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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얼굴



월간이리 2월호 뒷표지로 사용된 그림입니다.
뒷표지와 그에 대한 짧은 글을 함께합니다.
월간이리 링크 postyri.blogspot.kr/


‘Woman Suffering from Obsessive Envy’
1822 (Oil painting)
이번호 뒷표지는 테오도르 제리코의 광인 연작에서 주제를 따왔습니다
제리코는 정신과 의사인 친구의 권유로 실제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의 초상을 여럿 그렸으며 제시한 도판은 그 중 손꼽히는 작품으로 프랑스의 리옹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제리코의 서른 살 무렵 작업입니다.
제리코는 실제 광인을 대하며 작업을 했지만 저는 다만 정신이상자의 인상이 필요했으며 google을 통해 많은 단어로 찾아보았습니다.
광기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으로 선택한 최종 검색어는 'murderer' 였습니다. 뒷 표지의 소년은 19세의 살인용의자입니다

피카소와 말띠를 기념함.

이 그림도 월간이리 1월호 뒷표지였습니다. 편집이 달랐지만,
1월호 뒷표지에 대한 글은 2월호에 함께 실었습니다.


월간이리 링크 postyri.blogspot.kr/

Bull - plate 11'
January 17 1946 (lithograph)
지난 1월호의 뒷표지는 피카소의 석판화 연작 'Bull' 의 패러디였습니다
'Bull'은 피카소가 60대 중반이던 즈음 작업한 석판화 연작입니다. 첫번째 황소 1부터 마지막 황소 11 까지 약 1달에 걸쳐 작업되었으며. 제시한 도판은 마지막 11번째 작업입니다. 최종적으로 황소는 상징만 남아 기호처럼 되었고 그자체로 몹시 유려하고 완벽해보입니다.
http://bit.ly/1fvECdv 본 페이지의 정보를 참조했습니다. 도판이 작업 순으로 실려있어 보시기 좋습니다

월간이리 12월호는 루시안 프로이드입니다.



이로써 12개월간의 뒷표지 작업을 마쳤습니다. 그 말인즉 한해가 갔고 끝이 났다는 것이죠. ^^
2014년부턴 자유주제로 글은 쓰지 않고 표지작업만 할겁니다. 봐주셔서 감사했고, 앞으로도 즐겁게 봐주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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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안 프로이드 (Lucian Freud)

빵덩어리, 살덩어리, 물감덩어리.
덩어리라는 말엔 특별한 응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덩어리 안에, 덩어리의 핵이라고 할 만한 자리에 혹은 덩어리진 더기더기 사이에 덩어리는 뭔가를 숨겨놓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작위로 써놓은 것이긴 하지만 빵덩어리, 살덩어리는 예수께서 자신의 살을 빵에 비유한 바도 있고, 멍하니 생각해도 빵을 먹으면 살이 되니 어느 만큼의 유사함에 가 닿습니다. 빵덩어리, 살덩어리, 물감덩어리. 잘 해보면 물감덩어리도 낄 수 있을 것 같네요.
사람-살덩어리를 가장 생생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그림의 수단은 유화일겁니다. 효과로도 상징적으로도요. 효과면에서, 유화는 물감을 기름에 녹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굳은 뒤엔 기름으로도 다시 녹지 않습니다. 물감은 안료와 접착제를 섞은 것으로 유화물감은 기름으로 농도 조절된 뒤 화면에 접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접착력이 약해져 떨어져버리기도 하는 겁니다. 그림 표면의 번들거림은 사용하는 기름의 성질에 따라 더욱 번들거리게도, 혹은 전혀 번들거리지 않게도 만들 수 있는데 보통 천천히 마르는 성질의 기름이라면 광택이 나고, 빨리 마르는 속건성-휘발성 기름이라면 광택이 없게 됩니다. 기름을 많이 섞어 캔버스 천에 얇게 스며들도록 그릴 수도 있고, 기름을 거의 섞지 않다시피 하여 물감 자체를 두껍게 쌓아가며 그릴 수도 있습니다. 덩어리를 두껍게 쌓아가며 그릴 때 그림은 그 자체로 덩어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법으로 사람을 그리면 그 두툼한 물감은 살덩어리로 보입니다. 변사또의 부정을 낱낱이 살핀 이몽룡의 시의 ‘금동이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사람의 피요, 옥쟁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하는 구절에서 보듯 사람의 진은 피와 기름의 비유로 담깁니다. 피부의 덩어리감, 피부결의 반짝임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유화는 그뿐만 아니라 기름에 녹여 그리는 그 성질로써 살덩어리가 될 수 있습니다. 기름에 엉겨붙은 안료의 덩이 덩이들 그 색들 하나하나가 사람의 뼈와 근육과 피와 살의 빛을 내며 덩어리가 되죠.
루시안 프로이드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물론 엄밀하게는 그림 사진을 본 것이지만. 대학교에 방문 판매를 오는 화집아저씨의 매대였습니다. 화집아저씨는 책을 뒤적이는 내게 프로이드의 화집을 본다면 누드화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을 장담하셨죠. 그리고 덩달아 잘 나가는 화집 몇 권을 추천해주셨는데 호크니와 베이컨의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회화과 출신들에게 데이비드 호크니, 프란시스 베이컨, 그리고 루시안 프로이드는 조용한 경외의 대상일겁니다. 회화는 죽었다고 선언되던 시절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없을 화면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인정받았죠. 그 중에서도 프로이드는 전통적인 주제인 인물을 모델과 대면한 상태로 그리는 방식을 꾸준히 지속했습니다. 그의 그림의 단골요소인 회반죽 벽, 오래된 나무 마루, 낡은 철제 침대와 매트리스, 그리고 뒹굴고 난 듯한 이불 같은 것은 실제 그의 작업실 정경이며 그는 모델이 되어줬으면 하는 이들에게 요청을 하고 그들이 수락하면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정기적으로 함께 작업합니다. 전문 모델이 아니라 작업을 하며 모델로 인해 엎어지는 작업도 꽤 많다고 합니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귀가 튀어나왔다면 더욱 도드라지게, 피부가 붉다면 더욱 붉게, 추하다면 추할 특징. 살이 늘어졌거나 턱이 접혔다거나 하는 정작 모델들은 자신의 모습에서 빼고 싶을 특징들에 매달려 꼭 그려내고야 맙니다. 그러한 그림은 모델을 닮기도 하고 왜곡하기도 하여 묘하게 닮은, 묘하게 다른 인물이 됩니다. 모델을 얼마만큼 충실하게 그리냐에 대해서는 모델마다, 또 작가마다 견해가 다를 겁니다. 프로이드의 경우엔 다음 문장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자연을 섬기고자 노력하는 미술가는 그저 수행적인 미술가일 뿐이다. 그가 그토록 충실히 복제한 모델이 그림 옆에 함께 걸리지는 않을 것이고, 그림은 단독으로 그곳에 있을 것이므로 작품이 모델을 정확하게 복제했는지 여부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한 그림은 그저 단순히 우리에게 삶을 상기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확히 삶을 반영하기 위해 그 자체 고유의 삶을 획득해야만 한다.”
마틴 게이퍼드 저 [내가, 그림이 되다]에서 인용된 1954년의 프로이드 글 48p, 108p

그가 의뢰받은 그림을 그린 일은 적다는 점, 그리고 신분이 널리 알려진 모델을 제외하곤 담배를 피우는 사람, 한 남자와 그의 딸, 파란 스카프를 맨 남자 등으로 그림의 제목을 삼은 점과 함께 위의 글들을 참고해 말해보자면 프로이드는 자신이 매력을 느껴 모델로 삼은 개인의 고유함을 인간 자체의 어떠함으로 그려내려 한 것일 겁니다. 참. 그림 잘 그리면서 글도 잘 쓰네요.
프로이드의 살덩어리 가득한 그림을 보며 받는 많은 좋은 것들 중 하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고민할 바는 더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에 있음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겁니다. 물론 사람이 더 좋은 그림에만 고민할 수 있는 것은 무척 사치스러운 일이지만, 갈팡질팡하는 때에 내가 바라볼 큰 덩어리를 다시금 발견하는 것은 무척 소중한 일이죠.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화 모델이었던 마틴 게이퍼드가 프로이드와 나눈 대화를 책으로 냈는데 그 책이 최근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었습니다. [내가, 그림이 되다]라는 제목입니다. 저자는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인터뷰집을 내기도 했죠. 둘 다 무척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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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이리 11월호는 그레고리 콜버트입니다.


