨간 두 볼에서 시작되어 꼬리를 통해 일정한 방향을 향해 방전되는데, 주로 공격을 하지만 일상생활 충전용으로 쓰기도 한다. 전기는 인간이 다루는 에너지 중에서도 근대적인 것이다. 화력-불 포켓몬인 파이리와 수력-물 포켓몬인 꼬부기가 각각 공룡과 거북이로 고대의 느낌이라면 피카츄는 유일하게 털 달린 포유류로써 좀 더 근대적인 생명인 것은 참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더 친근하고, 친근함은 더 근대적이란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야생. 주인이 없는 포켓몬은 야생-즉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으로 배척받는다.
전기가 필요한 마을에서 피카츄와 지우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에피소드가 있던 것이 기억나는데, 에너지를 다루는 인간은 이와 같이 높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자. 따라서 전기속성 포켓몬이고 인간과 친근한 이미지의 피카츄는 자신의 주인인 지우와 함께일 때, 그리고 심성 고운 어린이인 지우는 에너지를 가진 포켓몬을 소유함으로써 서로가 높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까 살핀 이 가사
'언제나 어디서나 피카츄가 곁에 있어 약할 때나 강할 때나 피카츄가 곁에 있어. 너와 나 함께라면 우린 최고야'
는 어른이 제시하는 세계에서 최고가 되고 싶은 열망은 에너지(자본)를 소유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함의하는 것이다. 만화를 통해 어린이들은 자기의 힘을 강화하고 싶다는 성장욕구를 포켓몬을 소유하는 것으로 가능케 하려는 욕구를 갖게 된다. 따라서 만화의 스토리가 지우와 피카츄의 인격적인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바른 성장을 돕고 싶다는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장 먼저는 소유욕을 자극하는 것이고, 소유하거나 소유하지 못하거나를 딛고 다음단계로 넘어가는 장을 벌리게 된다.
이쯤 되고나니, 이것은 포켓몬스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란 걸 알 수가 있다. 애니메이션이란 매체가 자본을 향해 기획되어 있으며 그 말은 즉 만화는 이미 투입보다 큰 시장성이 포함되어있다는 것. 어린이를 소비시장의 중요 요인으로 보고 활발하게 움직인 것이란 말이다. 파워레인져의 로보트, 우리는 챔피언의 미니카, 세일러문의 변신 봉, 유희왕의 카드, 드래곤 볼의 탈색약^^. (통키의 피구공이나, 슛돌이의 축구공이 친근해지는 순간이다.) 아동 컨텐츠의 풍성함은 아동을 대상으로 한 시장의 짭짤함과 함께 간다.
많은 애니메니션은 오프닝곡과 앤딩곡이 다르다. 포켓몬스터의 앤딩곡 우리는 모두 친구Imagine만큼 이상적이니 음악을 들으며 다시 만화는 동심을 위한 것이라는 낭만주의적 생각으로 마무리 지을까.

피카츄 라이츄 파이리 꼬부기 버터플 야도란 피죤투 또가스 서로 생긴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모두 친구

해맑음 속에서 맥이 빠지는 이유는 늘 비슷한 것 같다. 이상을 크게 울려퍼지게 하는 것이 커다란 스피커라는 것.
관련 링크
오프닝 '모험의 시작' 듣기
엔딩 '우리는 모두 친구' 듣기

월간이리 3월호 시스토 로드리게즈

월간이리13년 3월호 시스토 로드리게즈, 2013
월간이리 3월호 바로보기


연재를 시작하기 전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예술가 12명을 쓰고그리면 제 예술관이 복음전파급으로 드러나버릴 거란 반 우스개 말을 했었는데 이번 글에 제가 지향하는 바가 가장 드러난 것 같습니다. 할 말 다한것 같은데 앞으로 9명 어쩌지...
글 전부를 올립니다, 위의 링크로 보시면 다른 글들도 보실 수 있습니다.




시스토 로드리게즈 (Sixto Rodriguez)
 