심신이 약해져 콸콸 흐르는 물을 보면 귓속부터 괴롭습니다.
시간도 콸콸 흘러 11월이 되었네요.
그레고리 콜버트는 사진을 보면 다 아실만한 유명하고 인상깊은 사진작품을 여럿 남겼으며
지금도 활동중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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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콜버트 (Gregory Colbert)

세상사에 초월한 사람, 몹시 순수한 사람, 이해의 범주에 들지 않는 기인을 표현할 때 동물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그리곤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어린 시절 일화 중에 아무도 타지 못하던 사나운 말을 일순 진정시켜 보인 것, 깨달음의 순간에 새가 찾아와 어깨에 앉는다는 류의 이야기도 그런 것들이고요. 동물을 통해 신의 메시지를 받거나 자신의 권위를 입증합니다. 특히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동물들과 가까운 모습은 그 사람의 어떤 뛰어남을 입증해주고 누구보다 신성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그것은 낙원에 대한 동경과 맞닿아 있을 겁니다. 성경에 보면 이사야의 예언 중 그리스도의 때에는 표범과 새끼 염소가 함께 눕고,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어울리는 사이에 어린아이가 그들을 이끌고, 간난 아이가 뱀의 굴에 손을 넣으며 놀아도 물리지 않을 것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그렇게 야생동물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에는 그러한 것이 낙원이며, 그러한 모습으로 사는 사람은 누구보다 낙원과 가까운 사람이라는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그레고리 콜버트의 사진에서 우리는 그런 낙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코끼리에게 가만히 책을 읽어주고 있는 아이. 치타와 함께 바위에 앉아있는 아이. 하늘에 천을 펄럭이는 사람의 뒤로 독수리가 날고, 고래와 사람이 함께 헤엄을 치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무척 아름답고 볼 때마다 경이롭습니다. 사진의 순간은 찰나라도 화면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영원한 뭔가에 대해 보여주는 듯합니다.

동물과 사람의 어우러짐이라는 요소도 그렇지만 동적인 순간의 포착이든 멈춰있는 순간이든 화면 자체가 무척 아름답습니다. 심도가 깊지 않은 배경처리로 동물과 인간 상호에 집중되어 있는 사진은 몇 가지 요소로 전체를 그려내는 무대와 같고 그 속에 놓인 사람과 동물은 함께 춤을 추거나 대화하거나 생각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용하는 순간 중에서도 가장 극적일 때를 포착해 기록한 듯 리듬이 공유되며, 이질적이지 않고 조화롭게 보입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들이 직설적으로 담겨있죠. 그리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척 동양적이라는 것입니다. 작가는 유색인 모델을 세웠고 그들의 복장은 수도승을 연상시킵니다. 야생동물과 인간, 자연, 동양적인 것들이 어우러진 이미지. 정신적, 영적인 동양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서구식 삶이 놓친 정신적인 낙원을 동양에서 찾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러한 동경과 그리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그러한 야생동물과의 어우러진 모습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고양감을 주고, 그가 보는 것을 나도 보고 싶고, 내게도 동물이 저렇게 다가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 그런데 이 것은 따져보자면 어쩌면 좋게 생각해버리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자연은 우리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울타리를 치지 않으면 금새 잡초와 야생동물이 밭을 헤쳐 놓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과 얼마만큼 먼 것은 우리 삶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야생을 맨살로 대하는 것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초월하기란 삶에서 초월하기와 같습니다. 그러한 삶은 우리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먹고사는 삶을 악다구니로 칭하고 그러한 악다구니에서 벗어난 느낌. 안 먹어도 배부른 기분의 먹지 않아도 더 이상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열릴 것 같은 그러한 기분은 낭만적으로 상상하는 낙원으로만 존재합니다. 그레고리 콜버트의 사진의 그 순간들을 자연스러움으로, 자연스러운 조화로 느끼는 것은 그래서 일종의 착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의 사진들을 볼 때마다 저는 마음이 복잡합니다. 하지만 역시 이따금 찾아 보게 되는 것은. 삶에서는 사자를 목 졸라 죽이는 삼손과 같은 힘을 필요로 하지만, 굶주린 사자굴에 갇혀서도 사자가 헤치지 않는 다니엘과 같은 인물을 더 높은 경이로움으로 대하는 것과 같겠죠.
뭐, 현실에선 삼손과 다니엘 둘 다 보기 힘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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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이리 10월호는 데이비드 호크니 입니다.


현재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 그림이 와있는 데이비드 호크니가 이번 달의 뒷표지입니다.
별로 안 닮게 그려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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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

우리는 태양빛을 소화하지 못합니다. 비타민 D를 만들어내긴 하지만요. 햇빛을 받아서 단백질을 합성해 내거나 하진 않죠. 식물은 다릅니다. 태양빛을 받아 그들 방식의 소화를 해냅니다. 그리고 우린 그 식물을 먹거나 또 그 식물을 먹은 동물을 먹어 소화할 수 있습니다. 먹이 사슬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고요. 남이 소화한 것을 먹는 것에 대해 말해보자는 건데요. 때로 남의 그림을 보는 것으로 실제를 더 잘 보게 되는 때에 대한 겁니다. 남의 그림을 보는 것으로, 그가 소화해낸 것을 통해 실제를 더 잘 받아들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그린 걸까, 무얼 그린 걸까. 왜 그린 걸까? 하며 나라면 어떻게 표현했을지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려보기도 하구요. 그런 과정에서 표면적으로는 형태를 표현하는 법, 기법에 대한 이해가 높아집니다. 기법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작가에게 온전히 속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표현이란 것이 사실은 재료와 그 기법의 한계에 의한 것일 수도 있음과, 그 한계에 대한 적응 내지 극복의 과정을 깨닫기도 합니다.
본 것을 평면으로 옮김에 있어서의 많은 우여곡절은 그림 그리는 이들에게 지금도 계속 되는 것입니다만, 사진이 넘쳐나고, 인쇄가 손쉽고, 직접 투사가 가능하며, 컴퓨터상에서의 이미지 복제와 수정이 간편해진 지금은 우리는 다른 것을 걱정해야합니다.

‘이미지들은 우리가 과거에 생각했던 현실의 정직한 묘사일까,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미치지 못할 만큼 생생하고 사실적이라고 여겨왔던 사진이 실은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하고 세계를 선명하게 바라보는 우리의 능력을 감퇴시킨 것은 아닐까?’
데이비드 호크니 저 ‘명화의 비밀’ 196p

많은 시각예술가들이 그렇지만 데이비드 호크니를 이야기 할 때엔 특히나 더욱 바라보는 방식, 그려진 방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작업요소로 삼는 작가임을 말해야합니다. 호크니는 1999년부터 서양미술사에 있어 광학기술이 그림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여 2001년 자신의 저서 ‘명화의 비밀 Secret Knowledge : Rediscobering the lost techniques of the Old Masters’에서 밝혔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것으로 앵그르, 카라바조, 벨라스케스 등의 대가들이. 그리고 많은 다른 화가들이 15세기 초부터 광학을 이용하여 그들의 그림에서 인물과 사물의 형태와 양감, 색채의 표현의 정확성을 높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무엇을 그렸느냐, 그들이 본 것을 그렸다. 그러면 그 어떻게 보았는지, 보는 방법에 대해 묻게 되죠. 신고전주의의 대가 앵그르가 그린 인물 드로잉이 무척 작은데도 완벽하리만치 정교한 것을 본 호크니는 어떻게 이렇게 그렸을까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는 결국 많은 화가들이 거울과 렌즈, 강한 조명과 암막을 이용하여 대상을 평면에 투영했고 그것을 손으로 복사했다는 것을 밝힙니다.
사진기술이 없던 시절 실제 같은 그림을 그토록 놀랍게 그려낸 화가들에 대한 경이로 꽉 차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광학을 이용했다는 것에서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일종의 꼼수를 부렸으니까요. 그렇다더라도 광학기술을 도입하여 그린 화가들의 그림이라고 평준화를 이루지는 않습니다, 그림은 여전히 본 바를 손으로 그리는 것이라 잘 보고 잘 그리는 화가만이 뛰어난 화면을 만들어냈습니다.
광학기술에 의존해 가능했던 실제 같은 그림은 그 기법에 의한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카메라의 눈은 하나, 인간의 눈은 둘’입니다.
호크니의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그림은 그의 1960년대와 1970년 초반대의 것으로 주로 로스엔젤레스의 수영장의 풍경과 인물을 찍은 사진을 기반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크니와의 대화를 기록한 마틴 게이퍼드의 저술 ‘다시, 그림이다 Conversations with David Hockney by Martin Gayford’에 의하면 호크니 역시 자신의 당시 그림들을 좋아하지만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방식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것은 카메라 렌즈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사진이 궁극적으로는 실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카메라는 기하학적으로 대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기하학적으로 보지만 또한 심리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내가 저 벽에 걸린 요하네스 브람스의 사진을 본다면, 그 순간 브람스는 문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일 겁니다. (중략)’
마틴 게이퍼드 저 ‘다시, 그림이다’에서 호크니의 발언 중 53p

호크니는 보는 방식을 연구하며 새롭게 그리기 위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으며 그에 기반하여 작업도 계속해서 바뀌고 있습니다. 최근의 실험으론 야외에서 그린 대규모 풍경작업을 들 수 있으며, 현재 한국에 그 작품이 와있는 상태인데요.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Bigger Trees Near Warter’가 전시중입니다. 그림은 12.19m × 4.57m 사이즈의 대작으로, 대략 50호 크기의 캔버스 50점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과천 미술관의 넓은 공간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워낙 큰지라 양팔을 벌린 디귿자 형태로 설치되었습니다. 전시장에는 그림과 함께 A Bigger Picutre라는 60분짜리 영상을 볼 수 있어 영상을 통해 지금 전시중인 그 거대한 회화작품이 영국의 테이트 모던에 기증되었으며, 야외에서 제작된 가장 큰 그림으로 꼽을 수 있다는 것과, 호크니의 작업 방식, 작업에 대한 생각, 생활과 같은 것 볼 수 있습니다. 호크니가 그 작업을 위해 그린 다양한 드로잉을 함께 볼 수 있었더라면 무척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아 아쉬움이 큽니다만, 뛰어난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소화시키고 더 잘-새롭게 보게 되는 면에서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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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이리 9월호는 테오 얀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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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관과 셀로판 테입, 밧줄, 패트병등의 재료를 이용해 해변가를 거니는 기묘한 물체일군을 만드는 작가 테오 얀센입니다.

이번 글에선 작가의 작업 중심으로 성실하게 작성하였습니다. 사실 이 작가의 작업을 통해 좀더 다른 측면에서 글을 쓰고 싶었는데 달리 풀리질 않아 정보가 위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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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 얀센 (Theo Jansen)

나름 연재라고 하는데 예술가 12명 꼽기가 쉽지 않아서 쩔쩔매는 채로 9월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가 분은 처음부터 꼭 하고자 꼽아두었던 작가로 깜빡 잊고 있다가 떠올라서 몹시 다행합니다.
처음 테오 얀센의 작품을 접한 건 관심작가 발표가 있던 대학교 수업에서로 아마 2008년도, 그러니까 이 작가, 테오 얀센의 전시가 한국에서 있기 전이었습니다. 전시는 2010년도에 있었거든요. 2008년 당시 발표자는 해변에서 뭔가 기이한 조형물이 움직이는 영상을 보여주었는데, 화질이 너무 나빴고, 발표자도 가진 정보가 많지 않았습니다. 페트병을 재활용한 친환경적인 작업물인데, 얘네가 막 해변가를 혼자서 움직여요-라고 했죠. 그런데도 강력하게 기억에 남은 것은 ‘페트병’, ‘얘네가 혼자서 움직여요’ 이 두 포인트 때문이었어요.

‘페트병’
테오 얀센은 물리학을 전공하고 예술가로 전향한 작가입니다. 그의 작업은 키네틱 아트로 분류되는데, 움직이는 조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광기라든가 예민함을 전한다기보다 장인의 뛰어난 기술 부분으로 깊이 닿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뭔가를 만들고자하는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에 맞는 도구를 고안할 수 있는 사람. 자신에게 적합한 재료를 발견하고 그것을 심화시킬 수 있는 사람에겐 그 고안해내는 능력의 뛰어남과 함께 그가 고안한 도구에서도 미의식이 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선택한 재료도 그 목적에 훌륭하게 부합하는 것으로 동시에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죠.
제가 페트병에서 포인트가 잡혔던 것은 플라스틱 관이 중심적으로 사용되는지는 몰랐던 상태였기에 그런 것입니다. 분명하게 짚고 가자면 작가가 작품을 만들때 주로 쓰인 재료는 플라스틱 관입니다. 훌라후프와 비슷한 재질의 요.
작가는 바닐라색 플라스틱 관과 페트병 등을 이용하여 해변가에서 바람을 맞으면 움직여 다니는 뭔가를 만듭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해변동물이죠. Strandbeast 또는 아니마리스.
해변동물은 무척 섬세하게 움직입니다. 그것은 전기나 석유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해변가의 바람을 먹고, 모터와 바퀴가 아닌 다리와 날개를 가지고 걸어 다닙니다. 사용된 재료 중 하나인 페트병은 플라스틱 공업물로 그 형태도 단순하고 우리의 주변에 널려있잖아요?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페트병은 플라스틱 주형 기술이 이룬 고도의 산물입니다. 그것은 뭔가를 담고 밀폐할 수 있으며 여간해선 깨지거나 터지지 않고, 게다가 가벼운데 심지어 투명하죠. 잠재력 높은 저력 있는 재료인 페트병이 선택되어 대표적인 용도는 해변에서 부는 바람을 모아 압축 보관하는 것입니다. 늘상 있어서 쉽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귀한 것이 귀한 곳에 쓰였다 뭐 이런 류의 기쁨을 느꼈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재료에 대해 좀 더 얘기를 해볼게요. 테오 얀센은 일종의 규칙을 두고 자신의 해변생물을 만드는데, 플라스틱 관만을 이용한다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생물체가 단백질로 이루어져있듯이 자신의 작품을 한 가지 재료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에서라고 합니다. 단백질은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고 여러 목적을 담당할 수 있는데 플라스틱 관도 그렇다는 것이죠. 그가 선택한 바닐라색 플라스틱 관은 이미 있는 도구와 그가 고안한 도구를 통해 다양한 변형이 가능해지고 그래서 머리가 되고 척추가 되고 촉수가 되고 발굽이 되어 전신을 이룹니다. 작가는 자신이 해변동물에게 구현시키고 싶은 동작에 한계를 맞자 다른 여러 재료도 포함되었으나 일련의 미감은 유지하는 채로 발전합니다. 셀로판테이프, 케이블 타이, 페트병, 고무링, 밧줄 등은 그 형태를 보는 것으로 목적을 파악할 수 있는 직관적인 재료들이죠. 후기에 나무로 만들어진 파레트를 사용하는데 그 해변동물은 마치 코뿔소같습니다.

‘얘네가 혼자서 움직여요’
작가가 만든 무언가가 손을 떠나 스스로의 생존방식을 유지·발전시키며 파괴되기 전까지 충분히 오랫동안 동작한다면 그 장치를 생명체 내지는 생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겠죠. 단지 생물 같은 장치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충분히 뭔가를 부여할 여지가 있는데요. 해변이라는 바람이나 바닷물, 단단하지 못한 지반의 변수 많은 공간에서 계속해서 동작하기 위해선 군더더기 없는 형상과 원리를 구현해야 하고, 그것에 성공하면 비록 외관은 플라스틱 관의 다발이라도, 그것이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큰 미적인 쾌감을 주는지 그래서 기쁜 맘에 그 것에 생명을 부여해버릴지도 모르는 것이죠. 그렇게 테오 얀센은 자신의 작품의 꼭대기부터 기름을 붓고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생명을 부여했습니다.