작년 11월에 홍대 상상마당에서 서칭 포 슈가맨이라는 다큐영화를 관람했습니다. 글 전개 차원에서 그 내용을 살짝 읊으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다큐멘터리 후기처럼 된 이번 글입니다.
서칭 포 슈가맨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50만장이 팔린 앨범을 낸 유명 가수 로드리게즈를 찾는 내용의 다큐멘터리입니다. 그렇게 유명한 가수를 어떻게 찾으면 다큐감이냐 싶겠지만 로드리게즈는 유명한 무명인이었습니다. 앨범이 나온 당시인 1970년대의 남아공은 정치적으로 몹시 보수적인 상태로 정부에서 문화를 통제하던 시기였습니다.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가사의 자유로움으로 인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으나 외려 저항음악으로 더욱 더 알려지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다큐의 표현대로라면 남아공에선 전축이 있는 집이라면 대부분이 로드리게즈의 앨범을 가졌으며 그 인기는 미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앞서 유명무명 했다시피 로드리게즈가 현재에 어떻게 지내는지는 물론 당시에도 어떤 인물이었는지 남아공의 아무도 몰랐습니다. 로드리게즈는 앨범만 남긴 가수였기 때문인데요. 앨범으로 돈을 벌었을 음반사의 행방자체가 묘연하고 팬들 사이에 그나마 있는 루머는 모두 로드리게즈가 진즉에 죽었다는 얘기로 연달은 공연 실패로 인해 자살’, ‘공연 중 관객에게 인사를 고하고 자살’, ‘약물 과복용으로 자살등등이 있었습니다. 로드리게즈의 빅팬이었던 시거맨은 그토록 인기 있던 가수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사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음에 놀라워하며 그를 찾기 시작했는데 로드리게즈의 노래 가사에 적힌 지역명을 힌트로 남아공이 아닌 미국, 디트로이드를 추적해냅니다. 그래서 밝혀진 사실은 음반이 처음에 미국에서 발매되었다는 겁니다
미국의 음반 제작자는 디트로이드의 허름한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한 남성의 음악이 참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는데 그가 바로 로드리게즈였으며 담배연기 자욱한 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사는 곳은 어디인지 어떤 일을 하며 먹고사는지 모두 알 수 없었고 다만 정처 없는 일용직 노동자 정도로 살았으나 그는 진짜 예술가였다는 평을 합니다. 음반을 냈으나 성공하지 못한 채 거의 무명과 마찬가지로 끝을 냈는데, 그들은 로드리게즈의 실패에 아직도 납득하지 못한 채로 멕시코 출신임이 너무 분명한 그의 이름 때문에 미국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게 아닐까 말합니다만 여하튼 음반이 실패하고 계약도 마친 뒤 로드리게즈는 음악가로 다시 활동하지 않았고, 그 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 또한 미궁인 채였습니다
시거맨은 로드리게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웹사이트를 열어둔 상태였는데 그로 인해 한 여성의 연락을 받게됩니다. 그녀로부터 자기 아버지가 당신들이 찾는 로드리게즈인 것 같다면서 자기 아버지는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듣죠.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시거맨은 로드리게즈가 미국 디트로이드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고 네 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로 살고 있다는 것과 남아공에서 자신의 음악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았는지 모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긴 시간의 노력 끝에 로드리게즈를 발견한 시거맨과 다른 사람들은 열광하며 남아공으로 그를 초대하고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남아공에 도착한 로드리게즈의 딸들은 그때까지도 아버지의 음악적 성공에 대해 확신할 수 없던 나머지 자기들끼리의 대화로 공연장에 20명만 있으면 다행이겠다고 했다 합니다. 그러나 축구장만한 공연장에 심지어 가득 차기까지 한 관중은 로드리게즈가 무대에 등장하자 열광을 멈추지 않아 10분간 곡은 시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로드리게즈와 무대에 선 밴드멤버들은 그가 너무 많은 관객 때문에 주눅이 들면 어떡할까 걱정했지만 음악이 시작되자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고, 로드리게즈는 완전히 준비되어있었으며 무대에 선 그는 완벽히 그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이 너무 멋졌습니다. 그 자신으로 완전히 준비되어있음이 말이죠. 그가 갈고 닦여있음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던 것이고 외부의 요인은 기회가 오느냐 마느냐인 것인데, 그가 갈고 닦여있지 않았다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겠죠
로드리게즈는 정말 그야말로 군자입니다. 공자 말하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다른 이가 알아주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음(혹은 역성내지 않음)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했으니 말입니다. 많은 분들에게 그렇듯 저 또한 이 구절이 좋아 종종 떠올리게 되는데요. 능력을 가졌음을 인정받아 합당한 자리 앉아서 뜻을 펼치고 길이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바람은 천하통일의 영웅이 필요했던 시대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으며 사는, 자기가 평가하는 자기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외부에 성내지 않고 삶은 자기가 추구하는 바를 향한 이러한 사람을 만나면 기쁩니다. 자신의 절대값으로 산다는 것은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최고로 건강한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모두 다른 역량과 조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남과의 비교를 통한 것이 아닌 자기다움을 제시할 수 있는 것 아닌가하는 마음으로 그러니까 진정 자기되기를 추구하는 과정에 자신을 두는 것. 너는 어떠한 뭔가가 되기보다 너 자신이 되라고 말하는, 그래서 전 너 자신을 알라가 그런 시작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관객의 열광이 멈추지 않았던 10분간, 그 순간을 그가 삶의 보상으로 여길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 기뻐했음은 분명합니다. 그 열광 뒤에 그는 관객에게 ‘Thanks for Keeping me alive.’라고 말했으니까요. 음악적 삶에서 보상을. , 보상이란 말은 그간의 무명이 마치 인정을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므로 선물이라고 고치겠습니다. 음악을 통해 예기치 못한 선물을 받은 이의 감사함이죠.
사람들은 예술을 하는 이에게 창작을 한다는 그 신비로움으로 인해 주목을 하고 영향을 받습니다. 물론 유명세에 따라 다르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미칠 영향력이라면 건강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삶을 사는 예술가이기를 바랍니다.
로드리게즈를 찾는데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시거맨은 로드리게즈를 찾은 뒤로 자신은 음반가게를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함께 로드리게즈를 찾아낸 다른 사람들의 삶은 크게 바뀌었으나 정작 로드리게즈 자신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딸도 아버지는 콘서트 수익금을 주변에 다 나누어주고 여전히 그전처럼 살고 있다고 하고요. 그는 본디부터 자기로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현림 시인의 시 '지금 필요한 것' 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 시의 일부만 발췌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며 부디 꼭 찾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완벽한 생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묵묵히
두더지처럼 깊이로 사는 당신 얘길 듣고 싶다
당신 손에서 목수의 손을 본다
나무와 톱 망치와 못을 다스리는 손
사려 깊은 손, 뭐든 일으켜 세우는 손, 그 진지함을
일용직 노동 중에서도 남들이 피하는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로드리게즈는 제게 그러한 손을 가진 목수로, 완벽한 삶을 요구하지 않고 자신으로 산 개인입니다. 자기 자신이 되기에 힘쓰며 자기를 세우는 삶을 살고 그를 통해 타인 또한 세우는 사람인 개인을 존경을 담아 사랑 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