“해변동물은 왜 움직여야할까? 움직임은 동물의 성질이다. 예를 들어 양에게 다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리가 없다면 양은 들판에 누워 뒹구는 양털 공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머지않아 양 주변의 풀은 뿌리째 다 먹히고 말 것이다. (중략)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걷기가 생명체의 특성이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점이다.”
테오 얀센_위대한 공상가 63p

그래서 해변동물은 열심히 걸어다닙니다. 해변에서 바람을 맞으면 앞으로 가거나 뒤로 가고, 물에 닿으면 뒷걸음질치고, 폭풍우가 치면 자신의 몸을 해변에 고정하고, 바람이 없으면 몸에 저장해둔 공기를 이용해서 다시 움직이고, 때로는 모래를 몸에 발라 위장을 하는 그런 활동을 하면서요.
해변동물은 사용되는 재료나 메커니즘의 변화에 따라 연대기가 달라집니다. 그 명명도 무척 재밌는데 단적인 예로 칼리둠 시기와 테피데임 시기가 나눠진 이유는 플라스틱 관을 구부리는데 사용한 열기구의 온도에 따른 것으로, 칼리둠 시기는 열기구를 고온에 맞춘 채로 관을 구부렸다면 테피데임 시기에는 저온에 두고 구부린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온도를 바꾼 이유는 고온에서 구부린 다리의 관절이 금세 상해버려서 저온이 적당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고요.
테오 얀센은 1990년 자신의 해변동물을 만들기 시작한 일을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해변동물이 자신으로 하여금 만들기를 종용했다고요. 테오 얀센을 통해 해변동물은 세상에 등장하여 성공적으로 발전하고 다양해지고 순회 전시도 다니고, 그리고 BMW의 이미지 광고에 등장하여 수백만의 사람들의 정신에 남았다고요. http://youtu.be/M5GgZ-RfpD8 본 링크를 통해 광고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위대한 몽상가’라는 제목으로 그의 작업과 관련한 잡기에 대해 직접 쓴 책을 추천합니다. 저는 그의 해변동물에 사용된 도구-예를 들면 관 절단 장치와 같은 것들 직접 만든, 나 해변동물의 관절, 발, 등의 신체 부위의 기록사진을 보면 두근두근한 기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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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이리 8월호 가브리엘 뱅상입니다.


8월호가 좀 일찍 나왔죠. 뱅상은 몹시 고운 분인데 그래서 곱게 그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는데 이것도 좋죠. 참 다행입니다. 닮게 그리지 않는다고 이분들중 아무도 제게 클레임을 걸지 않죠.
만사에 체념이 넘실대는 7월이었습니다.
그래도 방정리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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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뱅상 (Gabrielle Vincent)

피카소의 일화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제 부족한 글의 도입으로 삼겠습니다.

한 부인이 카페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피카소를 보고 자신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피카소는 몇 분간 여인의 모습을 그려서는 그림값을 묻는 부인에게 5000프랑을 요구했다. 부인은 놀라 항의했다.
"아니, 그림을 그리는데 몇 분 걸리지도 않았잖아요?"
그러자 피카소가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40년이 걸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각기 다른 매체에서 한 너 댓 번 접했더랬는데 몇 번인가는 화가가 달랐고. 또는 그림의 대상이 달랐고, 카페가 아닌 미용실이 되기도 하고 뭐 그림의 액수가 바뀌기도 하고 했기 때문에 파블로 피카소 내지 실존 화가의 이야기라고 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이야기의 성분이 바뀌어도 전달하고자 하는 맥락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무리가 없겠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 한 친구가 제 그림에 대해 평하며 했던 말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당시 저는 솟은 파도와 타일이 깔린 바닥을 그렸었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차치하고, 그 바닥타일 한 장이 그림상에서 대략 5mm정도의 크기였죠. 타일이 쫙 깔린 풍경이라고 고지식하게 타일을 한 장씩 그렸더랬죠...^^.
그 친구는 제가 타일을 일일이 그린 것과 같은 노동집약적인 면을 그림에서 보여줘야 사람들이 그림을 쉽게 받아들인다고 했어요. 그렇다고 동의했었죠. 일학년 때엔 과제로 레이스천이 깔린 정물화 그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 레이스를 또 일일이 그리고 앉았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 세밀한 부분을 하나하나 그리고 있노라면 내가 레이스를 그리는 이 노력이면 레이스를 하나 뜨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또 한번은 어시스던트 일을 할 때인데, 지붕이 많이 보이는 위치의 기와집을 그릴 일이 있었어요. 그 지붕의 기왓장을 하나하나 그리고 있는 제게 작가님은 회화적이지 못하니 다른 표현법을 써보라고 권유하셨었는데 제가 그런 식으로 좀 단순한 면이 있네요.
여하튼 그런 때에는 그림 속 타일을 팠다-레이스를 팠다-기와를 팠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죠. 팠다는 말은 곡괭이를 들어 땅을 팠다-우물을 팠다-수로를 팠다하는 것처럼 결실을 위해 노동이 필요함을 분명하게 의미하는데 그림을 그림에도 이 표현을 붙임이 자연스러운 겁니다. 노동이란 무엇입니까. 땀 흘려 수고하여 땅의 소출을 받는 것으로 태초에 받은 형벌이자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의 의무죠. 그래서 사람들은 으레 농부는 땅을 파길 바라고 학생은 공부를 파길 바라고 화가는 그림을 파길 바라죠. 따라서 앞서 말한 일화에서 부인이 그림 그리는데 몇 분 안 걸렸는데, 그렇게 큰 돈을 요구하냐고 물은 것은 부인의 입장에서 합당한 이의제기입니다. 화가는 거기에 대해서 40년이 그렸다고 응수함으로써 자신이 그은 그 획 획들은 자신의 평생을 쌓아서 이룬 경지이므로 노동량과 투입시간을 따지자면 보이지 않는 시간과 보이지 않는 노동이 담겨있음을 알려준 것이죠.
가브리엘 뱅상은 벨기에 브뤼셀 태생의 동화작가로 저는 ‘그 어느날 한 마리 개는’(또는 ‘어느 개 이야기’)이라는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스마트 폰을 들어 검색해보시면 그녀의 뛰어난 드로잉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동화책하면 떠오르는 다채로운 색이나 과장된 그림체, 혹은 의인화된 동물들은 없고 대신 부드러운 검정 목탄으로 때로는 휘갈기고 때로는 가만히 그려낸 형태들이 있습니다. 그 단순함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작가의 역량 때문입니다. 얇아지고 굵어지는 선의 쓰임이 그리고자하는 바에 정확히 닿아있죠. 그래서 제가 앞에서 말한 보이지 않는, 축적된 노동량 운운한 것은 그녀의 그림에서 그러한 기운생동을 느껴달라는 말씀으로 덧붙인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피인 그림은 뛰어나다치고 내용은 어떤가. 저는 그녀의 다른 작품 ‘거대한 알’에 대해서 조금 알쏭달쏭한 느낌을 갖습니다. 일단은 동화책의 형식을 빌어 나왔으나 그것은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내용이라기엔 비유하는 바가 큽니다.
내용을 잠깐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거대한 알’은 어느 날 거대한 새가 거대한 알을 낳고 떠나면서 시작되는데, 그 거대한 알을 발견한 사람들은 알 주변에 모여들어 살기 시작해서 어느새 도시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알을 중심으로 유원지를 짓기도 하고 신이 나있죠. 그런데 그 알에 금이 가며 새끼 새가 태어나게 되고...
나머지는 책을 통해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
사실 제가 동화책에 대해 갖는 의문은 어른이 제시하는 아이들을 위한 무언가가 과연 얼마만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혹은 어른인 작가가 자신의 수준을 얼마만큼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낮추어 제시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새삼 깨달은 것은 누구를 대상으로 삼았건 딱 그 대상의 시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를 담을 것은 아니라는 것. ‘거대한 알’은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보다 더 큰 것을 담고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작가가 의인화시킨 동물들을 내세워 이야기를 한 동화집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드리는 ‘거대한 알’은 어린아이의 순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 접하여 평생 이따금 떠올리며 새로운 감상과 함께 자라날 각자의 이야기를 심어주는 것으로 그래서 작가의 모순을 깨닫기도 하고, 어릴 적과 다른 결론을 내기도 하며 함께 성장할 만한 이야기인 거죠. 그렇게 주인공들은 행복하게 살게 되었답니다-내지 그래서 주인공은 나쁜 버릇을 고쳤답니다-의 개과천선이나 권선징악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접한 뒤에 이따금 떠올릴때마다 새로이 질문을 던져줄만한 풍부함을 품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것은 이 작가가 하나의 경지를 이룬 것을 말하겠죠.


글·그림 지인 freshdrawing.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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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이리 7월호 김범작가입니다.



이번호는 김범작가입니다.

http://postyri.blogspot.kr/2013/07/2013-6.html
월간이리 링크입니다.

http://issuu.com/postyri/docs/postyri1307web/41?e=5641367/3844431
이 링크를 통해 7월호를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웹상에서 보시는 페이지의 하이퍼링크가 살려져있습니다. 따라서 클릭하시면 해당 작가의 블로그나 트위터 등으로 연결이 된다고 합니다.
편집장님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6월에 한발짝도 못 움직였고 그에 덩달아 형편없는 기분입니다.
기분만 그렇고 형편없이 살진 않았지만 어쨌든 매한가집니다.
기운 빠지는 근황을 전하게 되어 면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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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 (Kim Beom)

‘왜 좋아?’ ‘그냥’
‘왜 좋아?’ ‘잘해서’
의 차이는 뭘까요?
‘좋다’와 ‘잘한다’는 틀립니다. 라는 말은 틀린 말이죠. 아시다시피 ‘좋다’와 ‘잘한다’는 다릅니다가 맞습니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분명히 다른 말이지만 혼용됩니다. 그리고 그 다르다-틀리다의 혼용이 문제되는 것은 저변에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는 차별정신이 깔려있기에 그렇고요. 좋다-잘한다도 마찬가지로 혼용되는 말사이인데, 이 경운 ‘좋다’의 의미가 워낙 넓게 쓰여 ‘잘한다’를 부분 포함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잘한 것이 좋다’라는 표현은 ‘좋은 것이 좋다’는 표현이상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의미의 겹침은 다르다-틀리다와의 관계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분명히 해야 할 것임엔 마찬가지인데요.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리기 쉽기 때문이에요. 뭔 소리냐면 잘한다-좋다-착하다/옳다로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게 좋은 것이 옳다로 스물스물 넘어가는 정신작용을 경계해야하는 거죠. 취미활동을 건강하게 발전시켜나가는 데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잘한다-좋다가 동어반복이 되는 중복 부분을 빼고 ‘잘한 것이 좋다’ 했을 때 잘한다-좋다는 좋다-잘하니까라는 판단과 근거의 관계인거죠.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 일컬어 ‘절대미’에 더 가까운 것은 내 기준에서 볼 때 잘한 것이고 그렇기에 좋은 것이지만, 좋다에 옳고 그름을 포함해버리는 실수를 한다면 그것이 사회의 도덕기준이나 가치평가의 영역으로 비어지는 거죠. 나에게는 좋은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옳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을 일단 못 박아야 해요. 이것이 당연한 것인데 때때로 의식하지 않으면 의식 사이에 교묘하게 감춰진 채 나도 모르게 작동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잘한 것이고 옳은 것이야. 너가 나와 다른 것을 좋아한다면 네 취향은 틀린 것이야.- 이렇게 자연스럽게요. 취미활동은 이런 태도를 경계하는 고도의 판단을 겸해야 하며 결국 취미활동으로 정신은 더 자랄 수 있게 됩니다.
잠시. 개인의 취향을 절대미로 말해서 싫으실지 모르겠는데요. 집단의식이 공유하는 미가 어떻든 제겐 절대라는 개념은 절대적으로 개개인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대를 추구하는 개인들끼리는 절대를 추구한다는 것만 공유될 뿐, 그 ‘절대’는 같지 않은 것이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절때리세요. 제 생각엔 절대가 절대인 것은 절대라는 개념 하에서만 절대인 것이고 개개인에게 절대는 다르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고, 내게 좋은 것이 옳은 것은 아닌 하에서 그리고 우리서로는 진짜 많은 부분이 같은데 개성인 부분만 다른 하에서만큼 ^^ 우리의 절대는 다릅니다-라는 것.
김범 작가의 작업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게시판의 포스터. 아마 2010년 아트선재에서의 개인전 알림 포스터였던 것 같습니다. 치타가 영양을 쫓는 영상을 영양이 치타를 쫓는 것으로 보이게끔 편집한 비디오 작업의 캡처가 그 포스터에 있었고요. 작품 제목 및 연도는 [볼거리(spectacle) 2010]입니다. 와, 좋다. 라고 생각했죠. 사실은 사진 작업인 줄 알았다가 후에야 비디오인 것을 알았지만.
이 경우에 ‘잘해서 좋다’를 적용하려면 무엇을 잘했다고 해야 할까요. 일단 예술작품이니까 미적인 의미에서 접근해야할까요? 아니면 비디오 작업이니 기술인 영상편집을? 이런 경우엔 발상을?
이렇게 그냥 좋다에서 멈추지 않고 왜 좋은가를 찾는 일. 즉각적으로 느낀 ‘좋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을 하도록 만드는 작품은 성공한 것일 겁니다. 어떤 것이든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은 결국 내가 본 작업을 마지막 도미노로 삼아 넘어진 도미노의 과정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도착한 첫 번째 도미노에는 어떤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세계관이 되었든 미적 기준이 되었든 간에요. 그 것은 절대미와 닮아있고, 내지는 닿아있고요. 사람들은 절대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작업이 되었든 삶의 다른 것에 있든 본인의 여정이나 결과물이 절대를 암시하거나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접했을 때 때로 그냥 좋다는 말로 두루뭉술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말로 표현이 안 되거나 말로 표현을 할 필요가 없거나인데 가끔은 말로 표현할 테면 말로 하지 뭣 하러 작업을 하나 싶기도 하니까. 좋아서 좋음을 내세우죠. 저는 김범 작가의 작업의 방향이 가르키는 절대에 공감을 하며 그것들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것은 즉 그냥 좋습니다. 그리고 그냥 좋기에 왜 좋은 가를 찾도록 시작하게 하는 것이고요. 그러니 ‘잘해서 좋다’보다 때로 ‘그냥 좋아’가 더 가능성을 품은 말일 겁니다.


글·그림 지인 freshdrawing.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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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이리 6월호 장 뒤뷔페 입니다


이번호 드로잉은 특히 맘에 듭니다. 음.. 네, 그렇습니다.
http://postyri.blogspot.kr/2013/06/2013-6.html
월간이리 블로그 링크입니다.

http://issuu.com/postyri/docs/postyri1306web/1?e=5641367/2856679
이 링크를 통해 월간이리 6월호를 보실 수 있습니다.

요근래 드로잉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딱히 업로드할 만한 그림이 없었기도 했고. 쳐지네요.
올해도 벌써 여름이라 자칫하면 말라죽은듯 보내게 될테니 고삐를 잡아야죠.
모두 필요한 의식주가 풍요로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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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뒤뷔페 (Jean Dubuffet)
‘나는 무엇을 잘 못해.’
이 말을 하긴 쉽습니다.
‘나는 무엇을 잘 해.’
이게 어렵죠. 왜 어려울까요?
겸손이 미덕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가장 크게는 잘한다고 자평할 ‘자격’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객관적으로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분야, 예를 들어 달리기 같은 경우, 국민 대다수가 자신의 100m내지 50m달리기 기록을 알기에 평균내기도 쉽죠. 프로선수와 비교하면 잘하지 못하지만 대중과 비교하면 잘하는 것일 때 편하게 ‘나 잘해’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수치화가 가능하지 않은 것 중, 감상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무언가를 감상하고 잘한다, 나쁘다 얘기할 수 있으려면 우선 그 무언가를 많이 접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접해도 영 감이 안 오는 분야가 있지만 접하다보면 적어도 취향은 생기니까요. 그런 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의 구분을 하는 것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접해가며 취향을 넓히거나 깊이 파고드는 것을 취미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 취미 하나는 피아노를 치는 것입니다. 잘 치냐고 물어보시면 멜로디를 왼손 코드에 맞춰 연주할 정도이지만, 꽤 좋아합니다. 집에 피아노가 있기도 하고요. 만약 집에 피아노가 없다면 저는 피아노를 치는 생활을 할 수 없겠죠. 우리 집에선 오로지 저만이 피아노를 칩니다. 다행히 소음문제로 이웃에게 헤를 끼친 적은 없었으나 각자 방에 있는 가족에게 폐가 되지 않는가하고 신경이 쓰이곤 해요. 그래서 가끔 엄마에게 여쭤봅니다. 너무 시끄럽지 않느냐고요. 그러면 엄마는 ‘엄마는 음악은 잘 모르지만 딸내미가 피아노 앞에 앉으면 좋아.’ 라고 말하십니다. 네, 저 사랑 많이 받고 자랍니...가 아니라, 그러니까 엄마의 말씀에는 ‘엄마는 좋긴 한데 음악을 잘 모르는 내가 좋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하는 태도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겁니다.
잘 모른다는 것은 많이 접하지 않았다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나 피아노를 치고 도서관에서 책빌리는 것처럼 흔히 연주할 공간이 있다면 아마 다른 생활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면 하는 것이다가 자연스러워지는 것을요.
무언가를 좋아한다-싫어한다 구분하고 좋은 것을 취하며 탐구하는 것은 개인 취향을 공고하게 하거나 혹은 다른 차원으로 높여줍니다. 그것은 삶의 질을 높이는 활동인 것이며, 건전한 취미생활 환경이 조성되어있는 것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크게는 사회의 문화융성과 함께 가는 말로 아마추어 감상자가 늘어나는 것은 잠재적으로 아마추어 생산자도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생산, 감상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거죠. 결국 풍부한 아마추어 대중은 그 문화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것. 따라서 무언가에 대한 이론을 깊이 알 때만이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풍토는 사회적 결핍을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에 대한 결핍이냐. 예술이 소수의 엘리트화 된 것에 비해 중간층이 즐길만한 여유와 환경이 없다는 것의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예술향유가 생활이 아니라 교양인 삶을 산다는 거죠. 이론은 잘 몰라도 좋다, 싫다를 말하는 것에 스스럼없는 층이 넓다면, 그것의 저변이 넓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그 무언가를 접하고 누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기 때문에요. 따라서 예술작품이 좋다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면, 그 판단의 수준을 차치하고 대중도 예술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인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흔히 듣게 되는 말이 ‘내가 잘 몰라서...’이고요. 그리하여 무엇이 왜 좋은가를 말할 때 엘리트의 말에 기대게 되는 것이죠. 예술에 잣대를 댈 수 없겠으나, 그 잣대가 있다면 엘리트가 알리라는 겁니다.
하지만 장 뒤뷔페는 콧방귀를 뀌죠.

뒤뷔페는 ‘예술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만든 작품’을 연구하면서 전통적이고 진부한 창작의 원칙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이러한 ‘전통적’ 예술이야말로 문화적 예술보다 선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순한 만남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후 그의 창작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진정한 발견이었다. 뒤뷔페는 ‘예술은 한 사람(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며, 타자로부터의 어떤 가르침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장 뒤뷔페 [우를루프 정원]도록의 서문 18p

잣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장 뒤뷔페를 이번호 예술가로 꼽은 것은 순전히 그의 사상 때문이에요. 그는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대중을 따돌린 채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는 엘리트 문화를 비판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림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해내는 그림, 정신병원에 갇혀있거나 그림을 업으로 삼지 않은 이들의 그림을 수집하고 컬렉션 시켰습니다. 그렇게 그가 주창한 아웃사이더 아트를 살펴보면 대중보다는 미술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광인의 광기에 의한 예술을 선호하는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를 넘사벽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돼서 부분적으로만 동의하지만요. 예술에서 순수함과 광기를 드러내는 것. 정신을 번뜩 뜨이도록 낯설게 만드는 힘. 새삼 번뜩 뜨인 정신이 새로운 것들을 깨닫는 것, 잊었던 것들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니까요.
우선은 단순 유희로써 좋다-싫다를 밝혀보는 것이 분명히 도움될 겁니다.

‘예술은 놀이, 즉 정신의 놀이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주된 놀이인 것이다. 여기 순간적으로 헝겊뭉치를 쳐다보는 아이가 있다. 어떤 생각이 아이의 머릿속을 스친다. 아이에게 헝겊뭉치는 이제 인디언이다. 그리고 진짜 인디언들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헝겊인형을 두려워하기로 결심한다. 실제로 아이는 헝겊인형이 무섭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가 이것이 단순한 헝겊뭉치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어차피 애초에 인형을 인디언이라고 결정하는 것 자체가 다분히 장난끼의 발동이다. 아이는 헝겊인형을 인디언이라고 믿기로 결심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믿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아이는 바로 이런 식으로 정신이 작동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매혹시키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정신적 과정의 실험과 검증이다. 아이는 마치 아기가 작은 발을 움직이면서 노는 것처럼 이렇게 자신의 정신을 움직이면서 논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같은 도록 233p

글·그림 지인 freshdrawing.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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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이리 4,5월호는 바스티앙 비베스와 양영순작가입니다.



왜 이제 올리나 하신 분이 있다면 감사합니다.

월간이리 링크입니다. http://postyri.blogspot.kr/

두분모두 제가 좋아하는 만화작가입니다. 왼편이 [염소의 맛], [그녀들], [폴리나]의 작가 바스티앙 비베스. 오른편이 [아색기가], [천일야화], [덴마]의 작가 양영순입니다.
만화는 정말 대단합니다만 폄하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수준차가 심해서라고 생각하는데요. 심지어 그 수준차가 심한 것들을 함께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화는 글(스토리), 그림, 연출이 종합되어 있기에 수준이 골고루 높거나 골고루 낮거나 어느 한 곳에 편중되어있거나 어쨌든 만화의 모양새로 나오고 같은 매대에 놓이고 같은 포털에 연재가 된다는 거죠.
제가 꼽은 이 두분은 글과 그림과 연출 모두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감에 있어 뛰어난 작가입니다.
...
이번에 4월호에 글을 펑크내서 5월호에 바스티앙 비베스와 양영순 작가에 대한 글을 함께 썻으나 생략합니다.

양작가님은 작가님의 그림체를 참고하여 그려보았는데 팬심에서 우러난 행동이었습니다. ^^

월간이리 3월호 시스토 로드리게즈

월간이리13년 3월호 시스토 로드리게즈, 2013
월간이리 3월호 바로보기


연재를 시작하기 전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예술가 12명을 쓰고그리면 제 예술관이 복음전파급으로 드러나버릴 거란 반 우스개 말을 했었는데 이번 글에 제가 지향하는 바가 가장 드러난 것 같습니다. 할 말 다한것 같은데 앞으로 9명 어쩌지...
글 전부를 올립니다, 위의 링크로 보시면 다른 글들도 보실 수 있습니다.




시스토 로드리게즈 (Sixto Rodriguez)
 
작년 11월에 홍대 상상마당에서 서칭 포 슈가맨이라는 다큐영화를 관람했습니다. 글 전개 차원에서 그 내용을 살짝 읊으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다큐멘터리 후기처럼 된 이번 글입니다.
서칭 포 슈가맨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50만장이 팔린 앨범을 낸 유명 가수 로드리게즈를 찾는 내용의 다큐멘터리입니다. 그렇게 유명한 가수를 어떻게 찾으면 다큐감이냐 싶겠지만 로드리게즈는 유명한 무명인이었습니다. 앨범이 나온 당시인 1970년대의 남아공은 정치적으로 몹시 보수적인 상태로 정부에서 문화를 통제하던 시기였습니다.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가사의 자유로움으로 인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으나 외려 저항음악으로 더욱 더 알려지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다큐의 표현대로라면 남아공에선 전축이 있는 집이라면 대부분이 로드리게즈의 앨범을 가졌으며 그 인기는 미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앞서 유명무명 했다시피 로드리게즈가 현재에 어떻게 지내는지는 물론 당시에도 어떤 인물이었는지 남아공의 아무도 몰랐습니다. 로드리게즈는 앨범만 남긴 가수였기 때문인데요. 앨범으로 돈을 벌었을 음반사의 행방자체가 묘연하고 팬들 사이에 그나마 있는 루머는 모두 로드리게즈가 진즉에 죽었다는 얘기로 연달은 공연 실패로 인해 자살’, ‘공연 중 관객에게 인사를 고하고 자살’, ‘약물 과복용으로 자살등등이 있었습니다. 로드리게즈의 빅팬이었던 시거맨은 그토록 인기 있던 가수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사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음에 놀라워하며 그를 찾기 시작했는데 로드리게즈의 노래 가사에 적힌 지역명을 힌트로 남아공이 아닌 미국, 디트로이드를 추적해냅니다. 그래서 밝혀진 사실은 음반이 처음에 미국에서 발매되었다는 겁니다
미국의 음반 제작자는 디트로이드의 허름한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한 남성의 음악이 참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는데 그가 바로 로드리게즈였으며 담배연기 자욱한 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사는 곳은 어디인지 어떤 일을 하며 먹고사는지 모두 알 수 없었고 다만 정처 없는 일용직 노동자 정도로 살았으나 그는 진짜 예술가였다는 평을 합니다. 음반을 냈으나 성공하지 못한 채 거의 무명과 마찬가지로 끝을 냈는데, 그들은 로드리게즈의 실패에 아직도 납득하지 못한 채로 멕시코 출신임이 너무 분명한 그의 이름 때문에 미국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게 아닐까 말합니다만 여하튼 음반이 실패하고 계약도 마친 뒤 로드리게즈는 음악가로 다시 활동하지 않았고, 그 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 또한 미궁인 채였습니다
시거맨은 로드리게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웹사이트를 열어둔 상태였는데 그로 인해 한 여성의 연락을 받게됩니다. 그녀로부터 자기 아버지가 당신들이 찾는 로드리게즈인 것 같다면서 자기 아버지는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듣죠.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시거맨은 로드리게즈가 미국 디트로이드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고 네 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로 살고 있다는 것과 남아공에서 자신의 음악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았는지 모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긴 시간의 노력 끝에 로드리게즈를 발견한 시거맨과 다른 사람들은 열광하며 남아공으로 그를 초대하고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남아공에 도착한 로드리게즈의 딸들은 그때까지도 아버지의 음악적 성공에 대해 확신할 수 없던 나머지 자기들끼리의 대화로 공연장에 20명만 있으면 다행이겠다고 했다 합니다. 그러나 축구장만한 공연장에 심지어 가득 차기까지 한 관중은 로드리게즈가 무대에 등장하자 열광을 멈추지 않아 10분간 곡은 시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로드리게즈와 무대에 선 밴드멤버들은 그가 너무 많은 관객 때문에 주눅이 들면 어떡할까 걱정했지만 음악이 시작되자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고, 로드리게즈는 완전히 준비되어있었으며 무대에 선 그는 완벽히 그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이 너무 멋졌습니다. 그 자신으로 완전히 준비되어있음이 말이죠. 그가 갈고 닦여있음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던 것이고 외부의 요인은 기회가 오느냐 마느냐인 것인데, 그가 갈고 닦여있지 않았다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겠죠
로드리게즈는 정말 그야말로 군자입니다. 공자 말하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다른 이가 알아주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음(혹은 역성내지 않음)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했으니 말입니다. 많은 분들에게 그렇듯 저 또한 이 구절이 좋아 종종 떠올리게 되는데요. 능력을 가졌음을 인정받아 합당한 자리 앉아서 뜻을 펼치고 길이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바람은 천하통일의 영웅이 필요했던 시대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으며 사는, 자기가 평가하는 자기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외부에 성내지 않고 삶은 자기가 추구하는 바를 향한 이러한 사람을 만나면 기쁩니다. 자신의 절대값으로 산다는 것은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최고로 건강한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모두 다른 역량과 조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남과의 비교를 통한 것이 아닌 자기다움을 제시할 수 있는 것 아닌가하는 마음으로 그러니까 진정 자기되기를 추구하는 과정에 자신을 두는 것. 너는 어떠한 뭔가가 되기보다 너 자신이 되라고 말하는, 그래서 전 너 자신을 알라가 그런 시작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관객의 열광이 멈추지 않았던 10분간, 그 순간을 그가 삶의 보상으로 여길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 기뻐했음은 분명합니다. 그 열광 뒤에 그는 관객에게 ‘Thanks for Keeping me alive.’라고 말했으니까요. 음악적 삶에서 보상을. , 보상이란 말은 그간의 무명이 마치 인정을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므로 선물이라고 고치겠습니다. 음악을 통해 예기치 못한 선물을 받은 이의 감사함이죠.
사람들은 예술을 하는 이에게 창작을 한다는 그 신비로움으로 인해 주목을 하고 영향을 받습니다. 물론 유명세에 따라 다르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미칠 영향력이라면 건강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삶을 사는 예술가이기를 바랍니다.
로드리게즈를 찾는데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시거맨은 로드리게즈를 찾은 뒤로 자신은 음반가게를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함께 로드리게즈를 찾아낸 다른 사람들의 삶은 크게 바뀌었으나 정작 로드리게즈 자신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딸도 아버지는 콘서트 수익금을 주변에 다 나누어주고 여전히 그전처럼 살고 있다고 하고요. 그는 본디부터 자기로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현림 시인의 시 '지금 필요한 것' 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 시의 일부만 발췌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며 부디 꼭 찾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완벽한 생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묵묵히
두더지처럼 깊이로 사는 당신 얘길 듣고 싶다
당신 손에서 목수의 손을 본다
나무와 톱 망치와 못을 다스리는 손
사려 깊은 손, 뭐든 일으켜 세우는 손, 그 진지함을
일용직 노동 중에서도 남들이 피하는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로드리게즈는 제게 그러한 손을 가진 목수로, 완벽한 삶을 요구하지 않고 자신으로 산 개인입니다. 자기 자신이 되기에 힘쓰며 자기를 세우는 삶을 살고 그를 통해 타인 또한 세우는 사람인 개인을 존경을 담아 사랑 할 수밖에 없습니다.
 





월간이리 2월호는 댄 퍼잡스키

월간이리 13년 2월호 댄 퍼잡스키, 2012
2월호 링크

2월호가 나온지 벌써 한주가 넘게 지났습니다만 포스팅이 늦었습니다. 1월호 반응을 봤는데 주변 사람들 몇 분에게 마리나 편은 글이 어렵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번이 글도 쉽고 그림도 재밌고 더 낫다고 합니다.  어려우라고 그렇게 쓴 것은 아니었지만..쉽게 씀과 별개로 저로썬 글을 되다 만채로 멈춘게 영 부끄럽습니다. 내용 재료는 괜찮아서 더 시간을 들이면 좋은 글이 될 것 같은데 제가 가진 소스니까 다른 글에서 또 튀어나올 땐 더 익어서 나오겠죠.
기고한 글의 일부를 수정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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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퍼잡스키를 검색할 때마다 낙서를 예술로 승화시킨이라는 표현을 꼭 보게 되는데 

이것은 그냥 낙서가 아니다, 볼만한 것이 있다. 이것은 뛰어난 메시지를 뛰어난 방식으로 담고 있다.’

의 축약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생각키에 이런 때에 예술이라 이름 되는 것은 일단 고급의 볼거리로 제공된 것입니다. , 말 그대로 예술은 이야기가 될 만한 볼거리 중 하나입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풍성한 빈틈 사이사이가 이야기로 가득 차있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보러갑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자극으로 인해 활성화되어 뭔가를 할동력을 얻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뭔가에 몰두할지 방향을 정하는데 영향 받고 싶기도 할 테고요.

이번에 댄 퍼잡스키를 그리기로 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예술가라면할 일 중의 하나는 사회 구조와 그 구성단위를 도식화해서 사람들이 세계에 대한 인식을 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댄 퍼잡스키의 드로잉은 짝·, ·, ·칼 등의 비유로 이원 되어있기에 왼손·오른손에 무엇을 두고 서로를 비교할지 제시해줍니다놀라울 만치 적은 획으로 그림에 담은 비교, 분류 단순화는 잔가지 많은 세계를 뿌리-줄기-가지-잎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위고 아래인지, 누가 강하며 약한지, 그리고 그런 것을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등의 역학관계와, 구성요소는 무엇이고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는 이는 그렇게 단순화된 구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겠죠. 그러면 어떤 역할을 맡을지, 어떤 것을 거부하고 어떤 것을 받아들일지를 정하는 분별력을 얻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림을 보기위해선 잠시 멈춰야합니다. 이 정도로도 써두니 그것만으로 일단 충분할지모르겠네요.
 
www.danperjovschi.kr/ 이 링크는 토탈 미술관에서 2012년에 댄 퍼잡스키의 개인전을 준비하며 마련한 사이트인데 멈춰서 볼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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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보를 더한 부분은 없습니다. 2월호를 가지고 계신 분은 어떤 부분을 고쳤는지 찾는 재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림 편집도 다르죠.

월간이리 뒷 표지 담당의 썰 (2) -10/9에 수정

월간이리 13년 1월호:마리나 아브라모비치, 2012




우헤헤 월간 이리 1월호가 나왔습니다.
월간이리 2013년 1월호(클릭)http://postyri.blogspot.kr/2013/01/2013-1.html
위 링크를 통해 웹에서도 월간이리를 읽으실 수 있어요.

그럼 1월호도 나왔겠다. 썰을 풉니다.

(2)
두루 두루 크게 말해 예술가는 콘텐츠 제공자입니다. 예술작품이라는 콘텐츠를 내놓는 이로써, 작품의 질은 예술이라고 칭해질 때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놓는 사람 개인의 수준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의 수준은 그가 타고난 바와 그것을 연마한 정도입니다. 모두의 출발선이 다르고 삶 중에 터지는 아이템 운도 다르고 하여, 목적지까지의 도달한 시간이라든가 따낸 점수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결국 눈에 볼 수 있는 척도로 우열을 가립니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부당함은 어쩔 수 없으나 사람들은 자기의 잣대가 가장 합당하다고 여기지만 가장 덜 부당한 것 뿐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금 제 잣대를 내미는 겁니다. 제가 뽑은 예술가는 제 잣대로 볼 때, ‘타고나고 연마되었다.’ 싶은 사람들(이자 제가 알만큼 유명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진 편향됨을 건강하게 키웠다고 봅니다사람들을 나무라고 치면 그 줄기나 가지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다는 겁니다. 나무의 유전인자는 둘째 치고 늘상 그늘져있는 곳엔 가지가 잘 가지 않고, 땅속에 바위가 있다면 뿌리가 구부러지겠죠. 그런 식의 편향 가능성이 사람에게 있는데, 예술가는 그중에서도 특히 굽어자라기 쉬운 인간유형이고 이제는 편향을 권장받기도 합니다. 편향권장에 대해서 제 짧은 생각은 사람들은 번뜩임의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건데요.

영국의 부유하고 명예로운 가문 출신으로 풍요로움에 익숙했던 작가는 아버지의 인도 발령으로
인도에서 살며 마주한 식민지의 삶을 통해 겪은 고뇌를 그림을 통해 드러냈다.*

예처럼 뚜렷한 인과관계를 출처로 그림을 이해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삶의 고통을 마주할때마다 자극되는 창조성이 그를 몰아갔다. 그는 피를 뿌릴 수 없어 대신 물감을 뿌렸고,
그 위에 굴렀고, 핥았고 신음했다. 마침내 만들어진 화면은 그 영혼의 울부짖음 그 자체였다.*

식으로 예술가의 광기, 기이함의 소산으로 말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두 예시 다 있을 법하게 지어낸 겁니다.

아마 그 편이 더 신비롭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은 신비의 자리를 너무 많이 잃었고 예술에게 잃은 신비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예술가가 품은 창조적인 무엇을 인위이나 인위를 넘은 것이라고 평가하고, 그 활동을 하는 예술가를 그림자가 없는 인간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의 광기가 그 예술의 진실함을 담보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워져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예술가의 광기는 공유되지는 말았어야 했습니다. 공유는 반복 노출의 가능성을 높이고 반복 노출은 곧 학습이죠. 광기를 학습할 수 있다는 말은 광기의 태도만을 배운다는 소리에요. 광기가 예술의 척도라고 여기는 것은 결국 예술가를 지망하거나 그 태도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광기의 태도를 권장하는 것입니다. 예술가의 기이한 태도는 수급에 맞춰 소비되고 있어서 연출과 진짜사이에 헤매기가 피곤합니다. 학습된 광기가 대중에게 다시 한 번 먹거리로 제공되는 것도 막을 순 없지만 막고 싶은 일입니다.

물론, 편향됨=치우침은 중립의 자세로는 균형이 맞을 수 없을 때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변화가 필요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그렇지만 권장될 바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테트리스 게임에서 작대기는 길이방향으로 자란 편향의 결정체이지만 그게 아주 절실할 때가 있죠. 한방에 4, 5줄을 소멸시켜 노력대비 큰 쾌감을 주고요. 하지만 그것만을 기대하는 테트리스는 조화가 깨져 산으로 가기 쉽습니다.

제 잣대에 대해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저는 타고난 것에 덧입어 풍부한 혹은 설득력 있는 = 내실 있는 계속해서 제공할 수 있으려면 제대로 된 인간이길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라는 말은 매우 깊이 있는 말입니다. 삶에 적용하자면 '제멋대로'와 혼동되는데 '제대로'는 훨씬 어렵죠. '제대로' 가고자하는 그들은 다분히 인간적인 자기 기준에서 인간이고자, 혹은 인간이길 초월하고자 하면서 주변 환경을 극복하고 자기를 형성합니다. 물론 어떤 계층이라도 사람은 자기의 환경을 극복해야합니다배고픈 사람은 배고픔을배부른 사람은 배부름을 말이죠그렇게 자기극복과 자기형성의 진실함에 목마른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은 훌륭한 태도를 지닌 것입니다. 예술가 뿐 아니라 어떤 삶의 모습에서도 제대로를 추구하며 살 수 있을 것인 그러한 성질입니다.

'자기극복'은 '자기형성' 내지는 '자아실현'을 배척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둘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줄 수 있는 태도입니다. 제대로와 제멋대로의 차이인 것인데요. 나무는 자라는 것이 본성이지만 자라기 쉬운 쪽으로 치우쳐 자라는 것을 극복해야 건강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며, 건강하게 유지된 생명이 결국 건강한 열매를 줄 것이라는 간단한 사고방식이죠. 제대로 먹는 것과 제멋대로 먹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보시면 이해하기 쉽겠습니다. 제대로 먹으면 좋은 똥을 쌉니다.

똥이 흙으로 돌아가 거름이 되는 세상의 환원을 저는 정말 사랑합니다.
사람 또한 그런 환원의 일부임을 볼 때, 정말로 사랑스럽습니다.

월간이리 뒷 표지 담당의 썰 (1)



(1)
소식이랄까.  월간이리 뒷 표지를 예술가 얼굴 드로잉으로 채우게 되었습니다. 월간이리는 상수동 이리카페에서 매달 발행하는 무가지인데요. 여차저차 연결되서 하게 되었어요. 2013년 1월부터 한 해간 마지막 두 면엔 제가 뽑은 예술가에 대한 글, 그리고 뒷표지엔 그의 얼굴 드로잉이 실립니다.  제 그림을 오프라인으론 처음 내보이는 것이라 좀 설레요. 글도 그렇고요.
예술가의 얼굴을 드로잉하는 것은'그리고 싶어요재밌을 것 같습니다.' 하고 쉽게 정한 것에 비해 아주 어려웠습니다드로잉이야 좋아하는 예술가를 그리면 된다 싶기도 한데, ‘자기가 좋아하는 예술가 그린거래.’에서 끝나는 그림이 아니라 이 예술가를 왜 그렸는지 그리고 앞으로 남은 사람들은 어떤 개연성으로 이어지는지의 것들을 적고자 하니 그거 어렵대요. 그리고 싶은 얼굴을 그릴 땐 동인이 저에게 있으니 그림도 술술 그려지고 논리를 세울 필요도 없는데 미션 [예술가를 그려라.]는 그에 비해 좀 복잡한 겁니다일단 외부에서 들어온 명령어라 저의 내부에는 그것이 나올 틀이 없기에 새로 짜지 않으면 글까지 한 세트인 결과물을 뽑아낼 수 없었습니다1년 예정이니 제가 생각하는 예술가를 12명이나 그릴 텐데 12명은 12사도열두 사도면 복음전파즉 이것은 제 예술관까지 전파 되버리는 무시무시한 작업인거 아닙니까? 그런데 예술관이 바로서지 않았다면 어쩌죠? ^^ 여태껏 살면서 본 것들접한 것들을 '좋다나쁘다느낌 없다.' 하며 항상 분류해왔으니 취향은 분명한데 관으로 세울만큼 그것들을 명확한 언어로 정리해본적은 없어요일단 시작이 절반으로 인도해주기를 기대하며 좋아했던 작가를 다 꼽아 놓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뭔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지만 사실 그게 그거에요. 닭과 알. 뭐가 먼저인지는 문제가 아니에요. 진리는 알이 있다면 닭은 분명히 있는 거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현현한 순서의 전후관계가 바뀔 때 서로가 부정된다면 그때만이 순서를 두고 진리를 논할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요. 이 생각을 요번 경우에 적용하자면 예술가를 먼저 정해놓고 글을 쓰기 시작해도 사실 제 안에선 동시에 존재한 것이기에 자연스레 논리와 맥락이 설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무에서 유를 내는 창조로 썰을 푸는 것도 가능한 경우가 있지만 적어도 제게는 아니라서 만약 그렇다면 글 자체가 진행이 되지 않을겁니다. 그래서. 제가 술술, 어떤땐 쥐어짜가며라도 글을 바르게 썼다면 그와 함께하는 그림도 결코 지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완벽한 콘텐츠*가 된 셈일 테니까요. 

*콘텐츠-위키백과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콘텐츠(content)는 각종 매체가 제공하는 정보이다저작물창작물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쥐어짜네 어쩌네 해도 즐겁습니다. 위에도 적었다시피 글과 그림을 세트로 처음 내보이는 거에요. 그림은 뭐 그렇지만. 글도 읽어줄만 할지..?

(월간이리는 굉장하게도 인터넷을 통해서도 볼 수 있어요. 1월호가 나오면 (2)번 글을 올리면서 링크를 걸어두겠습니다.)